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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셋 버튼] 나란 존재는 쓸모가 있어야만 가치가 있다

마흔 더 늦기 전에 생각의 틀을 리셋하라

by 박근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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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는 열매를 맺지 않아도 나무입니다.”

― 강연가 김창옥 ―


사회는 끊임없이 ‘유용성’을 요구합니다. 얼마나 생산적인지, 어떤 성과를 냈는지, 얼마나 영향력을 발휘하는지를 기준으로 사람의 가치를 판단하죠. 과연 그게 전부일까요? 만약 어떤 일이든 잘 해내야만 가치가 있는 것이라면 실패한 순간, 아프거나 쉬는 순간, 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순간 우리의 가치는 사라지는 걸까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가치가 있으니까요.


“나무는 열매를 맺지 않아도 나무입니다.”

강연가 김창옥이 한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나무는 그 자체로 존재의 의미를 지닙니다. 반드시 꽃을 피우거나 열매를 맺어야만 존재감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인간도 업적이나 성과가 있어야만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존재하는 것 자체로 이미 충분한 의미가 있습니다.


문제는 사회가 이 당연한 사실을 망각하도록 만든다는 점이에요.

심리학자 칼 로저스(Carl Rogers)는 인간 중심 치료에서 ‘조건 없는 긍정적 존중(unconditional positive regard)’ 개념을 제시했습니다. 부모나 사회로부터 “넌 이런 걸 잘해야 사랑받아.”, “이런 걸 해내야 인정받아.”라는 메시지를 반복적으로 들으면, 우리는 자신의 존재 가치를 외부 기준에 의해 결정하게 됩니다. 하지만 로저스는 이러한 조건부 사랑이 아니라, 그냥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존중받아야 한다고 말했어요.


하지만 현실은 다릅니다. 우리는 무언가를 증명해야만 가치가 있다고 느껴요. 좋은 성적을 받아야 인정받고, 높은 연봉을 받아야 존경받으며, 성공적인 결과를 만들어야 대우받는다고 생각하죠. 그래서 ‘내가 잘하고 있나?’, ‘나는 쓸모 있나?’를 끊임없이 자문합니다. 이런 사고방식에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외부 평가에 따라 나의 가치가 결정된다는 거죠.


심리학자 에드워드 데시(Edward L. Deci)와 리처드 라이언(Richard M. Ryan)은 ‘자기 결정 이론(Self-Determination Theory)’에서 인간이 진정으로 행복하려면 자율성, 유능감, 관계성이 충족되어야 한다고 말했어요. 이 중에서도 핵심은 자율성입니다. 외부 평가에 의존하는 삶은 자율성을 빼앗긴 삶이에요. 자율성을 잃으면, 결국 ‘나는 남들에게 유용할 때만 의미 있는 존재야’라는 왜곡된 신념을 품게 됩니다.


이러한 신념은 결국 인정 중독을 낳습니다. 사람은 인정과 칭찬을 받고자 하는 본능적인 욕구가 있어요. 미국 기업가 메리 케이 애시(Mary Kay Ash)는 “사람들이 사랑과 돈보다 더 원하는 건 인정과 칭찬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문제는 이것이 과도해질 때입니다. 남에게 인정받아야만 가치 있다고 느끼는 순간, 삶은 피곤해져요. 칭찬받지 못하면 불안하고, 인정받지 못하면 무기력해지죠. 하지만 외부의 평가에 따라 내 가치가 달라지는 게 아닙니다. 칭찬이 많다고 가치가 올라가는 것도 아니고, 비난받았다고 가치가 내려가는 것도 아니에요.


그렇다면, 존재만으로 가치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는 자존감을 다음과 같은 공식으로 설명했어요.


자존감(Self-esteem)

= 성취 수준(Performance) / 기대(Ambition)

= 성공(Success) / 포부(Pretensions)


이 관점에 따르면 자존감을 높이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성취도를 높이는 거고, 다른 하나는 기대치를 낮추는 거죠. 여기서 중요한 건 성취를 늘리는 것보다, 나의 기대치가 과도하게 외부에 맞춰져 있는지를 점검하는 거예요.


자존감은 자기효능감(나는 실력 있는 사람이야), 자기가치감(나는 괜찮은 사람이야), 자기조절감(나는 내 삶을 스스로 조절할 수 있어)으로 이루어집니다. 여기서 자기효능감은 노력을 통해 쌓을 수 있지만, 자기가치감은 내가 어떤 성취를 이루든 변하지 않는 것이죠.


자존감 = 자기효능감 + 자기가치감 + 자기조절감


물론,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기에 외부 평가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누군가에게 인정받을 때 더 큰 보람을 느끼고, 내가 타인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할 때 존재감을 느끼죠. 중요한 건 이것이 전부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내 가치를 외부에만 두면, 결국 인정받지 못할 때마다 스스로를 쓸모없는 존재로 여기게 됩니다.


남들이 섣불리 우리의 가치를 판단할 수 없어요. “관 뚜껑을 닫기 전에는 모른다(蓋棺事定, 개관사정.)”는 고사성어가 있듯이, 한 사람의 삶과 가치는 긴 시간을 두고 보아야 알 수 있습니다. 지금 당장 남이 내 가치를 평가하는 것에 큰 의미를 두지 마세요. 내 삶은 아직 진행 중이며, 어디로 흘러갈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구겨지고 찢겨도 가치는 변하지 않는다


나는 어떤 일에 실패할 수도 있고, 직장을 잃을 수도 있으며, 내가 원하지 않는 결과를 얻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가치 없는 존재가 되는 건 아니에요. 성공한 순간에도 나는 가치가 있고, 실패한 순간에도 나는 가치가 있습니다. 만 원짜리 지폐가 구겨진다고 해서 오천 원짜리 지폐가 되나요? 땅에 떨어진다고 천 원짜리 지폐가 되나요? 아니에요. 구겨져도, 찢어질 뻔해도 여전히 만 원은 만 원입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예요. 나는 어떤 일을 잘 하든 못 하든, 어떤 성과를 내든 내지 않든 여전히 나로서 가치가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는 내 존재 자체로 가치가 있다.”

“나는 나의 성과와 동일하지 않다.”

“나는 지금 이 순간, 그 자체로 충분하다.”


사회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증명하라.”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 요구에 휘둘릴 필요는 없어요. 나는 이미 존재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으니까요. 외부의 기준이 아닌 내 안의 기준으로 나를 평가하고, 스스로를 존중하세요.


나의 존재 가치가 가장 빛날 때는 언제일까요? 나다움으로 나답게 살 때입니다. ‘실존세’라는 말, 들어보았나요? 내가 나로서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치르는 세금입니다. 나로서 살아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치러야 하는 불편함과 고통을 의미해요. 마치 세금을 납부하는 것처럼 피할 수 없죠. 우리가 세금을 납부함으로써 사회적 혜택을 받는 것처럼, 실존세를 치름으로써 진정한 자아를 찾고 나로서 살아갈 기회를 얻게 됩니다. 내가 나로서 살아가려면, 나답게 살아가려면 큰 용기도 필요하고 때론 희생과 불편함도 따릅니다. 실존세가 비싼 거죠. 그럼에도 그것을 감수해야 해요. 나답게 살아야 내 존재 가치가 가장 빛나니까요. 기꺼이 실존세를 치르고 나답게 사세요.


- <마흔 더 늦기 전에 생각의 틀을 리셋하라>, 박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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