똥멍청이 디자이너 신입이 보았더라면 좋았을 글
지난주에는 이틀 정도 야근을 했다. 하루는 업무량이 많아 야근을 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었다. 또 하루는 다음날 정시퇴근을 하기 위하여 야근하였다. 다음날 제출해도 될 일을 미리 정리해두면 당일 급하게 일이 들어오게 되어도 정시퇴근을 계획할 수 있으니, 약속이 있는 전날에는 일을 미리미리 끝내 두면 좋다. 결과적으로 야근을 피하는 디자이너의 자세=미리미리 야근하기라고 말할 수 있겠다. (당일 급한 일이 들어오지 않으면 그날은 노는 날이 되어 전날 야근을 한 것이 어제의 나는 억울할 수도 있지만, 오늘의 나는 야근을 하지 않아도 되니 마냥 좋다. 야근이 기본값이 되어버린 디자이너의 초긍정마인드 랄까)
일반적으로 디자이너는 야근이 많다고 생각한다. 뭐, 세상은 넓고 회사는 많기 때문에 모든 것은 케바케, 사바사, 컴바컴(회사 바이 회사) 등등. 나는 대한민국의 직장인들이, 직종을 떠나 대부분 야근을 많이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업무 때문이 아니라 그런 시스템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그게 '갑의 횡포'라면 여기서 갑은 클라이언트 일수도 있지만, 회사의 대표 혹은 상사일 수도 있다. 그게 아니면 '업무량의 과부하' 등 다양한 이유들 속에서 사람들은 이미 야근을 하는 것에 적응해버렸다.
대부분의 회사는 일을 시작하기 앞서 인력이 충분한지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일을 시작한다. 일이 잘 진행되면 다행이지만, 사람은 늘지 않고 일만 계속해서 늘어나게 되면 그것이 바로 야근의 길인 것이다. 그리고 실무자가 참다 참다못하여 인원 충원을 호소하면 그제야 그 문제를 고려해보기 시작한다. 이 시스템은 학생 때 아르바이트를 할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사회 분위기도 야근을 하기에 좋은 환경으로 최적화되어 있다. 대한민국의 직장 문화는 아직까지도 야근을 하는 것이 미덕이고 열정이라는 인식의 뿌리가 깊다. 일을 빠르게 하지 못해서 라거나 능력이 부족해서 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사실, 야근을 하게 되는 환경 중 가장 큰 것은 야근에 대한 디자이너의 태도이다. 일이 많아지면 자연스럽게 ‘야근해서 끝내면 되지..’하고 생각하게 된다. 야근을 하자고 생각하는 순간 스스로에게 주어지는 시간이 꽤나 많이 늘어난다. 그러면 스스로 마음의 여유를 갖게 된다. 잠시나마 업무의 스트레스에서 벗어날 수는 있겠지만 이런 상황이 반복되면서 야근은 습관이 된다. 업무로 인한 스트레스를 덜어 야근 스트레스가 배가 되는 것.
위의 세 가지 이유들과는 다르게, 나는 요즘 일을 빠르게 하지 못하고 능력이 부족해 야근을 하고 있다.(핫!)
업무량의 과부하보다는 디자인을 시작하기에 앞서 고민이 많고 시작하게 되면 손이 느리다. 야근이 미덕인 시선들에서는 벗어난 지 오래되었다. 야근을 해서 잘 보이기보다 실력으로 인정받는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다. 야근이 진정 의미 있으려면 일을 더 잘하고 싶을 때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디자인을 더 잘하고 싶을 때에 야근을 한다. 요즘 하는 야근들의 대부분이 만족스러운 결과물이 제시간에 나오지 못해서 하는 의미 있는 야근들이다.
최근 이직을 했다. 작업하게 되는 대부분의 디자인 업무들이 나의 주전공 디자인이 아니고 처음 접하는 디자인 종류이기에 숙련되기 까지는 속도를 내기가 어려울 듯하다. 그러나 업무량은 내가 있기 전, 나보다 연차가 높고(3년 이상) 지금의 업무를 전공으로 하던 직원의 업무량보다 많이 들어오고 있다. 변명같이 들릴까 부끄럽지만 사실이다.
변명 아닌 정확한 사실이라며 말해도 스스로 능력의 한계를 부정할 수가 없다. 자신감이 상실되는 와중에 평소보다 더 빠른 적응력을 발휘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또한 내적으로 스스로에게 실망하고 있는 내가 외적으로 비칠까 두려워 (어깨, 혀 그리고 손이) 움츠러들고 있다. 이러한 상태의 시너지를 받아 업무 속도와 질이 낮아지는 것도 감출 수 없는 사실이다. 딜레마에 빠져버렸다.
이런 와중에 직책은 대리이지만, 디자인팀에 대리 이상 급 상사가 없어서 내가 디자인팀 팀장 격이 되어 버렸다. 자연스럽게 디자인팀의 업무 관련 모든 책임들이 내 어깨와 가슴에 올라앉았다.
상황이 나아지지 않는다면, 나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회사의 문제가 있다고 결론지을 것이다. (이와 같은 디자인을 주전공으로 하는 대리급 이상의 디자이너 경력자를 뽑아야 할 것이라고 보고하겠다.) 모든 문제들은 한 가지의 원인 만으로 생기지는 않는다. 사회나 회사에서 부적응자가 생기는 것은 개인의 문제만은 아니다.
