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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쓰 Eath Oct 05. 2019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다친 후배를 위해 119를 불렀다는 이유로 욕을 먹었다.


대학원생 잔혹사, 그 첫 번째 이야기.



소년이 죄를 지으면 소년원에 가고, 대학생이 죄를 지으면 대학원에 간다 했다.

죄 없이 죄수 취급을 받으며 지내게 되는 그곳, 대학원에 대해서 알아보자.




본인은 어려서 그리 배웠다. 사고가 나면 119에 전화할 것. 주변에 곤경에 처한 사람이 있으면 도와줄 것. 그 사람이 많이 다쳤다면 119를 불러줄 것. 특별할 것 없는 일반적인 사고 대응 매뉴얼이다. 그런데 그날, 본인은 사고로 다친 후배를 위해 119를 부른 죄로 수차례 해명을 하고, 상황을 설명하고, 사과를 하고, 괴로움에 밤잠을 설쳐야 했다.



실험에 쓰는 시약을 만드는 날이었다. 두 명의 대학원생이 당번이었다. 여느 날과 다름없던 실험실의 밤, 각자 자기 일을 하느라 분주하던 중에 후드 쪽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평소 사소한 일에도 호들갑을 잘 떨던 후배였는데, 그 순간 들려오던 목소리는 여느 때와 달랐다. 진심 어린 공포. 평상시의 꺅꺅대는 비명이 아니라 울 것 같은데 너무 당황해서 울음조차 나오지 않는 낮은 비명. ‘도와주세요, 아파요’라고 하는데 보니 팔에 페놀을 쏟았다. 소매가 긴 옷을 입고 있었는데 그 위를 적셔 닦지도 못하고 어쩌지를 못하고 있는 거다. 다른 후배 하나가 잽싸게 뛰어가 가위로 옷을 잘랐고, 나는 119에 전화를 했다.


“여기 ##대학교, ##연구실인데요, 실험을 하다가 팔에 페놀을 약간 쏟았습니다. 좀 와주세요.”라고 했던 거 같다. 흐르는 물에 계속 팔을 씻고 있어라 등의 지시를 들으며 구급차를 기다렸다.


잠시 뒤에 구급차가 도착했다는 전화에 1층으로 뛰어내려 갔는데 복장이 예사롭지 않았다. 방호복 같은 것을 입은 119 구급대원들이 서있었다. 후드 안에서 작업을 하다가 약간의 페놀을 쏟았다는 얘기가 어떻게 건물 내 페놀 유출로 번졌는지 그 속사정은 도무지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일단 실험실로 동행하면서 상황을 설명했다. ‘약간의 페놀을 손가락 두 개 정도의 크기로 팔에 쏟았을 뿐이다. 작업은 후드에서 진행되었고 후드 외부로의 유출 따위는 전혀 없다.’ 도착한 구급대원들도 상황을 보고 약간은 허탈해하는 듯했지만, 큰 사고가 아닌 것이 우선 다행이었고, 이내 다친 후배와 보호자 역할을 할 다른 후배를 데리고 떠났다.



본인의 재난은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 연구실 짬으로 교수님 바로 다음인 연구 교수가 본인을 불렀다. 대뜸 짜증을 내며 (이 인간은 본디 말본새가 그러하다) 너 왜 119에 전화했냔다. 근데 본인도 거기서 아차 싶었다. ‘학교에 구급대가 들어오면 다 기록이 남는다, 이거 우리 연구실 안전 점검 평가받을 때 불이익 있으면 니가 책임질 거냐, 아 나는 몰라 내일 니가 교수님한테 다 말해, 야 이런 일 있으면 앞으로 우리 연구실만 점검 빡세질 거 아냐, 다치면 택시 태워서 보내면 되지 왜 119를 불러’ 같은 소리를 들으며 본인 또한 ‘이 정신 나간 작자가 뭔 개소리를 씹어 뱉는가’ 생각하기보다 ‘내가 왜 그랬지’ 하며 자책하기 시작했다.


국민의 안전을 위해 불철주야 수고하시는 소방대원들을 탓하거나 하는 의도는 전혀 없음을 미리 알린다. 문제는 관제 시스템이었다. 처음 신고를 할 때부터 페놀 유출 따위의 이야기는 없었으며, 이후 방문한 구급대원들에도 충분히 상황 설명을 하였다. 그들은 사진도 찍었다. 그런데 그 밤 사이에 무려 세 번이나 소방서 관계자들이 연구실을 찾아오고, 경찰도 한 번 찾아왔다. 그리고 그때마다 손님들을 모시고 의전을 챙기며 최선을 다해서 이 사고가 얼마나 ‘하찮고, 경미한’ 것인지를 설명해야 했다. 다친 후배는 팔에 평생 남을 화상 자국이 생겼지만, 본인은 최선을 다해 이 사고의 시답잖음을 강조했다.



