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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두초록 May 18. 2022

나는 내 장례식에 참석하고 싶다

내 장례식의 주인공은 나니까

신문 뉴스 관련 일을 하기 전까지는 한 번도 신문의 인사·부고란을 눈여겨본 적이 없었다. 신문에 실릴 법한 사회적 지위를 가진 인물들은 나와 무관했기 때문이다. 당연히도 인사에는 주요 국공립 기관이나 대기업의 승진이나 발탁 소식이 실리고, 부고에는 사망 알림이 실린다. 얼핏 비슷한 카테고리로 분류되는 이 두 꼭지는 자세히 들여다보면 큰 차이점이 있다. 인사에서의 중심인물은 승진하거나 발탁된 당사자이지만, 부고에서의 중심인물은 대부분 사망자가 아니라 그 가족이다. 모친상, 부친상, 장모상, 장인상, 시모상, 시부상 같은 단어들이나 가족들의 신분 표기에 할애하는 비중만 봐도 알 수 있다. 즉, 대부분의 장례식은 고인 위주의 의식이 아니다.


어쩌면 장례식은 애초부터 고인이 아닌 남겨진 사람들(일반적으로는 가족)을 위한 의식인지도 모른다. 가까운 이를 잃은 사람들을 위로하고 슬픔을 함께 나누고 애도하는 의미가 더 클 수도 있다. 그렇다면 비혼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시대에 장례식은 어떤 의미를 지니게 될까. 가족이나 가까운 친지가 모두 세상을 떠난 경우 장례식은 누구를 위한, 누구에 의한 의식이 되는 걸까.


문득 내 장례식에는 누가 올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나만 그런 게 아닌지 《내가 죽으면 장례식에 누가 와줄까》라는 책도 있다. 비혼주의자이고, 형제들과도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편이라 2촌 이내 가족 중에서는 내가 가장 마지막으로 죽음을 맞을 가능성이 크다. 가족의 지인들이 내 장례식에 올 가능성은 희박하다. 본의 아니게 내 장례식의 진정한 주인공(?)은 내가 될 것이다. 과연 내가 세상을 떠났음을 고하는 의식에 누가 올까. 누군가 온다 해도 나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데 무슨 의미가 있을까. 물론 나를 기억하는 누군가에게 애도의 자리 역할을 한다면 의식은 의미가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세상을 떠나는 당사자에게 이별 인사를 할 시간이 주어지는 것이 더 유의미하지 않을까.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 요즘 '생전 장례식' 문화가 생기고 있다고 한다. 가능하면 생의 마지막이 가까이 다가온 시기에 생전 장례식을 하고 싶다. 내가 참석하지 못하는 장례식 말고, 살아 있을 때 내 인연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는 이별 파티 콘셉트였으면 좋겠다.


물론 생전 장례식이 가능하려면 꽤 까다로운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우선 죽음을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져야 하고, 영원한 이별 인사를 할 만한 인연을 맺고 있어야 하고, 내가 죽음을 맞는 시기에 그들이 세상에 존재해야 한다. 이 조건만으로도 통과하기가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소망해 본다. 부디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생을 마감할 수 있는 행운이 주어지기를. 그 행운이 주어질 만한 삶을 살아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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