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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두초록 Apr 02. 2022

잠시 나를 알러 갑니다

《여행의 이유》 리뷰


여행의 이유

저자 김영하

출판사 문학동네

출간일 2019.04.17

페이지 216


2018년 '알쓸신잡'이라는 티비 프로그램에서 사람들이 호캉스를 떠나는 이유를 '호텔에는 일상의 근심이 없다'고 한 김영하의 말이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었다. 나 또한 그중 하나였다. 사람에 대한 통찰력과 그것을 언어로 전달하는 능력까지 역시나 작가는 다르구나, 하는 감탄이 절로 나왔다. 《여행의 이유》는 김영하 작가가 낸 여행에 대한 에세이였으므로 출간 때부터 점찍어 두고 이제서야 읽게 되었다.


출간이 2019년인데 2년도 더 넘은 지금에서야 이 책을 읽게 된 데는 코로나가 큰 영향을 미쳤다. 코로나로 인해 갑자기 삶에서 여행이 제거됐다. 그야말로 갑작스럽게. 이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한 나는 여행에 관한 책을 읽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전세계적으로 아직 코로나 상황이 나아지지 않은 지금 이 책을 손에 든 이유는 단순하다. 2년 넘게 코로나로 여행이 자유롭지 않은 시간을 보내면서 힘들어 하는 나를 보면서 왜 이토록 여행을 갈구하는가가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저자는 '추구의 플롯'을 제시하면서 여행의 이유를 풀어낸다. 추구의 플롯으로 만들어진 이야기들은 주인공이 대놓고 추구하는 외면적인 목표와 주인공 자신도 모르는 채 추구하는 내면적 목표가 있으며, 이를 여행과 연결시킨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우리는 모두 정해진 일정이 무사히 진행되기를 바라며, 안전하게 귀환하기를 원한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그렇다. 그러나 우리의 내면에는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강력한 바람이 있다. 여행을 통해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되고, 자신과 세계에 대한 놀라운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 그런 마법적 순간을 경험하는 것,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이런 바람은 그야말로 '뜻밖'이어야 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애초에 그걸 원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뒤통수를 얻어맞는 것 같은 각성은 대체로 예상치 못한 순간에 찾아온다.

우리가 여행을 갈구하는 이유는 자신과 세계에 대한 놀라운 깨달음을 얻는 마법적 순간을 기대하는 마음이 내면에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충분히 설득력 있었다. 다만 그 깨달음의 내용을 미리 알 수 없다는 점이 여행의 묘미다.


기대와는 다른 현실에 실망하고, 대신 생각지도 않던 어떤 것을 얻고, 그로 인해 인생의 행로가 미묘하게 달라지고, 한참의 세월이 지나 오래전에 겪은 멀미의 기억과 파장을 떠올리고, 그러다 문득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조금 더 알게 되는 것. 생각해보면 나에게 여행은 언제나 그런 것이었다.

여행의 영향은 꽤 오랜 기간 후유증처럼 작용한다. 영향을 미쳤는지조차도 모르는 새에 여행의 기억이 내 DNA 어딘가에 작게 새겨지는 감각이다. '그러다 문득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조금 더 알게' 된다는 저자의 경험담에 완전 공감했다.


코로나 시대가 되고 나서 통렬하게 깨달은 사실 중 하나가 내 삶에 있어서 여행이 차지하는 중요성과 비중이 생각보다 컸다는 점이다. 이 책에서는 '약발'이 떨어지기 전에 '복용'해야 하는 경험으로 빗대고 있다. 딱 들어맞는 비유라고 생각한다. 반복적인 일상을 괜찮은 컨디션으로 살아내기 위해서는 비일상이 필요하고, 나에겐 그게 여행이다. 일 년에 한 번 이상은 모국어가 잘 들려오지 않는 비일상에 나를 갖다두는 시간을 보냄으로써, 모국어로 가득 찬 번잡함을 버릴 수 있었다. 마치 컴퓨터의 성능 저하를 막기 위해 쌓인 캐시를 주기적으로 비워주는 것과 비슷하다.


여행에서는 과거와 미래에 대한 불안보다 오직 현재에 중점을 두게 된다는 것, 여행 속 환대와 신뢰의 경험을 통해 인류애를 느낄 수 있다는 것, 여행은 아무 것도 아닌 자 즉 노바디 중의 노바디가 되는 경험이라는 것도 공감가고 흥미로웠다.


코로나로 자유롭게 여행을 하지 못하게 된 요즘, 대화 주제가 여행을 가고 싶다는 쪽으로 귀결되는 일이 많다는 것을 문득 깨달았다. 마치 일상을 견디기 위해 여행을 하는 것이 아니라 여행을 하기 위해 일상을 견디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건 그야말로 본말전도의 상황 아닌가. 도대체 여행이 내게 어떤 의미이길래 그럴까 하는 의아함에 여행의 이유가 궁금했다. 《여행의 이유》는 그 답을 찾는 데에 충분한 힌트를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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