본인이 그 고생을 하는 동안 언제나 ‘교수 다음이 나다’를 외치던 연구 교수는 ‘아 난 몰라 니가 알아서 해’만 반복했다. 학교 상황실에서도 전화가 왔다. 구급차가 몇 번이나 학교를 드나들었으니 상황실에서 모를 리가 없었다. 실은 이 사고의 얼마 전에 학교에 큰 불이 난 적이 있었다. 제법 심각해서 지역 신문에까지 보도가 되었다. 그러니 이 학교 측에서는 얼마나 식겁했겠는가. 아무리 그렇다 해도, 후배가 다쳐서 119를 부른 대학원생을 잡도리할 이유는 여전히 못된다. 그들은 다친 학생의 안전보다 이 사고가 또다시 외부에 학교의 이름을 달고 안 좋은 뉴스로 보도될 거리인가에 더 관심이 있었다. 피해 학생이 얼마나 심하게 다쳤는가를 물어보기는 했지만 그것이 세간의 화제가 될 것인지를 가늠하기 위함이었을 뿐이다. 그 통화에서 본인은 또 어땠나. 그쯤에서 슬슬 화가 나기 시작했지만, 연구실 평가에 영향이 있을까 겁이 나서 참으로 비굴하게 ‘연구실 내에서 다 처리할 수 있는 문제다, 학교에는 피해가 가지 않게 하겠다’ 같은 말을 해댔다.


대학 상황실을 달래고 나니 가장 큰 관문이 남았다. 교수님. 밤늦은 시간이라 차마 전화는 못 드리고 문자를 남겼다. 아직 주무시지 않고 계셨는지 바로 전화가 왔다. 앞서 다섯 번의 리허설을 한 덕분에 대본을 외운 양 아주 매끄럽게 상황 브리핑을 하고, ‘연구실에 교수님께서 염려하실 일은 생기지 않도록 할 테니 염려 마십시오’로 통화를 마무리했다. 지랄발광을 하던 연구교수와 달리 교수님은 별말씀 없이 전화를 끊으셨다. 그즈음 긴장이 조금 풀린 본인은 하던 지랄을 좀처럼 멈추지 못하던 연구 교수에게 ‘일 터지면 내가 책임질 테니 입 좀 다무시라’고 하고 기숙사로 돌아갔다.



그날 밤은 쉽게 잠들 수 없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정말 연구실에 불이익이 생길까 두려웠고, 그 일로 교수님께 비난을 받을 것이 너무 무서웠다. 애먼 후배 팔에 페놀을 쏟아놓고 제 일이 아닌 양 도망쳐버린 실험실 동기 놈과 어른이랍시고 떠들다가 문제가 생기니 책임은 네가 져라 난 모른다며 짜증 내던 연구 교수를 때려 죽이고 싶었다. 페놀 유출 사고 따위는 없다고 했는데 왜 소방서의 높은 사람들에 경찰까지 그 밤에 연구실을 찾아왔으며, 왜 나는 후배가 다쳤는데, 별 거 아니니 걱정 마시라는 얘기를 해야만 했는지. 학교의 교직원이라는 것들은 학생의 안전보다 제 밥그릇의 안위가 더 중요한 것들일 뿐인데, 대체 왜 나는 모두에게 사과하고, 해명하고, 빌어야 했는지. 대체 내가 잘못한 건 뭐지. 이 일은 또 한 번, 내가 나를 지키지 못하고 마음을 크게 다치게 하는 사건이 되었다.


본인은 지금 학계에 있지 않다. 사람을 상대하는 일을 하고 있는데, 일종의 서비스직이다. 만나는 사람마다 명함을 보고 묻는다. “아니, 박사님이 어떻게 이런 일을 그렇게 잘하세요?”

전공, 개인의 역량, 또는 배경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본인에게 있어 박사 과정이란 수치와 치욕을 견뎌내야만 끝나는 존버의 시간이었다. 온갖 불의를 보고도 참고, 내가 하지 않은 잘못으로 염치없는 인간 소리를 들으며 그래도 ‘죄송합니다’ 해야만 했다. 그 사연들을 모으면 책 한 권은 족히 쓰고도 남는다.



학위 과정이 본인에게 남긴 것들이 많다. 좋은 것들도 있고, 나쁜 것들도 있는데, 그 나쁜 것들은 특히 마음에 많이 남았다. 학교를 떠나고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여전히 본인은 심각한 우울증으로 고통받고 있다. 영화 뷰티풀 마인드에서 존 내쉬가 조현병을 끌어안고 산 것처럼, 본인도 우울증을 극복하거나 떨쳐버리려 하기보다는 적절히 안고 지내려 하고 있다. 요즘은 내 안의 ‘상처 받은 그 시절의 나’를 만나서 달래주려 노력하고 있다. 어리고, 잘 모르고, 서툴러서, 지금의 나라면 절대 하지 않을 선택을 했던 그 시절의 어린 내가 너무 가여워서 마음이 많이 아프다.


하지 않은 잘못으로 비난받고 욕먹는 그 시절의 나와 같은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가끔말야, 사람들은 네가 잘못하지 않은 일에 혼을 낸단다. 더러는 요만큼의 작은 잘못에 이만큼 불 같이 화를 내기도 하지. 네 행동이 옳은지, 그른지는 너 스스로 판단할 수 있어야 해. 네가 생각했을 때, 크게 잘못했다면 크게 혼나는 게 맞지만 말이야, 작은 잘못이라면 잘못한 만큼만 혼나렴. 혼낸다고 다 받아주지 말고. 그리고 잘못한 게 없다면 혼나지 마. 너는 네가 지켜야지. 우리 앞으로는 그렇게 살자.’


여전히 비굴함이 완전히 빠지지 않은 채로 사회생활을 하는 본인이 갑갑해서 지난 기억을 하나 끄집어 내 보았다. 본인의 치욕스러운 흑역사를 세간에 드러내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되고, 위로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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