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만 아니면 되겠다' 싶었는데 딱 걸렸다. 개교 20주년 기념행사를 어울림위원회에서 맡게 됐다. 준비사항별 담당자를 선착순으로 정했는데, 어쩌다 보니 꼴찌인 내게 남겨진 건 20주년 기념 영상 제작이었다.
6분짜리 영상 제작, 이것밖에 정해진 게 없다. 영상 구성을 어떻게 할지부터 고민. 우선 영상을 세 부분으로 나눠 ‘지난 20년, 올해 20주년, 앞으로 20년’ 이렇게 구성해 보면 어떨까 싶었다. 생각은 그럴듯한데 '올해 20주년까지는 그렇다 치더라도, 앞으로 20년은 어떻게 만든담?' 생각과 달리 실제 만들자니 방법이... 이럴 땐 우선 가능하다고 선언하고, 만들 수 있는 방법은 차차 찾아보기로.
#첫 번째 단계. 편집 툴 조사.
영상 편집. 당근 해본 적 없다. 광고 회사 재직 시절 다른 사람들이 만든 영상에 피드백은 해봤지만, 실제로 내가 편집하거나 만들어 본 적은 없다. 아이한테 물어봤다. "무료 영상 편집 툴 뭐 사용해?", "캡컷!" 중등학생들이 모두 사용한다고 알랴줌. 유튜브에서 찾아봤다. 초보자도 쉽게 따라 하는 무료 영상 툴. 초.보.자. 문구에 시선 고정. 더 찾을 필요도 없이 이걸로 정했다. 무슨 일이 생기면 아이에게 물어볼 수 있는 점도 플러스 요인.
#두 번째 단계. 아이디어 구상.
아직은 시간적 여유가 있으므로 아이디어를 우선 고민해 본다. 처음에 생각했던 앞으로 20년을 어떻게 만들지? 마음대로 상상하기를 시작. 20년 후 재미난학교는 어떤 모습일까? 한번 상상 열차에 올라타면 현실은 안드로메다까지 내달린다. 졸업생이 노벨평화상을 수상했으면 좋겠다. 재미난마을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고, 유엔에서 아이들이 평화 연설도 하면 좋겠네. 분교도 생기면 좋겠다. 한라산재미난학교. 세계화로 알프스재미난학교까지 가보자. 실현 가능성은 잠시 휴지통에 고이 집어넣어 드리고, 내가 상상할 수 있는 마음껏 생각해 보았다. 어차피 무료이므로. AI로 상상했던 모습들을 만들어보며 가능성을 테스트했다.
#세 번째 단계. 자료 취합.
이제 마감일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중간중간 20주년 기념 영상에 대한 의견이 전달됐다. 각 가정에서 짧게 찍은 생일 축하 영상들과 지나온 20년 그리고 올해 20주년 기념행사들로 5분 정도의 영상을 만들었으면 한다. 각 가정의 생일 축하 영상이 취합되었다. 난관에 부딪혔던 지나온 20년의 자료는 어울림 멤버의 도움을 받아 예전에 만들어진 10분 정도의 사진기록 영상을 확보했다. 올해 20주년 행사 자료는 카페에서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다. 대부분 행사에 나도 참여했으므로 사진 선별에 어려움도 없다. 이제 문제의 앞으로 20년 차례다. 그동안 테스트한 AI의 이미지가 썩 만족스럽진 않다. 그렇다고 마땅한 대안도 없다. 일단 이대로 킵하고 또 다음 단계로 진입.
#네 번째 단계. 영상 구성.
전체 영상 시간과 영상의 각 파트별 시간을 구성해 봤다. 딱 5분으로 영상을 끊을 것이다. 전체 길이를 먼저 정하고, 파트별 중요도에 따라 시간을 적절히 분배한다. 각 가정별 축하 영상 1분 20초. 지나온 20년 영상 50초. 올해 20주년은 2분 20~30초. 영상의 가장 메인에 해당된다. 20주년 기념행사는 다섯 개 꼭지로 또 나눠져 분량이 가장 많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앞으로 20년과 엔딩까지 포함해 30초. 이렇게 5분. 올해 20주년의 다섯 개 꼭지도 각각 시간을 정했다. 열음식 생일 축하 20초. 수유재의 여름 포럼 30초. 모동숲 동창회 30초. 대만 아이덱 30초. 도서관잔치 40초. 이제 이 시간에 맞춰 영상을 만들기만 하면(?) 된다.
#마지막 단계. 영상 편집.
실제 영상 편집 시작. 기본 기능부터 공부할 생각으로 10분짜리 영상을 찾아봤다. 스텝 바이 스텝 하나씩 버튼을 눌러가며 똑같이 따라 해 본다. 각 가정에서 찍은 20주년 축하 영상들을 모두 넣어보니 2분을 훌쩍 넘겼다. 오 마이갓! 모든 가정을 영상에 다 담아야 하니 2배속 빠르기로 시간 단축. 지나온 20년은 기존 영상에서 큰 행사 위주로 편집했다. 드디어 메인 파트인 올해 20주년 기념행사들. 본격적인 칼질의 시간이 왔다. 편집 툴에 넣었더니, 헉! 재생 시간이 10분을 넘어간다. 난 좀 더 과감해질 필요가 있었다. 무자비하게 칼질을 했다. 5분. 반이나 줄었으나 아직도 갈 길이 멀다. 가열차게 또 한 번 4분. 서슴없이 또 한 번 3분. 이제 더는 뺄 게 없는데… 싶을 정도로 가까스로 2분 30초에 맞췄다. 이 정도면 만족한다.
#최종보스. 앞으로 20년.
마감일이 일주일 안으로 들어왔다. 갑자기 찾아온 목감기 여파로 이틀을 날려먹었다. 으윽. 의료계의 힘에 살짝 기대 본다. 엔딩은 20주년 기념로고와 재미난학교 CI를 넣고, 배경 음악을 서서히 줄이며 마무리하면 5초 남짓. 남은 건 25초. 다시 한번 진지하게 고민한다. 노벨평화상,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적절한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것인지 자가 질문했다. 평소 내가 생각하는 좋은 아이디어의 두 가지 조건인 의외성과 공감대를 충족하는가? 의외성에 공감대가 더해지면 기발하거나 감동을 주지만, 의외성만 있고 공감대를 주지 못하면 먼 나라 이야기일 뿐이다. 너무 나간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다.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현실성도 중요했다. 뿌듯함과 기대감이 함께 담긴 20년 후의 모습이.
재미난학교가 20년 후면 마흔 살이 되니까 어엿한 중년의 모습이 되어있을 것이다. 그 중년의 모습을 다시 상상해 봤다. 재미난도서관은 어엿한 마을 도서관으로 성장해 독립된 도서관 공간을 갖추고 마을 사랑방 역할을 하고 있을 것 같다. 그쯤 되면 마을 도서관 우수사례로 손꼽히겠지? 수유재도 다양한 마을 활동들을 활발히 이어가 나가고 있으니, 마을공동체의 모범 단체상을 받게 될 것이다. 올해 출발한 재미난학교 동문회 모동숲은 앞으로 졸업생과 그 가정들의 연결고리가 되어줄 것이며, 뜻을 모아 장학 재단도 설립하게 될 것이다. 재미난학교는 그동안 장애·비장애 통합교육을 몸소 실천한 공로를 인정받아 공로패를 받게 될 것이다. 이 모든 것은 20주년 기념행사에 자리한 많은 사람들이 함께 일구고 만들어가게 될 것이다.
앞으로 20년은 이렇게 마무리했다. 우리가 함께 상상하고 만들어갈 20년의 모습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