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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두초록 Nov 07. 2021

지금 여기 우리가 꼭 던져야 하는 질문

《공정하다는 착각》 리뷰


공정하다는 착각 

저자 마이클 샌델

역자 함규진

출판사 와이즈베리
출간일 2020.12.1

페이지 420


가끔 미국의 기부 입학 제도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토론 주제를 접한다. 기부 입학 몇 명을 받아서 형편이 녹록치 않은 다수의 학생들이나 대학의 인프라 향상에 도움이 된다면 공리주의적 관점에서 마냥 반대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물론 원칙적으로 기부 입학은 불공정하다는 찝찝함은 지우지 못한 채로. 이 책에서는 기부 입학의 찬반을 넘어, 그렇게까지 해서 명문대를 가야 하는 근본적인 이유까지를 추적했다. 명문대를 가면 더 높은 사회적 지위를 얻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이 명제의 당위성에 대해 비판적인 접근을 시도하지 않았다.
고백하자면 나 또한 그랬다. 학벌이 높은 사람이 더 높은 연봉이나 사회적 지위를 얻는 것에 대해 크게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대학 입시 제도의 부조리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은 있지만 그건 철저히 능력주의를 공정하게 구현하지 못하는 시스템에 대한 문제 제기였을 뿐이다. 

더 노력(공부)해서 더 결과를 낸(학벌, 자격증 등) 사람이 더 높은 사회적 지위를 얻는다는 능력주의의 기본적 개념에 반대하는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언뜻 보기에 공정하고 명료해 보이는 이 개념에는 사실 맹점이 있다. 결과를 내기 위해 노력하는 환경이 동등하지 않다는 점이다. 사교육은 꿈도 꿀 수 없는 경제 환경에서 자라 오히려 아르바이트를 해야 하는 학생과 온갖 사교육과 대학 진학에 관한 풍부한 정보를 보유한 환경에서 자란 학생의 조건은 결코 동등하다고 할 수 없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비판적으로 다뤄왔다. 마이클 샌델은 더 나아가, 환경뿐 아니라 애초에 능력의 가치를 평가한다는 틀 자체가 공정하다고 할 수 없다고 말한다. 
사회에서 요구하는 능력은 시대에 따라 바뀐다. 수요와 공급의 관계에서 희소성이 있으면서 수요가 많은 능력을 가진 사람이 유리하다. '문송합니다'라는 자조섞인 신조어가 만들어질 정도로 이공계열을 선호하는 한국의 취업 경향이 대표적인 예이다. 과연 문과 계열에서 열심히 공부한 학생과 이공계열에서 열심히 공부한 학생의 노력 총량이 그들의 구직난 정도나 연봉 차이만큼 다르다고 볼 수 있을까? 단연코 아니다. 현재 기업들이 이공계열 능력을 문과 계열보다 선호하는 것은 시장 논리이지, 그것이 사회적 지위를 결정짓는 기준으로서 공정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시대가 요구하는 적성을 가지고 태어난 것은 능력의 차이가 아닌 운이나 우연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능력주의가 그 랜덤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을 망각한 채 능력을 신봉하게 만드는 현상을 꼬집은 부분들이 새로운 충격이었다.

여기에 능력주의자는 이렇게 답할지 모른다. "우리의 자연적 재능이 행운의 산물이라 해도, 우리의 노력은 순전히 우리에게 달린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노력과 수고를 통해 얻은 것을 온전히 가질 자격이 있다." 그러면 롤스는 이렇게 반박할 것이다. "노력을 하려는 의지 자체도, 그러한 시도도, 그리고 흔히 말하는 자격이라는 것도 행복한 가정과 사회적 환경에 근거한 것이다." 노력조차도 '시장의 보상이 도덕적 자격을 반영한다'는 생각의 근거가 되지 못한다는 이야기다.