그러나 다양한 환경에서도 적응하는 나는 대한민국의 디자이너이다. 우선은 이 글의 주제로 야근에 대처하는 디자이너의 자세에 대하여 시작하고 싶다.(드디어)
1. 집중력은 필수적인 업무 스킬 중 하나
업무 시간에는 최대한 집중하여 업무를 끝내자고 생각하는 기본적인 업무 태도가 필요하다. 야근의 뫼비우스 띠를 끊는 해결책 중 가장 기본적이고 가장 우선적으로 시작해야 할 대처이다. 집중력에 따라서 모든 업무의 속도는 배의 배가 되기도 한다.
2. 익숙해지지 않기, 야근하는 이미지 절대 피하기
주 2회 정도 8시 이후까지 야근을 하다 보니 습관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근이 습관이 되는 일은 아주 쉽게 일어난다. 그것은 또한 내부적으로 야근을 자주 하는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갖게 하기도 한다. 그런 이미지를 갖게되면, 협업하는 사람들이 작업을 전달할 때 디자인 작업시간을 고려하지 않는다. 그들이 작업을 부담없이 전달하게 된다면 야근은 상상 못할 정도로 늘어날 지도 모른다. 야근을 자주하는 이미지는 절대로 피해야 한다. 야근을 하지 않아도 일을 잘하는 사람을 목표하여야 한다. 혹시, 이미 야근이 습관 되어 버렸다면 6시에 약속을 잡아서 6시가 다가오면 초조해지며 스스로 퇴근을 재촉하는 방법을 사용하면 좋다. 아주 효과가 빠르다.
3. 6시 이후, 나를 위한 투자를 소중히 하기
스스로의 암시가 필요하다. 일적으로 공부가 더 하고 싶다면 퇴근하고 해야 한다. 6시에 퇴근을 하는 것은 나의 권리이다. 야근을 무조건 기피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내 모든 인생에 많은 시간을 회사에서 사용하고 있다. 이미 넘칠 만큼 충분하다. 나머지의 시간에는 나 스스로 무엇을 할 것인지 생각해야 한다. 절대로 양보해서는 안된다. 양보하는 순간, (극단적으로) 회사는 내 모든 시간을 염치없이 사용하려 들 것이다. 디자이너의 성장은 회사안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지금 속해있는 그 회사만을 위한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면 그곳에서 야근하며 성장하는 게 맞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 평생 직장은 더이상 없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알지 않았으면.
4. 너를 위한 야근이라는 개똥 같은 말, 절대 믿지 않기
다 나중에 뼈가 되고 살이 될 거란 야근. 4년 전 야근, 야근, 야근, 철야, 주말출근을 반복하던 나는 8킬로 이상 살이 빠졌다. 그때는 거식증 걸렸냐는 말까지 들었다. 남들 일하는 것에 두배를 넘게 일하니 남들보다 빨리 성장할 것이라는 달콤한 말. 나중에 다 챙겨 주겠다는 너의 힘듬을 다 알고 있다는 따뜻하고 포근한 말. 욕심 많고 정이 많은 세상 물정 모르던 나는 그 말들을 철석같이 믿으며 육체적 건강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죽어갔다. 너를 위한 야근이라 말하지만, 급여는 적고 일은 많이 시키는 회사는 절대로 나를 위하지 않는 다는 것.
이번 주에는 야근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업무 시간 안에 모든 것을 끝내고 무조건 6시에 퇴근해야지 다짐하기 시작하니 집중력이 상승하고 손이 빨라졌다. 디자인적으로 만족스럽지 못해도 어느 정도의 기준에 다다르면 손을 털었다. 내 기준에는 만족스럽지 못하지만 일적으로 문제가 되진 않았다. 회사에서 주어진 업무를 하며 실력을 높이는 것도 분명 중요하지만, 스스로 원하는 공부를 하며 먼 미래를 계획하는 것도 아주 중요한 일이다. 미래를 위해 어느 정도의 자기 합리화를 사용하기로 했다.
더 이상 회사에 없어서는 안 될 인재가 돼야겠다는 멍청한 생각은 하지 않는다. 어떤 회사든지 내가 없어서 안될 회사는 곧 망할 회사이다. 나 없이도 건강한 회사에 가서 건강한 디자이너가 되는 것이 모두에게 좋은 일이다.
디자이너의 야근. 일이 있다면 야근을 해야 한다. 그러나 야근의 목적을 정확하게 알고 해야 한다.
야근을 할 만한 일인지, 꼭 필요한 야근인지, 야근을 하여 뭘 얻고자 하는 것인지.
불필요한 야근에서 벗어나자. 그리고 육체와 정신을 병들게 하는 고질적인 야근이 계속되고 있다면, 과감하게 끊어내자. 죽을 것 같을 때까지 절대로 참지 말기. 야근을 하지 않아도 좋은 디자이너가 될 수 있다.
부제의 똥멍청이 디자이너 신입은 바로 저였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아요는 야근하는 와중에도 디자이너가 글을 쓸수 있도록 도와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