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각자의 계절을 살고 있다
새벽 2시, 세상이 가장 고요해지는 시간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불청객이 있다. 바로 '불안'이다. 낮 동안에는 바쁜 일상에 치여 억누르고 있었던, 혹은 애써 외면했던 질문들이 천장 위로 둥둥 떠다닌다.
"나, 지금 잘 가고 있는 걸까?" "이 길이 맞기는 한 걸까?"
마치 짙은 안갯속을 걷는 기분이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길 위에서 나침반 하나 없이 서 있는 느낌. 발을 내딛자니 낭떠러지일까 두렵고, 가만히 서 있자니 영영 이곳에 고립될까 무섭다.
SNS 속 타인들의 삶은 왜 그리도 선명해 보이는지. 누군가는 벌써 저 높은 곳에 깃발을 꽂았고, 누군가는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웃고 있다. 그들의 빛나는 성취와 나의 지지부진한 현재를 나란히 놓고 보면, 나는 마치 고장 난 시계처럼 멈춰 있는 것만 같다. 열심히 달린다고 달렸는데, 돌아보면 늘 제자리인 것 같은 허탈감. 그 허탈감이 족쇄가 되어 발목을 잡는다.
하지만 오늘 밤은 도망치지 않기로 한다. 이 불안을 마주하고, 나에게 말을 걸어본다. 흔들리는 건 내가 약해서가 아니다. 내가 지금 간절히 무언가를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고, 더 높은 곳에 닿고 싶다는 뜨거운 열망이 역설적으로 불안이라는 그림자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러니 이 떨림은 두려움이 아니라,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이자 성장통이다.
우리는 너무 자주, 타인의 시계에 내 하루를 맞춘다. '나이에 맞는' 성취, '평균적인' 속도, 세상이 정해놓은 '정답' 같은 삶.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하면 낙오자가 된 듯 스스로를 채찍질한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자. 세상에 똑같은 꽃이 단 한 송이라도 있던가.
봄에 피는 벚꽃이 있고, 가을에 피는 국화가 있으며, 한겨울 눈 속에서 피어나는 동백이 있다. 벚꽃이 국화를 보며 "너는 왜 아직도 피지 않았니?"라고 비난하지 않듯, 국화가 벚꽃을 보며 "너는 벌써 져버렸구나"라고 비웃지 않듯, 우리에게는 각자의 계절이 있다.
나의 계절은 아직 오지 않았을 뿐이다. 늦은 것이 아니다. 그저 다른 것이다. 남들이 100미터 달리기 하듯 전속력으로 질주할 때, 나는 산책하듯 주변의 풍경을 눈에 담으며 걷고 있는지도 모른다. 혹은, 그들이 평지를 달릴 때 나는 가파른 산을 오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속도보다 중요한 것은 방향이다. 아무리 빨리 달려도 목적지가 내가 원하던 곳이 아니라면 무슨 소용일까. 나는 조금 느리더라도, 내 두 발로 단단히 땅을 딛고 내가 원하는 곳을 향해 걸어가고 싶다. 헐떡이며 남의 뒤꽁무니를 쫓는 삶이 아니라, 내 호흡을 느끼며 걷는 주체적인 삶을 살고 싶다. 그러니 타인의 속도에 휩쓸려 내 숨을 헐떡이지 말자. 나는 나의 리듬대로 간다.
눈에 보이는 성과가 없다고 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중국의 '모소 대나무'는 씨를 뿌리고 4년 동안은 작은 순만 내밀뿐, 거의 자라지 않는다고 한다. 겉으로 보기엔 죽은 것 같기도 하고, 성장이 멈춘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5년째 되는 해, 대나무는 하루에 30센티미터씩 자라나 순식간에 울창한 숲을 이룬다.
지난 4년은 멈춰 있었던 것이 아니라, 땅속 깊은 곳으로 뿌리를 내리는 시간이었다. 거센 비바람에도 쓰러지지 않기 위해, 높이 솟아오를 몸통을 지탱하기 위해, 보이지 않는 땅 밑에서 치열하게 자신을 단련했던 것이다.
나의 지난 시간들도 그랬을 것이다. 실패라고 불렀던 경험들, 낭비라고 생각했던 방황들, 아무 성과 없이 흘려보낸 것 같은 멍한 시간들조차 내 안 어딘가에 뿌리가 되어 자라고 있다. 지금 당장 꽃이 피지 않았다고 해서, 열매가 맺히지 않았다고 해서 조급해할 필요 없다. 나는 지금 깊고 단단하게 뿌리내리는 중이다.
이 어둠은 끝이 없는 터널이 아니라, 씨앗이 움트기 위해 필요한 흙 속의 어둠이다. 껍질을 깨고 나오기 위해서는 힘을 비축할 시간이 필요하다. 나는 지금 멈춘 것이 아니라, 가장 높이 튀어 오르기 위해 잔뜩 몸을 움츠린 상태다. 곧 나의 때가 온다. 그 믿음 하나면 충분하다.
불확실한 미래 앞에서 내가 붙잡아야 할 단 하나는, 바로 '나에 대한 신뢰'다. 세상 모든 사람이 나를 의심해도, 나만은 나를 믿어야 한다. 근거 없는 자신감이라도 좋다. 아니, 근거는 이미 내 안에 차고 넘친다.
돌이켜보면 나는 수많은 위기를 넘겨왔다. 도저히 넘을 수 없을 것 같았던 벽을 넘었고, 끝이 보이지 않던 밤을 견뎌 아침을 맞이했다. 그때의 내가 지금의 나를 만들었듯, 지금의 나는 미래의 나를 만들어갈 것이다. 나는 생각보다 강하고, 내가 아는 것보다 훨씬 더 끈질기다.
넘어져도 괜찮다. 다시 일어나면 그만이다. 길을 잃어도 괜찮다. 지도를 다시 그리면 된다. 중요한 것은 포기하지 않는 마음, 나를 놓지 않는 마음이다.
나는 나에게 약속한다. 스스로를 갉아먹는 비교를 멈추겠다고. 조급함에 등 떠밀려 설익은 결정을 내리지 않겠다고. 오늘 흘린 땀방울이, 고민하며 지새운 밤들이 결코 헛되지 않음을 믿겠다고.
그러니 고개 들어라. 움츠러든 어깨를 펴라. 거울 속에 비친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해주자.
"너는 잘하고 있어. 지금의 혼란은 더 큰 질서를 만들기 위한 과정이야. 너만의 속도를 믿어. 너는 결국 해낼 거야."
이 글은 독백이지만, 동시에 선언이다. 흔들리되 부러지지 않겠다는 다짐이며, 천천히 가되 멈추지 않겠다는 약속이다.
언젠가 나의 계절이 왔을 때, 나는 가장 아름다운 색으로, 가장 향기로운 향기로 만개할 것이다. 그때까지 나는 묵묵히, 그러나 치열하게 나의 오늘을 살아낼 것이다. 나의 드라마는 아직 클라이맥스에 도달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엔딩은 분명 해피엔딩일 것이다.
나는 나를 믿는다. 이 불안조차 나의 거름이 될 것임을. 나는, 결국 해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