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습니다. 읽어보기 전엔 모릅니다.
책을 다 읽는 데는 두어 시간 정도 걸린 것 같다. 빠른 호흡으로 어려움 없이 읽을 수 있는 깔끔한 글이었다. 표지나 제목, 소재가 그다지 끌리지 않아 읽지 않다가 회사 차장님이 갖고 계시길래 빌렸다.
나는 최근 몇 달간의 특별한 경험을 통해 인간의 감정, 우리가 마음이라고 부르는 것, 그리고 본질적인 뇌의 기능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내용을 알고 읽은 건 아니지만 책의 중심 주제가 이와 연관이 있어 생각을 정리하는 데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따라서 이번 서평은 책의 내용이 아닌 뇌와 감정에 대하여 써보려 한다.
주인공 선윤재는 선천적인 뇌 기능 장애를 가지고 있다. 편도체가 발달하지 않아 공포를 비롯한 기본적인 감정들이 삭제된 채로 태어났다. 아이의 엄마는 아이가 세상 속에 무난히 녹아들기를 바라며 지극정성으로 아이를 가르친다. 그러던 어느 날, 끔찍한 사고로 아이는 엄마와 외할머니를 잃게 되고, 이후 우연히 두 명의 친구를 만나며 어른이 된다.
책을 읽는 내내 궁금했던 건 대체 왜 제목이 ‘아몬드’인가 였다. 편도체의 생김새가 아몬드를 닮아 그리 불린다는 얘기는 초반에 나오지만, 제목으로 정하기에는 약하지 않나. 이 질문은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난 뒤에야 해결된다. 이 책에서 ‘아몬드’가 시사하는 것은 다양하지만 나는 크게 두 가지에 집중했다. 하나는 윤재 머릿속의 아몬드, 편도체다. 이것은 모든 이야기의 시작이었고, 완성이 된다. 두 번째 아몬드가 내게는 정말 중요하다. 아몬드는 윤재 엄마의 모성애다. 윤재 엄마는 처음 윤재가 장애를 진단받고 온 날부터 윤재에게 아몬드를 먹이기 시작한다. 아몬드를 먹으면 아몬드 닮은 편도체가 발달할 거라니. 이 여편네 무식한 수준이 아주 한심하기 짝이 없다. 윤재 엄마는 똑똑한 사람이 아니라 나는 내내 그녀가 썩 못마땅했다. 그 무지에 짜증이 나는 한편, 아들을 위해 말도 안 되는 짓에라도 매달리는 그 절실함이 안타까웠다. 군중 속에 자연스레 섞여들 수 없는 인간이 감내해야 할 인생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던 엄마가 아들을 어떻게든 지키고자 했던 사랑만큼은 확실하다. 그것이 아몬드였다. 사랑은 그렇다. 가끔은 답도 없이 어리석고 멍청하다. 비이성적이고 한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은 위대하다. 이 책에서도 기적을 만들어내지 않나. 이 이야기가 상투적으로 느껴진다는 건 안타깝게도 사랑의 위대함을 아직 겪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의 뇌는 후천적으로 망가졌다. 사진을 찍어보지 않았으니 정확히 어느 부위가 망가진 건지는 특정할 수 없다. 기쁨과 안정의 감정들이 삭제되었고, 분노와 좌절, 불안, 우울 등의 감정에 과부하가 걸려 있었다. 어린 시절을 돌이켜 보면 애교도 많고 밝은 아이였으니, 인생의 어느 과정에서 해당 기능들이 삭제되고 몹쓸 감정들이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이 맞다. 작년 여름께 나는 내내 달고 살던 우울보다, 어떠한 계기로 터져버린 증오와 살의 때문에 사회생활이 몹시 고통스러웠다. 죽든지, 죽이든지, 그러지 않으려면 병원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정신과 치료를 받고, 약물치료, 자기장치료, 심리 상담을 병행했다.
병원을 다니는 몇 달간, 나는 고장 난 뇌가 고쳐지는 과정에서 다양한 감정적인 변화를 경험했다. 이것은 대단히 특별하고 놀라운 경험이었다. 단순히 는 약을 먹은 바로 다음날부터 감정적 동요, 우울감 등이 해소되었다. 시간이 지나며 나는 사랑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10년 묵은 남편에게 스무 살 첫사랑을 보며 느꼈던 절절한 연애 감정이 생겼다. 대중이 달라진 것은 아니므로 세상에 대한 냉소는 여전한데, 우습게도 대중의 감정 쏠림에 휩쓸려가기 시작했다. 사스니 메르스니 아무리 떠들어도 그저 같잖을 뿐이었는데, 요즘 나는 코로나로 인해 좌절감과 무력함, 그리고 슬픔을 느낀다 (공포는 느끼지 않는다). 감정은 단순히 이것이 있고, 저것이 없는 그러한 것이 아니라, 각각이 얽히고설켜있으며, 또 겹겹이 쌓여있는 것 같다. 하나가 걷히면 다른 하나가 드러난다. 하나가 사라지면 다른 하나가 강해지기도 하고, 덩달아 사라지기도 한다. 감정을 조절하는 것으로 알려진 호르몬은 그렇게까지 다양하지 않지만, 이들이 뇌에서 어떤 조합으로 어떻게 작용하느냐에 따라 우리는 가늠할 수 없이 다양하고 복잡한 감정을 느낀다.
이 책을 읽고서 나는 손 원평 작가에 관심이 생겼다. 사람의 감정에 대한 깊은 사유를 보여줬다. 작가의 말을 보니, 이 사람은 유년 시절에 받은 사랑의 의미도 아는 사람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글을 쓸 수 있지 않았을까. 매력적이었다. 두려움이란 무엇인지, 그것이 어떤 식으로 표현되는지, 약함과 악함이 어떻게 한 사람 안에서 엮일 수 있는지, 그리고 다양한 종류의 사랑이 어떻게 사람을 성장시키는지, 많은 것들을 이 책에서 배울 수 있었다.
윤재의 둑을 터트린 트리거가 된 건 도라였지만, 둑에 무수한 실금을 내어놓은 건 엄마였고, 할멈이었고, 곤이였다. 인생은 이다지도 단순하지 않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처럼 보이던 엄마와 할멈의 노력은 윤재 안에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다. 사랑은 쌓인다. 다른 감정은 몰라도 사랑은 그러하다. 알지 못해도 마음에 반드시 쌓인다. 그렇게 기적을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