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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두초록 Jul 10. 2022

법이 왜 이 모양인가를 전직 판사가 답하다

《최소한의 선의》 리뷰


최소한의 선의

저자 문유석

출판사 문학동네

출간일 2021.12.13

페이지 256


책 읽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다보니 종종 책을 추천해 달라는 말을 듣곤 한다. 사실 애독가라 해도 취향이 천차만별이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데다가 좋은 책을 만났을 때의 기쁨을 잘 알기 때문에 오히려 더욱 신중해진다. 만약 나와 코드가 어느 정도 비슷하고 책 읽기를 어려워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개인주의자 선언》을 추천한다. 다루는 주제가 보편적이면서도 전반적인 메시지나 코드가 맞아서 아끼는 책이기 때문이다. 《개인주의자 선언》 이후 문유석 작가는 내가 온라인 서점 사이트에서 신작이 나왔는지를 체크하는 작가 중 하나가 되었다. 신작 《최소한의 선의》가 법 이야기라는 것을 알고 선뜻 손을 뻗기가 쉽지는 않았지만 작가에 대한 믿음으로 읽기 시작했다.


프롤로그에서 저자는 이 책에서 무려 '헌법의 근본 가치들'에 대한 생각을 적었다고 밝혔다. '헌법의 근본 가치들'이라니, 그다지 흥미가 안 생기지만 약간 궁금한 것 같기도 한 알쏭달쏭한 마음으로 책장을 넘겼다. 우선 헌법의 근본 가치인 인간의 존엄성, 자유, 평등을 언급하면서, 인간이 존엄하긴 한지를 묻는다. 그런데 진짜 인간이 존엄하긴 한가? 인간이 아닌 동물은 어떤가. 생각하면 할수록 무엇을 근거로 인간이 존엄한지에 대한 의문이 들 뿐이다. 그냥 인간이 존엄하다는 사회적 약속일 뿐이라는 유발 하라리의 의견에 동의한다. 저자는 한 발 더 나아가 인간들끼리 서로를 존엄하게 취급하기로 약속한 감수성 자체가 인간 존엄성의 시작이라고 말한다. 나는 '인간의 존엄성은 감수성'이라고 말하는 저자의 지적인 감수성이 마음에 든다.


법의 체계가 어떻게 형성되는지에 대해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어서 법에 대해 몰랐던 많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처럼 법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는 일반인이 법에 대해 갖는 의문이나 분노하는 포인트에 대해서도 잘 이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인륜적 악질 범죄자나 '촉법소년'을 악용한 범죄의 형량에 대한 법과 시민의 관점 차이를 풀어내기도 한다. 저자는 '법을 공부한 사람으로서 납득하는 부분과 한 시민으로서 느끼는 감정 사이에서 혼란을 느낄 때'가 있다고 말하면서 왜 법이 범죄자에게 관대하게 돌아가는지를 설명한다.

공리주의 관점에서 보면 형벌은 사회의 안전과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적정 수준이면 족하다. 그 수준을 넘는 엄벌은 사회적 비용을 낳는다. 정의는 공짜가 아니다. (후략)
요약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헌법질서에 내재한 '인본주의'와 '공리주의'는 형벌에 대해 '필요 최소한'의 관점으로 접근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법이 인간 사이에 필요한 '최소한의 선의'라면 형벌은 사회 운영에 필요한 '최소한의 악의'인 것이다.

헌법 관점에서 보면 형벌이란 결국 시민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기 때문에 필요 최소한일 것을 원칙으로 한다는 것이다. 충격적이었다. 여전히 감정적으로는 수긍할 수 없지만 머리로는 법을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되었다.

 

마지막 장에서는 공정성에 대한 화두를 던진다. 지금과 같이 공정성에 대한 과열된 요구가 경쟁적 사회를 부추겨 '공정한 지옥'이 되어간다는 견해가 인상적이었다. 조별과제의 무임승차자나 월급 루팡을 일삼는 같은 팀원을 '극혐'하는 나로서는 생각이 많아지는 부분이었다.


저성장 사회로 접어들면서 기회의 문이 좁아지고 경쟁은 가혹해진다. 그러다 보면 그 어떤 작은 기득권조차 용납할 수 없다는 강퍅한 주장이 득세하게 된다. 하지만 더 멀리 보면 인공지능의 발전으로 인류 대부분이 잉여 인력으로 전락할지도 모르는 시대가 닥쳐오고 있다. 무한경쟁을 통한 공정한 지옥이 우리가 지향할 방향일까. 지금 당장의 불공정을 시정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자칫 무한경쟁만이 정의라고 착각하는 것은 곤란하다. 누구 좋으라고. 노력, 능력, 경쟁, 공정, 모두 중요한 가치다. 하지만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느 한 가지 가치만 추구할 수 없다. 공정 역시 결국에는 공존을 위한 수단 중 하나인 것이다.


일리 있는 통찰이다. 다만 각자도생해야 하는 입장에서는 도덕 교과서를 내미는 이상주의자의 말처럼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나 하나가 이 세상에 잘 존재하기도 벅찬데 공존의 가치를 생각할 여유가 있을까. 결국 이런 식으로 서로가 서로를 공정한 지옥으로 끌고 들어가는 현실이 지금 우리의 사회의 모습 같아 씁쓸했다. 공허한 외침이 될지언정 이렇게 도덕 교과서 같은 이상적인 말을 하는 사람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어떻게 살기를 추구해야 하는지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생각해 보는 사람이고자 하는 일말의 감수성을 잃어가는 건 너무 슬픈 일이니까.


법의 근본 가치에 대한 인문학적 사유를 이토록 독자친화적으로 풀어낼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전직) 판사이자 드라마 작가라는 특이한 이력이 납득 가는 지점이다. 법조인으로서의 생각과 시민으로서 느끼는 감정 사이의 혼란이 있었다는 저자의 딜레마가 오히려 이 책을 쓸 수 있었던 원동력이 아닐까 싶다. 딜레마는 진지하고 치열한 고민의 흔적이다. 견해에 동의하는지와는 별개로 사회와 나와 우리에 대한 진지한 사유를 접할 수 있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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