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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두초록 Mar 05. 2022

노골적인 풍자 우화가 주는 날카로운 경고

《동물농장》 리뷰


동물농장 

저자 조지 오웰

역자 도정일

출판사 민음사

출간일 1998.08.05

페이지 160


《동물농장》은 노골적인 풍자 우화다. '작품 해설' 부분에 임의적으로 작품 내 세계와 당대 상황의 연결 관계를 1:1로 대응해서 표시할 수 있을 정도다. 사실 작가가 살았던 냉전 시대에 대해서도, 당시의 소련과 주변의 정치적 상황에 대해서도 잘 모른다. 하지만 이 작품이 풍자를 통해 고발하려고 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너무나도 선명하게 다가왔다. 특정한 시대를 넘은 보편적인 사회상을 이 소설이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의 배경이 농장이고 주요 등장인물이 동물일 뿐, 사실 지금 지구 곳곳에 소설 속 농장처럼 '혁명으로 시작해 부패한 권력이 된 조직'은 무수하다. 다 같이 잘 살기 위해 기존 권력을 밀어냈으나 결국 혁명의 주도자 중 일부가 또다른 권력층이 되어 부패해가는 내용은 적어도 분단국가인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에게는 결코 낯설지 않은 내용이다.


동물들은 자유와 평등을 기반으로 한 풍요를 목적으로 혁명을 이루었고, '메너 농장'에서 '동물농장'으로 이름도 바꾸었다. 초반에는 구성원 모두가 평등해 보였고 민주적인 절차로 농장의 시스템이 정해지는 듯했다.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기본 원칙들을 '일곱 계명'으로 만들어 정리했지만 글자를 읽고 쓸 줄 아는 동물은 소수였다. 단순하고 이분법적이고 선동적인 구호(네 발은 좋고 두 발은 나쁘다)를 더 크게 내세우게 된다. 읽고 쓰는 것이 완벽한 수준이 된 돼지들이 구성원들을 모함하고 속이고 구슬려서 점점 부패한 특권층이 된다. 그 과정에서 그들이 최초에 내세웠던 일곱 계명은 모두 수정되거나 번복된다. 심지어 돼지가 두 발로 서게 되면서 그들이 강조했던 구호 '네 발은 좋고 두 발은 나쁘다'마저도 부정한다. 결국 농장 이름도 '메너 농장'으로 돌아간다.


작품 내 등장인물이나 사건을 당시의 실제 상황과 연결지을 수 있다고 하는데, 배경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봐도 흥미진진하고 지금 내 주변 어딘가에서도 있을 법한 인물과 일이라서 소름끼쳤다. 작가가 인물과 사건을 탄탄하게 구성했기 때문이다. 점차 부패한 권력으로 변해가는 돼지 나폴레옹, 그의 충실한 부하 노릇을 하는 스퀼러, 권력 투쟁에서 밀려나 모함을 당하고 정적이 되어버린 돼지 스노볼, 농장을 위해 우직하게 일하는 복서와 같은 주요 캐릭터들은 물론, 주식은 아니지만 달콤한 설탕이나 생필품은 아니지만 애지중지하는 댕기가 있었으면 하는 말 몰리, 글을 잘 읽고 똑똑하지만 모든 일에 방관적인 태도를 취하는 당나귀 벤저민, 아무런 비판 없이 나폴레옹이 옳다고만 하는 양들 등 등장인물 또한 조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간 군상을 그리고 있다. 소설의 큼지막한 사건 또한 실제 역사와 많은 부분 대응된다고 하는데, 그 역사를 모르고 소설의 사건으로만 접해도 충분히 이야기로서의 개연성과 시사성을 확보하고 있어서 놀랍다.