신분제일 때에는 사회적 지위가 낮은 것은 개인의 탓이 아닌 사회 구조의 탓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능력주의는 사회적 지위의 책임을 개인에게 오롯히 떠넘긴다. 성공한 이들은 성공을 이루지 못한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데 더욱 거리낌이 없어진다. 성별이나 인종에 의한 차별은 (표면적일지언정) 대놓고 하지 못하는 분위기지만 계층을 바라보는 시선은 사뭇 다르다. 능력을 키우지 못한 것은 개인의 잘못이라고 여겨지기 쉽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사회의 상층부에 속하지 못한 사람들조차 그 실패를 자기 잘못이라고 생각하며 자괴감을 갖게 된다. 이게 같은 사회를 살아가는 이들 사이에서 도덕을 바탕으로 한 공동선 추구를 저해한다.


우리가 겪고 있는 '기술관료 버전'의 능력주의는 능력과 도덕 판단의 사이의 끈을 끊어버렸다. 이는 경제 영역에서 '공동선이란 GDP로 환산할 수 있는 것'이라고 간단히 정해 버렸으며, 어떤 사람의 가치는 그가 제공할 수 있는 상품이나 서비스의 경제적 가치에 달려 있다고 못박아버렸다. (중략)
대통령 정책고문으로서 경제학자들의 역할이 점점 커지고 있다. 공동선이 무엇인지 정의하고 그것을 달성하는 일에 시장 메커니즘이 점점 더 많이 적용되고 있다. 정치 논쟁에서 중요한 도덕적, 시민적 문제들 즉 '불평등 증가를 해결하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국경 문제에서 살펴야 할 도덕적 부분은 무엇인가?', '일의 존엄은 무엇으로 결정되는가?', '우리는 시민으로서 서로에게 무엇을 해 주어야 하나?' 등이 소외되고 있다.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지만 정확하게 논리적으로 설명하지 못했던 부당함을 전문가가 정리한 글로 보니 매우 개운했다. 두껍다면 두꺼운 책을 읽으며 저자가 제시할 이상적인 방향성이 궁금했다. 저자는 계층 이동성도 보장되어야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사회적 상승에 집중하지 않아도 되는 공동체를 만들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굳이 대단하게 성공하지 않아도 구성원들이 집다운 집에 살면서 식비를 걱정하지 않고 적당히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사회가 된다면 상승의 실패가 뼈저린 좌절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사회적 상승에만 집중하는 것은 민주주의가 요구하는 사회적 연대와 시민의식 강화에 거의 기여하지 못한다. 심지어 우리보다 사회적 상승에 보다 성공적인 나라라도 상승에 실패한 사람들이 자신의 자리에서 만족할 수 있도록, 그리고 스스로를 공동체 구성원으로 여길 수 있도록 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중략)
종종 기회의 평등의 유일 대안은 냉혹하고 억압적인 결과의 평등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나 또 다른 대안이 있다. 막대한 부를 쌓거나 빛나는 자리에 앉지 못한 사람들도 고상하고 존엄한 삶을 살도록 할 수 있는, '조건의 평등'이다. 그것은 사회적 존경을 받는 일에서 역량을 계발하고 발휘하며, 널리 보급된 학습 문화를 공유하고, 동료 시민들과 공적 문제에 대해 숙의하는 것 등으로 이루어진다.

항상 의문이었다. 평범한 집에서 자라 평범하게 자랐고 평범하게 교육받고 평균적이거나 그 이상의 노력을 해 왔다고 생각하는데, 왜 나의 삶은 아직도 이리도 빡빡하고 앞이 캄캄한지가. 5평 남짓한 원룸을 전전하면서 고용안정성이 없어 불안해하고 직업을 구하지 못해서 월세나 식비를 내지 못할까봐 걱정해야 하는지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그 모든 결과의 원인이 나의 노력이 부족해서일 것이라는 자기 인식이 더욱 괴로웠다. 그래서 끊임없이 자기개발을 하고, 나다운 것을 행하는 시간보다 시장 논리에 맞는 사람이 되기 위해 소비하는 시간이 월등하게 많은 삶을 살고 있다. 딱히 대단한 부나 사회적 성공을 바라는 것도 아니고, 단지 평범하게 인간다운 삶을 살고 싶은 소시민일 뿐인데 말이다. 무난하게 평범한 삶을 유지하기 위해 이토록 치열하고 버거운 노력을 지불해야 하는 사회 구조가 과연 정당한가? 더 성숙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지금 우리가 꼭 던져야 하는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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