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으로 기억해요
한참 전 부터 샤워기가 말썽이다. 꽉 잠궈두어도 똑..똑..똑..똑..똑.. 한 방울씩 떨어진다. 샤워기 헤드가 문제인가 싶어서 다른 브랜드 것을 주문해서 끼워봤다. 한 방울씩 떨어지는 것은 똑같다. 핸들을 개방한채로 임시로 잠그는 버튼이 있어서 핸들도 잠그고 버튼도 잠궈봤다. 계속 떨어진다. 샤워기 헤드의 문제가 아니라 수전의 고무에 틈이 생긴 것 같다. 수전을 바꾸려면 직접 할 수 없으니 전문가를 불러야할 모양이다.
책장에 “안부르고 혼자 고침”이란 얇은 노란색 책이 있다. 혼자 사는 사람들이 찾아보고 직접 수리할 수 있게 화장실, 부엌, 거실, 방 등의 다양한 집안 살림의 수리를 위한 메뉴얼 같은 책이다. 싱크대를 갈고, 콘센트함을 열어서 퓨즈를 바꾸고, 전등 갓을 빼서 전등을 가는 등 다양한 메뉴얼이 종류별로 있다. 물론 우리집에 맞지 않은 것도 있지만 응용할 수 있게 설명이 그림으로 잘 되어 있다. 하지만 이것으로도 할 수 없는 건 할 수 없는거다.
지은지 20년된 아파트 여기 저기 손 볼 곳이 늘어가는 중이다. 산지 10년이 넘어가는 가구들도 여기저기 삐그덕 대는 중인데 시트지를 붙인 서랍장은 너덜너덜해져서 그냥 뜯어내고 싶다. 보기에 더 흉해질꺼라 그냥 쓰고 있다. 샤워기 수전처럼 누수가 걱정될 정도면 수리를 해야하겠지만.
다행히 책장은 처음부터 튼튼한 것으로 골라서 6단 13칸에 꽃아둔 책은 잘 지내고 있다. 사이드 책장도 있으니 칸수로는 대략 90칸 정도 책을 쌓아둔 셈이다. 한 칸에 두 줄로 넣고 윗 공간에도 눞여두었으니 30권씩만 잡아도 2,700권은 넘겠다. 이 책들을 다 보고 치우기 전에는 이사는 꿈도 못 꾸겠구나. 온라인 서점 알라딘의 장바구니 리스트는 점점 늘어나는 중이다. 책이 나가는 속도보다 들어오는 게 훨씬 빠르니 곧 3,000권을 찍을 것 같다.
가구를 처음 두었을 때는 밤에 불을 켜기 위해서 스위치를 찾으러 가면서 부딪히곤 했다. 아파트 옆동으로 이사오면서 좌우가 바뀐 배치로 들어오게 되었다. 2호라인에서 1호라인으로 오니 완전 반전의 위치였다. 한 동안 반대로 해야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아서 2호라인에서 하던 습관으로 스위치를 찾고 문을 지나다녔다. 적응하는데 몇 달 이상 걸렸던 것이 기억난다. 몸에 익은 시간의 흔적이 무의식적인 행동에도 남아있었다.
이제는 지금의 위치가 아주 익숙해져서 불을 켜지 않고도 부딪히지 않으며 왔다갔다 할 수 있는데, 회색 고양이 러시안 블루가 눈에 잘 안띄기 때문에 발을 옮길때 슬라이딩 하듯이 쓸면서 옮기는 버릇이 생겼다. 이것도 고양이랑 함께 살아가는 흔적이 남은 것이겠지.
여기저기 조금씩 낡아가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인데 적응하며 살아야 할지 싹 바꿔야할지 고민이 된다.
20260211. 1,339자를 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