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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지민 May 01. 2017

도망치고 싶지 않은 이유

대학원생 8주차의 일기

중간고사 기간에는 수업이 없었다. 시험을 본 한 과목을 제외한 나머지 과목들은 과제로 대체되면서 예상치못하게 일주일의 달콤한 방학을 맞았다. 갑작스런 방학을 계기로 그동안 다들 학교에 적응하느라 정신이 없었다는 핑계로 미뤄둔 박사 동기 모임도 가졌다. '관광'이라는 분야가 워낙 광범위하듯 열 명 남짓 모였음에도 각자가 어쩜 그리 다양한 분야에서 화려한 경력을 갖추셨는지. 다들 수도없이 많은 도전과 성취를 반복하며 열정적으로 살아온 분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즐거운 시간이었다. 나이와 배경과 관계없이 모두 '학생'에 적응 중이라는 공감대 덕분에 우리는 금방 친해졌고, 마지막까지 힘내자며 서로에게 따뜻한 응원을 건넸다. 대학원은 '동기'가 가장 큰 힘이 된다던데 하나같이 다 좋은 분들에게 의지할 수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행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주일동안 수업이 없으니 그동안 밀린 일을 처리하는데도 많은 시간을 보냈다. 간만에 사무실도 나가 쌓여있던 업무들을 처리하고, 미뤄두었던 집안일도 하고, 운동도 자주 갔으며, 텅텅 비어있던 냉장고도 채워넣었다. 그 와중에 잡혀있던 지방 강연도 다녀왔고, 서울에 일 때문에 올라오신 시어머니와 함께 바쁜 주말도 보냈다. 고작 일주일 수업이 없었을 뿐인데도 내가 학생이라는 사실을 잠시 잊었다. 그만큼 일상적인 업무만으로도 나의 일주일은 가득 채워졌다. 어쩌면 의도적으로 잊어버렸을 수도 있다. 생각했던 것보다 학생의 의무는 참 괴롭고 힘드니까.


내게 주어진 역할을 잘 수행해야한다는 사실은 내게 평생 가장 큰 부담감이었다. '착한 아이 콤플렉스'라고 할 수도 있으려나. 나는 항상 뭐든지 잘해서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큰 사람이었고, 역설적이게도 그 강박을 이겨내기 위해 끊임없이 도전하며 결국 성취해낼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느낀다. 이런 나의 약점이자 강점을 제일 잘 알고 있는데도 요즘은 내게 주어진 역할 자체가 조금은 버겁다고 느낄 때가 있다.


학교를 시작하고 내게는 '학생'이라는 새로운 역할이 생겼다. 꽤나 많은 것을 요구하는 역할이다. 일주일에 적어도 한 번 이상 부여받는 '강연자'의 역할도, 밀려있는 원고가 부담스러운 '작가'의 역할도, 리얼관광연구소를 운영하는 '대표'의 역할도, 창립을 앞두고 바쁜 한국관광스타트업협회 '간사'의 역할도, 새로운 방향을 꿈꾸는 하우투서울의 '크리에이터' 역할도 어느 하나 소홀히 할 수 없는 나의 역할이다. 이런 역할만 있으면 참 간단할텐데 집에 오면 청소와 빨래가 기다리고 있고 가끔은 남편에게 따뜻한 저녁 정도는 차려주고싶은 '주부'의 역할도 만만치 않다. 게다가 착한 딸, 착한 며느리의 역할까지 더 잘해내고 싶다는 마음은 덤이다.


학교를 시작하고 가장 먼저 경험한 내 일상의 큰 변화는 집안일에 소홀해진 것이다. 좁은 집에 책상이 따로 없어서 매일 조금씩 식탁을 점령하는 나의 교과서와 노트를 보면서 남편에게 조금 미안하다. 지난 겨울에는 그래도 일주일에 한번씩은 남편에게 제대로된 저녁을 차려주는 것이 참 여유롭고 행복했었는데 학교를 시작하고나서는 이조차 여의치가 않다. 간단한 저녁일지라도 날 위해 항상 설거지는 자기 일처럼 해주고 주말이면 (대부분은 내가) 어지럽힌 집을 먼저 나서서 군소리없이 치워주는 남편이 세상에서 제일 좋다.


빡빡하게 차버린 5월의 스케줄을 보면서 '가정의 달은 무슨, 죽음의 달이다'라고 나도 모르게 읊조렸다. 지방 출장에, 수업에, 기말 과제에, 워크샵에, 창립총회에 각종 큼지막한 일들이 가득 쌓여있는데 과연 내가 물리적으로 다 할 수 있을까 싶은 두려움이 사실 제일 크다. 그래서 더욱 이번 주에 우연히 맞이한 방학이 반가웠나보다. 나는 지금 학생이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렸을 정도로.


도망쳐버리고 싶다는 생각. 실현해본 적이 있다. 서울시를 그만둘 때의 나는 솔직하게 고백하건데, 도망친 거였다. 매일같이 나를 짓누르는 부담감을 견디지못하고 도망쳐버렸다. 도망치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그때보다 더욱 역할이 많아졌음에도 피하고 싶지 않다. 업무의 역할도 여럿이고, 결혼을 하면서 가정에서의 역할도 배로 늘어났기에 부담감은 더 커졌을지라도 나는 더이상 피하고 싶지 않다. 모두 내가 스스로 나에게 부여한 역할이기에 도망칠 이유도 없다. 강박으로부터 오는 스트레스에 징징거리는 내게 '네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충분히 사랑한다'는 말로 나를 한 순간에 달래줄 수 있는 남편과, 곁에서 나의 모든 순간을 응원하고 지켜주는 든든한 가족이 있어서 도망칠 이유가 없다.


그저 딱 일주일뿐이지만,

'학생'으로부터의 도피는 그래도 달콤했다.

이제 다시 Back to Scho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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