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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이제 Dec 20. 2022

풀떼기와 단백질의 나날들

그렇게 여차저차 이러쿵저러쿵 1형 당뇨 판정을 받게된 다음날, 나는 해야할 일을 하기 시작했다. 우선 입대 예정이었던 공군을 취소해야했다. 자칫 입영 연기를 미뤘다가 (연기를 미루다? 약간 역전앞 같은 느낌) 병무청에 끌려가기라도 하면 시간도 날리고 머리카락도 날리는 대참사가 일어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면접도 보고 헌혈도 하고 굉장히 복잡했던 입대 절차와 다르게 취소 절차는 간단했다. 병무청 사이트에 들어가 아프다는 서류를 좀 내고 딸깍딸깍을 반복하니 끝. 몇달간 모아왔던 헌혈의 시간이 날아가는 순간이었다. 


다음은 식(食)을 주문하기로 했다. 일단 당뇨라고 하니 식습관을 바꿔야 한다는 당연한 생각. 끼니를 고민해야 할 차례가 왔다. 평생 다이어트식, 식단이라곤 생각도 안해보고 살았는데 하루아침에 뜬끔없이 먹어야 하는 순간. 그동안 모르고 있던 세계로 새롭게 들어선 느낌이었다. 포탈창에 '당뇨식'이라고 검색하니 수많은 종류의 음식과 사이트가 등장했다. 모두 처음 보는 사이트와 음식들. 


"아아... 이건 '뉴케어'라고 하는 것이다... 당뇨에 걸린 어르신들이 아침에 가볍게 먹기 좋은 것이지.

"우웃, 이런 음식이 있다니... 당뇨식 대단해!~"


뉴케어라는 이름의 처음 보는 브랜드를 발견했는데, 이미 당뇨식으론 이름이 크게 알려진 브랜드였다. 그러고보니 며칠 전 유튜브 광고에서 본 적이 있기도 하고, 감성 돋는 '매일 그대와' 노래와 함께 자녀들의 효심을 쥐어짜는 내용으로 광고를 했던 것 같다. 늦은 밤 자식이 찾아왔길래 "아이고 우리 딸 웬일이야?"라고 물었더니 "식사 챙겨주러 왔지~"로 답하는 감성 광고. 효심을 자극해 구매를 유도하려 했겠지만 어림도 없다. 그렇지만 대충 구매한 사람들이 많길래 모방 구매를 해버렸다. 


뉴케어 외에도 혈당을 관리해준다는 즉석밥 몇 개, 당뇨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반응이 좋던 발아현미밥, 샐러드, 닭가슴살 스테이크 등 우선 꾸역꾸역 먹을 수 있는 음식이란 음식들은 모두 담아 구매했다. 내 몸을 실험대상으로 삼아 먹어보고 괜찮으면 계속해서 먹어볼 예정으로 샀다. 


포켓몬스터시리즈최고악당조직배송으로 구매해서 그런지 빠르게 도착한 음식들. 이영돈 PD의 마음을 담아 깐깐하고 꼬투리 잡을 일 없는 지 평가하며 먹어봤다. 내 몸은 소중하니까. 


뉴케어 - 미숫가루 맛, 맛있는데 아침에 먹을 때마다 혈당이 노란색 불로 치솟는다. 이게 왜 당뇨식인지 모르겠다. (5/10)


발아현미밥 - 당뇨 커뮤니티에서 반응이 좋길래 구매했는데 정말 맛없다. 그치만 먹다보면 은근 맛이 느껴지기도 하는 볼매스러운 음식, 대신 가격이 저렴하고 혈당 오르는 속도가 느려진다는? 심리적인 느낌이 난다. (6/10)


닭가슴살 스테이크 - 햄버그 스테이크 모양인데 맛은 닭가슴살이다. 음... 다이어트 하는 사람들이 나름 존경스럽다. (4/10)


믹스샐러드 - 혀 안에서 초록빛 향기가 춤을 춘다. 진짜 맛없고 드레싱을 뿌려도 맛없겠지만 안 뿌려서 더 맛없다. 사실 드레싱을 안 뿌린 건 내가 드레싱을 안 좋아해서 그런 거~ 아침마다 이 초록색 덩어리를 먹는 고역을 치뤄야 했다. (3/10)


돼지감자차 - 부모님께서 주셨는데 돼지감자차라길래 처음엔 돼지육수를 우린 맛이 조금 나지 않을까 기대했다. 공원에 있는 잔디를 뜯어다 차로 끓인 맛이다. 1형 당뇨는 돼지감자를 먹어도 별 효용이 없다는 걸 부모님께 지속적으로 말씀드리고 나서야 이 고문을 멈출 수 있었다. (0/10)


그리고 나중에야 알았지만, 이 모든 식단서커스 쇼가 알고보니 크게 의미없는 행동이란 걸 깨달은 걸 당뇨 진단 이후 몇달이 지나고 나서였다. 그거는 다음 글에 더 자세히 쓰기로 하고, 아무튼 요즘은 이런 다이어트식 식단을 먹지 않는다. 풀떼기에 질려 초록색은 쳐다보지도 않은지 한참이 됐다. (그래서 요즘 눈이 피로한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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