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e-way ticket prject #07 상트 페테르부르크
유럽의 도시들이 대부분 그렇겠지만 이곳 상트 페테르부르크에는 유독 성당이 많다. 아니, 사실 성당이라고 통칭하기에는 좀 애매한 감이 없지 않아 있다. 러시아어에는 교회, 성당 이런 것들을 지칭하는 단어가 몇 가지 있는데 - церковь(교회), собор(성당), храм(사원) 등 - 나에게 종교가 없는 탓인지 언제나 그것들을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그렇지만 이 3가지는 엄밀히 다른 곳이다. 하긴 그러니 서로 다른 말로 부르겠지... 여하튼 내 시각에서는 모두 종교 건축물이고, 그래서 난 그냥 편의상 한 번에 성당이라고 부른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상트 페테르부르크에는 많은 성당들이 있는데, 그중 유달리 애정 하는 두 곳이 있다. 하나는 위압감을 뿜어내는 포스로 인해 그 앞에 서면 언제나 압도당하는 이삭 성당(Исаакиевский Собор)이고, 다른 하나는 부드러운 곡선이 가져다주는 수려한 외관의 스몰늬 성당(Смольный Собор)이다. 도시의 중심에 위치한 이삭성당은 접근성이 좋아 꼭 목적하지 않더라도 그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지만, 스몰늬 성당은 조금은 떨어진 곳에 있어 그 모습을 보려면 오롯이 찾아가는 수밖에 없다. 스몰늬 성당과의 만남은 실로 20여 년만 이다. 이 도시에 머물던 지난 시절에도 난 단 한 번밖에 찾지 않았었으니까.
오랜만에 다시 보는 스몰늬 성당은 여전히 그 자리에 그대로 서있다. 세월이 한참 지나 찾아왔지만, 내 기억 속 그 모습 그대로다. 하늘빛 닮은 특유의 푸른색 외벽과 화이트 톤의 부드러운 곡선이 조화를 이루는 외관도 예전처럼 이쁘고, 늘 그랬듯 한치의 흐트러짐 없이 좌우가 정확히 대칭되어 있는 구조도 매력적이다. 그래! 여전히 이쁘다. 예나 지금이나 역시 이쁘다.
스몰늬 성당은 내가 알기로 예전에 수녀님들의 교육을 위한 수도원으로 사용되었는데, 그래서인지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있는 그 어떤 성당보다 여성적 아름다움의 느낌이 물씬 풍긴다(특히 내가 사랑하는 또 하나의 성당인 이삭성당과 비교하면 그 차이가 확연히 느껴진다). 스몰늬 성당의 분위기와 잘 어울리는 자그마한 뒤뜰을 거닐며 지난 추억에 잠겨본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한걸음 한걸음을 소중히 옮기면서. 성당 한 바퀴를 돌아본 후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에 몇 번이고 뒤돌아 다시 한번 성당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다. 언젠가 다음에 다시 찾아왔을 때도 너만은 지금처럼 나를 맞이해달라고 속삭이며...
내 기억에 있는 씬노이 시장(Сенной Рынок, 러시아어를 한글로 적어놓으니 심히 어색함)은 조금 무서운 곳이었다. 사람 사는 맛이 나는 그런 장소였지만, 당시 치안이 별로 좋지 않다는 소문이 있어 나의 생활 반경 내에 있었음에도 그렇게 자주 와보진 못했던 것 같다. 하지만 친구와 한번 맘먹고 들르게 되는 날이면 이런저런 구경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시장 골목을 헤매고 다니던 그런 곳이었다.
아니, 그런데! 시장 입구에 도착하니 뭔가 좀 이상하다. 지하철역은 분명 예전 모습 그대로인 거 같은데... 세상에! 큰 쇼핑몰이 생겼다. 씬나야(씬노이의 또 다른 러시아어 발음)에 쇼핑몰이라니... 확실히 뭔가 어색하다. 시장 밖까지 가득한 노점과 우리네 전통 시장처럼 왁자지껄한 분위기의 예전 그 모습이 아니다. 시장 안의 모습도 왠지 썰렁해 보인다. 마침 내가 그런 시간에 찾은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시절만큼의 시끌벅적함은 찾아보기 힘들다. 기억 속의 그것과 다름에서 오는 실망감은 나답지 않게 시장 구경을 짧게 휙 둘러보는 것으로 마무리 짓게 만들었다.
시간이란 놈이 앗아가 사라져 버린 내 추억의 처연함에 날씨마저 쌀쌀하게 느껴진다. 자연스레 생각난 따뜻한 커피 한잔을 찾아 들어온 까페, БУШЕ(부셰). 아니 그런데... 오!! 이런!! 이건 마치 뉴욕이나 유럽 어딘가의 그것 같다. 확실히 이제 러시아도 많이 달라지긴 했구나. 아니 그보다는 내가 너무 오랜만에 온 이유가 더 맞다 하겠다. 20여 년의 시간이 흘렀으니 뭐 당연한 일 아닐까. 내 기억이 너무 옛날에 머물러 있는 탓이다.
넵스끼로 돌아온 나는 에르미따쥐 앞 광장에서 다시 걷기 시작한다. 그러고 보니 여기 온 지 벌써 4일째인데 광장과 네바강을 이제서야 찾아온다. 빼제르 여행의 필수 코스인데 말이다. 에르미따쥐(Эрмитаж)도 궁전다리(Дворцовый Мост)도 역시 예전 그대로. 씬노이 시장에서 추억을 강탈당해버린 탓에 변하지 않고 나를 기다려준 그들이 새삼 고맙다.
생각해보면 어제 들렀던 돔끄니기(Дом Книги)에서도 그랬다. 시간이 지나 달라져 버린 것들과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것들의 공존. 예나 지금이나 딱히 살 것도 없고 딱히 찾아볼 책도 없으면서 그 앞을 지나칠 때면 괜히 한번 들어가 보게 되는 돔끄니기. 그 이름 그대로 같은 자리, 같은 모습으로 서있던 서점의 내부는 하지만 조금 달라진 것 같았다. 훨씬 넓어진 느낌도 들고. 익숙하지만 한편으론 낯설게도 느껴지는 서점 안을 두리번두리번거리다 우연히 발견한 한국어 코너. 세상에 한국어 코너라니!! 상트 페테르부르크 돔끄니기에 한국어 코너가 있다니!! 7,80년대에 만들었을 법해 보이는 남루한 교재 한두 권이 어두운 한쪽 구석에 꽂혀있던 게 전부였는데, 이제는 아예 한국어 코너가 따로 생겼다. 그것도 선반을 두 개나 차지하고선 말이다. 시간이 멈춘 것 같아 보이던 서점의 외관과는 다르게 내부에선 시간이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다. 변하지 않은 것은 과거를 추억하게 하고, 변해버린 것은 현재를 깨닫게 한다.
예전에 이곳에서 공부하던 시절엔 지금과 같은 모습의 까잔 성당(Казанский Собор)은 보지 못했다. 내가 있던 동안은 성당 앞 공원이 큰 가림막으로 가리어져 있었기 때문에 성당이 한눈에 보이는 이런 뷰는 지난 2013년 방문 때 본 것이 처음이었다. 그때는 약간 억울하다는 생각도 들었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그 앞을 지나다니던 시절엔 이렇게 멋진 모습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살았으니 말이다. 아마 그때도 지금과 같은 모습이었다면 나는 하루를 통째로 공원 벤치에 앉아 보냈을 거다. 눈 앞의 넵스끼와 돔끄니기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스빠스 나 끄로비를 바라보면서 말이다.
[D+12] 2018.06.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