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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토부장 May 26. 2019

8. 새로운 곳을 만나는 새로운 방법

one-way ticket project #08 on the border


블라디보스톡에서 시작해

횡단열차를 타고 드넓은 시베리아 땅을 가로질러

거리 곳곳 추억이 묻어있는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상념에 빠져 시간을 보낸 지 3주.

이제 길었던 러시아에서의 시간을 끝내고 옆 나라 에스토니아로 넘어간다. 사실상 진짜 여행의 시작은 지금부터다. 러시아란 나라가 나에겐 나름 익숙한 곳인지라 그동안은 낯선 여행의 설렘을 즐기는 시간이었다기 보단 추억 팔이의 시간에 가까웠으니까. 이 넓은 세상을 떠돌아다니게 될 one-way ticket project는 이제부터가 시작인 셈이다. 그래서일까, 야간 버스를 타기 위해 터미널에 와있는 지금이 한국에서 떠나던 그날보다 어쩌면 더 설레기도 한다.




이미 하루가 끝나버린 밤늦은 시간에 버스에 올라있지만, 백야가 시작된 탓에 그제야 주변에 어둠이 깔리고 있다. 아직은 빛이 남아있는 시내를 벗어나 인적이 드문 도시의 외곽으로 들어서자 조금은 묘한 기분이 들기 시작한다.

진짜 여행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만큼 설레어서 그런 건가?

심야 버스란 걸 처음 타보는 것도 아닌데 뭘 새삼스럽게...

히죽히죽 웃음이 새어 나오게 만드는 이 이상한 기분은 뭘까?

생각해보니 어둠이 깔려 있는 시간에 국경을 넘는 경험이 처음인 탓이다. 몇 년 전 터키 여행 때 야간 버스를 타본 적은 있지만 그땐 국내 이동이었고, 유럽에서 기차로 국경을 넘어 본 적도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해가 쨍하게 떠 있는 대낮이었다. 게다가 몇 시간 후엔 국경 검문소마저 통과해야 하니 지금의 이 과정은 분명 첫 경험이다. 그래서 기분이 들뜨기 시작한 것 같다. 하지만 그것 말고도 마음속 저 편에서 계속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는 개구지고 즐거운 느낌. 마치 그 느낌이란 뭐랄까...  이곳 사람들과 같이 밀입국 내지는 야반도주를 하고 있는 느낌 같달까 ㅎㅎ. 왜지? 이런 기분이 드는 건 ㅎㅎㅎ.  버스가 한참 달리고 있는 지금이 깊은 밤이긴 하지만, 창밖으로 지나가는 백야의 그것은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 한가운데의 풍경과는 사뭇 다르다. 보통 영화 속에서 누군가 몰래 도망치는 심야의 시간이란 게 이런 어스름해 보이는 장면으로 표현되다 보니 그런 느낌이 드나 보다. 영화 속의 밤이라는 게 실제 그것처럼 짙은 암흑으로 보여지기 보다는 초저녁이나 해 뜰 녘과 같은 어스름한 모습으로 자주 보여지니까. 그러니 내게 익숙한 영화 속 장면이 오버랩되면서 재미있는 환상에 빠지게 된 것이다. 나는 그렇게 야반도주 중인 비밀스러운 주인공에 빙의되어 한동안 잠들지 못하고 하염없이 창밖만 바라보았다.




우리는 새로운 나라에 가게 될 때 보통 비행기를 많이 이용한다. 사실 삼면이 바다인 곳에 살고 있는 우리에겐 달리 선택의 여지도 없다. 뭐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이 얼마나 낭만적이지 못한 일이었던가를. 세상이 모두 잠든 깊은 밤 시속 60km로 달리는 버스에 몸을 싣고 에스토니아 국경을 넘으며 알게 되었다. 새로운 곳을 만나는 새로운 방법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비행기를 타고 새로운 곳에 가게 되었을 때 우리가 처음 마주하게 되는 모습은 당연히 그 나라의 공항이다. 근사하게 만들어진 거대하고 현대적인 공항이던, 오래되어 보이는 작고 낡은 공항이던 결국 공항은 현대의 문명이 만들어낸 서로 별반 다르지 않은 인위적인 건축물일 뿐이다. 생각해봐라, 만약 언젠가 방문했던 공항의 사진이 갑자기 내 앞에 놓여졌을때 과연 그곳이 어디인가 금방 알아차릴 수 있겠는지... 심지어 비행기를 탄다는 것은 마치 화물처럼 갇힌 상태로 이동한다는 것을 의미하는지라 결국은 순간이동을 한 것과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마련이다. 새로운 곳에 발을 내딛기는 하였지만 새로운 곳에 존재하고 있음을 한동안은 알아차릴 수 없는 기계적인 변화일 뿐이다.

하지만 기차나 버스로 새로운 나라에 가게 된다는 것은 분명 다른 경험이다. 비행기처럼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갑작스러운 공간의 이동이 아닌 내 앞을 스쳐가는 모든 것을 하나하나 눈에 담으며 시나브로 스며들듯이 새로운 세상과 서로 인사를 나누는 느림의 아름다움이다. 계절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하듯이 어느새 우리는 자신이 알지 못했던 미지의 세상으로 자연스레 넘어와 있는 것이다. 그리고 보통은 사람이 많은 도시가 아닌 그 나라의 자연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풍광을 선물로 받을 수 있으니 이 얼마나 낭만적이지 않을 수 있을까.


조금은 더 불편하고, 조금은 더 시간이 걸리는 방법일지 모르겠지만, 분명 느림의 미학이 심어준 강렬한 첫인상은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D+22] 2018.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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