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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두초록 Jul 30. 2022

아픔의 파편 주워 모으기

《애쓰지 않아도》 리뷰



애쓰지 않아도

저자 최은영

출판사 마음산책

출간일 2022.04.30

페이지 232


책을 좋아한다고 하면 최애 작가가 누구냐는 질문을 자주 듣는다. 사실 내 경우 최애 작가가 매번 바뀐다. 어쩌면 최애 작가가 늘어난다고 표현하는 게 더 정확할 수도 있다. 그때그때 빠져 있는 최애 작가가 여러 명 있다. 최은영 소설가는 현 최애 작가 중 하나다. 신작이 나왔다고 해서 살펴보니 무려 '짧은 소설'을 묶은 책이라고 해서, 기대감 반, 불안감 반의 심정으로 《애쓰지 않아도》를 주문했다. 최애 작가가 쓴 새로운 호흡의 글을 접할 수 있어서 즐거웠다.


전반적인 주제의식은 전작들과 결을 함께 한다. 책에는 여러 아픔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우리가 너무나도 쉽게 지나치곤 하는 다른 사람의 아픔에 대해서. 아버지의 장례에 참석하러 가지 않는 송문과 그런 송문을 이해하지 못했던 유리의 이야기를 그린 <우리가 배울 수 없는 것들>에서, 유리가 '우리가 배울 수 없는 것들'의 목록에 '-송문으로 살아온 송문의 마음'을 적는 부분이 이 소설집을 관통하는 핵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모두 다른 어떤 사람으로 살아온 그들의 마음을 모른다. 하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다. 사실 비극의 본질은 우리가 다른 이의 아픔을 모른다는 것 자체를 모른다는 데에 있다. 가령 <손 편지>에 나오는 '지금 맞는 아이가 자라서 폭력 어른이 됩니다'라는 아동학대 방지 공익광고 문구처럼 말이다. 학대를 당하는 아동이 저 문구를 본다면 어떤 마음일까를 생각해 보면 사이코패스급 저주나 다름없다.


읽으면서 《선량한 차별주의자》라는 책이 자꾸 생각났다. 장르는 전혀 다른 책이지만 던지는 화두가 닮았다. 대체적으로 선량하지만 남의 아픔을 알지 못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세상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는다는 점이 비슷하다. 《선량한 차별주의자》의 앞부분에서 '결정장애'라는 말을 아무런 고민 없이 사용했던 저자의 과거에 대한 일화가 나오는데, 그때 받았던 것과 비슷한 충격을 《애쓰지 않아도》의 <손 편지>에서 받았다. 무례한 손님을 만나 당황한 아르바이트생 미나에게 '다 남의 집 귀한 자식'이라며 위로하던 점장에게 "저 귀한 자식 아닌데요."라고 대꾸하는 부분이 그랬다.

사람을 함부로 대하지 말아야 할 근거가 가정에서 받는 대우에 있다면, 그럼 저는 누구보다도 함부로 대해져도 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점장님, 저는 그 말이 싫었어요. 귀한 딸, 귀한 아들.

'지금 마주하는 직원도 누군가의 소중한 가족입니다.' 요즘 들어 사람을 대하는 창구에서 흔히 접하는 문구다. <손 편지>를 읽기 전에는 이 문구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지 않았다. 실제로 이 멘트를 상담 전화 연결음에 넣고 나서 폭언 사례가 줄었다고 하니 '그럼 됐지'하는 안도감까지 있었다. 곰곰이 생각하면 진짜 이상한 말이다. 가족이 없거나 가족과의 유대감이 거의 없다시피 한 사람을 고독하게 만드는 말이다. 사람은 누구나 존엄하다(고 배웠다). 굳이 누군가의 소중한 가족, 귀한 자식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가족을 들먹이면서 공감 요소를 던져주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타인을 함부로 대하고 남의 아픔에 무감각한 사람이 많은 세태 자체가 슬퍼졌다.


때로는 가족이 나의 가장 큰 아픔의 원인일 수도 있다. 아니, 오히려 그럴 가능성이 매우 높다. '가족이니까'라는 무적의 논리로 정서적 학대가 빈번하게 일어나는 관계임에도 인연을 끊는 게 쉽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다른 이들에게 말하기도 쉽지 않고, 이해를 받기도 어렵다. <무급휴가>의 현주가 미리에게 그랬듯이. 미리는 자신에게 애착이 없는 걸 넘어서 적의를 가진 어머니에게서 자랐다. '어떤 엄마가 자기 자식을 싫어하겠니'라는 세상 사람들의 반응은 미리에겐 또 다른 정서적 폭력이다. 나는 이게 드라마틱한 에피소드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가 인식하지 못할 뿐이지 가족 안에서 정서적 학대를 받는 경우는 생각보다 매우 흔하다. 이걸 알아챈 이들을 더 괴롭게 만드는 건 '가족'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무적의 힘이다. '가족이 그럴 리 없어. 너 잘 되라고 그런 걸 거야.' 같은 주변의 말을 들으면 마치 내가 예민한 것이며 가족들을 곡해하고 있는 거라는 죄책감, 더 나아가서는 아무에게도 이해받지 못한다는 절망감까지 든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아픔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면 알아가려는 시도조차도 할 수 없다.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 자체를 인식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 인식이 없으면 선량하지만 남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이 되기 십상이다. 고기를 못 먹는데도 사이 좋은 이웃의 딸에게 편식하면 안 된다며 기어코 강제로 족발을 먹이는 행위가 폭력이라는 인식조차 없는 <호시절>의 서경 언니네 아버지처럼 말이다. 그건 너무나도 서글픈 세상 아닐까.


이 책을 읽고 최은영 소설가는 아픔 수집러 같았다. 너무 아파서 오히려 앓는 소리조차 내지 못하는 아픔의 파편들을 찾아내어 이야기로 만들어 내는 데에 탁월한 작가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 섬세하고 민감한 감각으로 모아진 아픔의 서사들이 이 세상에, 내 책장에 존재해 줘서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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