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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두초록 Nov 01. 2021

'젊은 작가'에 반대한다

《2020 제11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리뷰


저자 강화길, 최은영, 이현석, 김초엽, 장류진, 장희원

출판사 문학동네

출간일 2020.04.08

페이지 312


젊은작가상에서 말하는 '젊은 작가'의 기준은 뭘까? 젊다고 말하기 어려운 나이가 되었을 무렵부터 드는 의문이었다. 작가의 나이? 소설에서 우러나는 정신의 나이? 전자라면 만약 박완서 소설가처럼 마흔 살에 등단한 작가는 젊은작가상의 후보조차 될 수가 없는 걸까? 별별 생각을 했는데 생각보다 쉽게 그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온라인 서점 책 소개 부분에 명시하고 있다. '등단 10년 이하의 젊은 작가들이 한 해 동안 발표한 중단편소설 중 가장 눈부신 성취를 보여준 일곱 편의 작품에 수여하는 젊은작가상'이라고. 그럼 마흔 살에 등단을 하면 쉰 살까지는 후보에 오를 수 있는 걸까(일단 등단을 하고 '젊은 작가'라는 말에 걸맞는 작품 완성도를 갖춰야겠지만).

이런 시답잖은 소리를 하는 이유는 젊은작가상 수상작들이 정말 젊게 느껴져서다. 작가의 나이가 아니라 수록 소설 자체가 담고 있는 정신에서 젊음이 느껴졌다.


오랜만에 접한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이었기 때문에 이전 년도의 흐름을 알 수가 없지만 많은 작품이 젠더 관련 주제를 다뤘다는 점이 인상에 남는다. 대상작인 강화길의 <음복>부터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나 이현석의 <다른 세계에서도>도 그렇다. 사적 대화 인용 문제로 제외된 <그런 생활>도 퀴어 코드이고, <우리畜舍의 환대>에서도 퀴어 관련 화두가 이야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연수> 또한 대놓고는 아니지만 '여성'의 삶을 그렸다. 김초엽의 <인지 공간>을 제외하고는 마치 '이 시대의 젠더'를 화두로 낸 앤솔로지 같았다.


<음복>은 제사가 1년에 13번이 넘게 있는 집에서 태어난 나에게 진저리 처질만한 리얼리즘 스릴러였다.  무지할 수 있는 권력에 대해서 소름끼치도록 리얼하게 표현했다.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는 《출근길의 주문》의 '누구 한 사람만 있어도, 한 명만 눈에 보여도, 그 길을 선택하는 일에 도움이 된다.'라는 문장과 이어지는 소설 같았다. 특히 후반부가 그랬다.

어쩌면 그때의 나는 막연하게나마 그녀를 따라가고 싶었던 것 같다. 나와 닮은 누군가가 등불을 들고 내 앞에서 걸어주고, 내가 발을 디딜 곳이 허공이 아니라는 사실만이라도 알려주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사라지지 않고 계속 나아갈 수 있다는 걸 알려주는 빛, 그런 빛을 좇고 싶었는지 모른다.

내가 발을 디딜 곳이 허공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안고 살아가고 있는 나에게 희미한 빛을 주는 부분이다.


<다른 세계에서도>는 사회적 모순에 대한 결과론적 입장은 같아도 뜯어보면 각양각색의 시선을 가지고 있었던 기억을 상기시켰다. '동지'라 생각했던 이들인만큼 그 다름이 더욱 서글펐다. 마지막 부분에서 화자가 말하는 '당신'이 조카임을 알게 되었을 때 격하게 눈물이 났다. 임신과 관련한 신체 자기 결정권을 지지하는 사람이 새 생명에게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SF물을 읽지 않는 나에게 머나먼 존재였던 김초엽의 <인지 공간>은 매우 신선했다. '인지 공간'이라는 격자 구조물이 추상적이라는 말이 심사 과정에서도 나왔던 모양인데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다만 '만만찮은 주제를 이만큼 설계해내기도 쉽지 않아 보였다'는 심사평에도 격하게 동의한다. 애초부터 표현하기 어려운 세계를 이만큼이나 구색을 맞춰서 구현하려 시도했다는 것 자체가 용감하다는 걸 창작을 해 본 사람이라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연수>는 장류진에 대한 믿음을 견고하게 한 작품이다. 장류진 작품 특유의 현실적인 인물들과 상황 디테일이 만드는 탄탄한 작품 세계가 앞으로의 작품도 기대하게 만들었다. <연수>를 읽으면서 《일의 기쁨과 슬픔》의 <도움의 손길>이 떠올랐는데, 아니나다를까 작가노트에서 '어쩐지 한 쌍처럼 여겨진다'고 작가 자신이 밝혔다. <도움의 손길>이 결과적으로 '파국'이었다면, <연수>는 '느슨한 연대'를 시사하면서 마무리되었다는 점에서 좋았다. <도움의 손길>의 결말이 안 좋았다는 말이 아니라, 각각의 결말이 좋았다는 뜻이다.


<우리畜舍의 환대>는 제목의 중의성이 흥미로웠다. 'we'를 의미하는 '우리'와 동물을 기르는 곳인 '우리畜舍'가 교차되는 소설적 장치가 눈에 띄었다. 소수자, 약자, 타자로 칭해지는 사회 비주류는 우리(we)라는 말로 선긋기를 당하거나 우리畜舍 속 존재 취급을 당하기도 한다. 중의성을 활용한 언어 유희를 좋아해서 더 재미있게 읽었다. 화자의 '추적하는 시선'을 통해서 서사적 긴장감을 끝까지 가져간 것도 인상적이었다.


완독 후 '젊은 작가'라는 말이 없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 읽었다고 해놓고 이제와서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를 하느냐고? 주류가 만들어 놓은 사회 제도에 익숙해진 '왕년에 젊었던' 사람들이 계속 사회와 자신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반성할 수는 없을까? '젊은 소설'이니 '젊은 작가'라는 말에는 부조리에 대한 날카로운 시선과 치열한 고민의 의무를 젊은 작가에게 은근슬쩍 떠넘기는 프레임이 보인다. 중견이나 베테랑이 그릴 수 있는 작품 세계가 있다는 것을 부정하진 않는다. 원로든 신인이든 상관 없이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이 '날 선'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 거기에는 '젊은 소설'이나 '젊은 작가'라는 표현이 없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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