놀랍게도 작가인 조지 오웰은 공산주의자였다고 한다. 언뜻 보면 공산주의를 비판하는 소설처럼 보여서 잠깐 의아하긴 했지만 이내 납득이 갔다. 자신이 추구하는 이념과 체제가 부패해 가는 것에 더 분노와 답답함을 느꼈던 것이 아닐까. 또한 이 이야기는 특정 체제에만 국한된 내용이 아니다. 어떤 체제든 간에 권력을 독점하려는 세력을 경계해야 한다는 메시지에 무게감이 실려있다. 당시를 살아가면서 이념 대립에 매몰되지 않고 비판적인 눈으로 경계하고 작품으로 표현하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조지 오웰이 사회를 바라보는 통찰력이 얼마나 날카로웠는지를 알 수 있다.


인상적인 메시지가 아주 많지만 몇 가지만 추려보자면 다음과 같다. 


첫번째, 누군가를 적으로 돌리는 권력 쟁탈에 집중하기보다는 추구하는 가치를 체제에 적절하게 적용하기 위한 노력에 더 힘을 쏟아야 한다는 것이다. 원래 주인이었던 존스를 밀어내고 농장을 쟁취하는 데 성공한 동물들은 평등이나 자유를 지닌 존엄한 삶이라는 가치보다는 존스를 적대시하는 데에 지나치게 많은 에너지를 소모했다. 결국 존스에 대한 적대감을 방패로 삼음으로써 또다른 부패 권력이 세력을 넓혀갈 수가 있었다. 애초에 그들이 추구했던 가치는 온데간데 없어지고 다른 조직(인간, 타 농장)과의 갈등이나 반대 세력 색출에 집중하는 모습은 지금의 정치에서도 흔하게 볼 수 있다.


두번째, 권력을 탐하는 세력을 끊임없이 경계할 수 있는 지성과 행동력을 갖춰야 한다는 것이다. 초반에 돼지들이 우유를 그들만의 몫으로 빼돌렸을 때 확실하게 공론화하고 막았어야 한다. 추구하는 바와 다르게 흘러갈 때, 이를 민감하게 감지할 수 있는 지성과 논쟁하여 바로잡을 수 있는 행동력을 많은 구성원들이 갖추지 않으면 어느 사회든 '메너 농장'이 되는 것은 순식간이다. 몇몇 젊은 돼지들과 당나귀 벤저민은 나폴레옹의 부패를 알아챘으나 준비 없이 나선 젊은 돼지들은 숙청되었으며 벤저민은 무력하게 방관했다. 그렇게 나폴레옹 세력은 더 썩어들어갔고 크기가 커졌다. 지성과 행동력을 갖춘 구성원들이 다수였다면 초반에 썩은 부분을 도려낼 수 있지 않았을까.


세번째, 중요한 것은 경제적 풍요 자체라기보다는 어떤 가치를 기반으로 풍요를 분배하고 누릴 것인지의 문제다. 동물의 노동력을 착취하던 존스를 물리치고 동물들이 그들의 존엄한 삶을 누리기 위해 '동물주의'를 내걸고 체제를 다져갔으나 권력을 독점하려는 돼지들로 인해 존스가 있던 시절보다 더 고달프게 노동하고 더 굶주린 삶을 살게 된 다른 동물들을 보고 많은 생각이 들었다. 지금 시대에도 경제적 성장을 이뤄야 구성원들이 모두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다는 사탕발림을 내세워 권력을 차지하는 세력들이 존재하는데, 결국 도덕적 가치 추구라는 기반을 잃는다면 그들의 주장은 허상에 불과하다. 핵심은 풍요로워지기가 아니라 어떻게 풍요로움을 분배할지에 있다.


조지 오웰의 소설은 《1984》와 《동물농장》 이렇게 두 작품밖에 읽어보지 않았지만, 그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그의 '예언가로서의 예술가'적 능력에 감탄한다. 권력의 태생적인 비도덕성이 어떤 과정을 통해 세상을 디스토피아로 변질시키는지를 이토록 현실적이고 날카롭게 그리다니. 작가가 타임머신을 타고 현재 시대를 보고 쓴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의 예언은 맞았고 진행형으로 맞아들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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