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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지민 Apr 24. 2017

나는 어디에서 가장 가치있게 서있는가

대학원생 7주차의 일기

중간고사 공부를 하고있다. A4 용지 3장을 빼곡히 채우는 컨닝 페이퍼를 쓰면서 이상한 쾌감을 느끼고 있다. 이렇게 펜을 들고 종이에 글씨를 써본지가 참 오래되었더라. 이제는 종이에 펜을 들고 쓰는 것보다 컴퓨터로 타이핑하는게 더 편하고 하다못해 모바일에서 엄지로 타자를 치는 것이 더 익숙한 시대에 살고있다. 간만에 4색볼펜을 돌려가며 종이에 남기는 나의 글씨가 어색한 느낌이다.


어떤 것을 공부라고 칭할 수 있을까. 학부를 할 때는 내가 뭘 하고있는지도 모르고 시험기간마다 벼락치기로 돌려막기 바빴고, 그게 공부를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석사를 할 때는 조금 더 진지해졌다. 학교수업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다보니 학교에서 배운 것들이 현실에서 어떻게 적용될지 질문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석사 졸업 후 실무를 경험하기위해 취직을 했다. 업무를 하면서도 공부는 계속되었다. 책을 보는 것을 공부라 한다면 연간 사업계획서를 쓰기 위해 관련된 논문을 찾아보기도 하고 통계나 서적들을 뒤적였다. 하지만 업무 전체 중 그 비율은 5%도 되지 않았다. 95% 정도는 사람을 대하는 공부를 했다. 현장에 대한 '공부다운 공부'에 대한 갈증 때문이었는지 일을 그만두고 세계여행을 떠났다. 여행 중에 나는 정말 많이 배웠지만 책으로 배운 적은 없었다. 책을 보는 대신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나만의 일을 만들어왔지만, 갑자기 또 다시 '책을 보는 공부'가 하고싶어 학교로 돌아왔다. 그래서 요즘은 진짜 책을 보고 논문을 읽고 게다가 손으로 글씨를 쓰는 '공부'를 하고있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내 인생을 돌아보아도 '공부'라는 건 항상 뫼비우스의 띠처럼 돌아온다. 공부가 실무가 되고 실무가 현장학습이 되고 또 다시 공부가 되어 돌아온다.


박사과정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이제는 '공부'가 또 다른 실무라는 것을 깨닫는다. 예전에는 학교에서 공부를 열심히 하면 현장에서 실무를 하는데 도움이 될거라 생각했고, 현장에서 실무를 하다 부족한 부분은 학교에서 공부를 함으로써 채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박사과정부터는 '공부' 그 자체가 실무가 되는 느낌이다. 사무실에서 연간 사업계획서를 쓰고, 보도자료를 내고, 예산 결산을 하고, 보고서를 썼던 것처럼, 학교에서 박사과정은 항상 연구주제를 찾아야하고, 학회에 논문을 내야하고, 발표를 해야한다. '돈이 되는' 연구를 한다면 더 좋다. 여지껏 실무를 하는데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던 공부의 영역이 또 다른 실무의 현장이 되어버린 것이다. 박사는 '공부'를 '실무'로 하는 사람이었다.


민주주의가 제대로 이루어지기 위해서 입법, 행정, 사법이 존재한다. 학계에 대해서 조금씩 알아가면서 모든 영역에서 긍정적인 발전이 일어나기 위해서도 나름의 삼권분립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학계가 세상에 필요한 새로운 이론이나 연구를 만들어내는 입법의 역할을 한다면, 실제 사업을 하는 민간이나 정부에서는 이 내용을 바탕으로 현실에 적용하는 행정의 역할을 해야하며, 이 모든 것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지 강력한 시민조직이 사법의 역할을 하며 모니터링을 해야만한다. 이 중 나는 어디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이 가장 적절할까에 대한 고민이 계속 드는 요즘이다.


인생은 결국 이 드넓은 세상에서 내가 있을 자리를 찾아가는 과정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가장 마음 편하게, 행복하게, 그리고 가치있게 서있을 수 있는 곳이 과연 어디일까? 가만히 서 있어서는 그 자리를 찾을 수가 없다. 마치 보물찾기를 하듯이 언젠가는 나를 위한 자리를 찾을 수 있을거라는 믿음으로 끊임없이 움직이며 도전하고 찾아헤매는 중이다. 간만에 종이에 빼곡히 글씨를 적다보니 오른손 셋째손가락 마디에 없어졌던 연필굳은살이 올라왔다. 생소한 이 느낌이 은근히 좋다. 오늘 나는 시험을 보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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