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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근차근 엄마가 될 준비
by 윤지민 Oct 10. 2018

임산부 핑크뱃지에 대한 단상

암행어사의 마패처럼 내가 직접 내밀어야만 하는가

임신 사실을 알자마자 병원에서 임신확인증이라는 걸 받았다. 아직은 멀게만 느껴지는 예정일이 적힌 종이를 들고 근처 보건소를 찾았다. 보건소에서 콩알만한 점이 찍힌 초음파 사진과 함께 확인증을 내밀었더니 대외적으로 내가 임산부임을 증명할 수 있는 핑크색 뱃지를 받을 수 있었다.


실제로 받아들기 전까지는 '뱃지'로만 알고 있었기에 당연히 옷핀으로 옷에 다는 줄 알았다. 임산부 뱃지의 존재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으나 한번도 실물을 본 적이 없었기에 손에 받아든 뱃지가 생소하기만 했다. 직접 임산부가 되어서나 이 뱃지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 있으니 그 전에는 이 뱃지를 봤어도 이게 임산부 뱃지구나를 알 수가 없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뱃지는 주로 핸드백에 달고 다닐 수 있게 만든건지 동그란 뱃지에 걸 수 있을만한 줄이 달려있었다.


임신 초기에는 정말 외형적으로는 평소와 아무런 변화가 없기에 뱃지를 차고 밖에 나가기가 민망했다. 대놓고 임산부라 광고하고 다니는 것 같기도 하고, 나 임산부이니 알아서들 배려해달라고 불특정다수에게 요구하는 것 같기도 해서 선뜻 착용하기가 어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교통만 타면 메슥거리며 올라오는 입덧기운과 어지럼증은 의지만으로는 견디기 힘들었다. 유산의 위험도 가장 높을 때라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급작스럽게 차가 덜컹거리거나 사람이 많아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릴 때는 혹시 넘어지지나 않을까 불안함이 엄습하고는 했다. 가장 임산부로서 배려가 필요한 시기가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임산부라는 티를 내기가 어려운 임신 초기이기에 힘들었던 것 같다.


한 두번 대중교통에서 이게 정말 위험하구나 싶은 경험을 하고 나서는 이 핑크 뱃지를 꼭 착용하기로 결심했다. 나도 임산부가 되어서야 이 뱃지를 처음 봤는데 나라도 임산부일 때 이 뱃지를 많이 차고 다녀야 조금이라도 더 많은 사람들이 이 뱃지의 존재에 대해 알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래야 앞으로도 나같은 초기 임산부들이 말하지 않아도 따뜻한 배려를 받을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중교통을 탈 때 임산부 뱃지를 열심히 착용하겠다 마음먹은지 3개월차. 생각보다 자리를 양보받기는 쉽지 않았다. 뱃지를 차기만 하면 사람들이 양보해줄거라 생각했던 건 나의 착각이기도 했고, 뱃지를 차고있는 내 스스로가 당당하지 못하고 쭈뼛거리게 되는 게 참 이상했다.


객차 양 끝에 있는 노약자석은 아직 임산부 티가 전혀 안나는 젊은 여성이 앉아있기에는 아무리 핑크뱃지가 있다해도 어른들의 눈치가 보여 아주 힘들 때가 아니면 앉지 않았다. 가장 구세주같은 건 핑크색 좌석이다. 임산부 배려석인 핑크색 좌석이 실제로 다른 좌석보다는 비어있는 확률이 높았다. 만약 그 자리에 누군가가 앉아있다면 사실 그 뱃지를 달고 앞에 서기가 굉장히 민망했다. 앉아있는 이가 핸드폰에 열중하고있다면 더더욱 그랬다. 이 뱃지를 빨리 알아봐달라는 무언의 압박을 주는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 같아서였다. 당당히 그 사람의 눈 앞에 뱃지를 흔들어대지 못한 나의 잘못일수도 있지만, 아직까지 먼저 임산부석에 앉아있던 사람에게 양보를 받아본 적은 거의 없다. 나의 핑크뱃지는 먼저 배려를 받기위함 보다는 그 자리에 당당히 앉을 수 있는 자격증 같은 것이 되어버린 느낌이었다.


내가 임산부 뱃지를 착용하기 시작하니 대중교통에서 이 뱃지를 단 사람들이 점점 더 많이 보이기 시작했다. 핸드백의 종류에 따라 잘 보이기도 하지만, 배낭을 메고 있는 경우 잘 보이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나는 이 뱃지의 존재에 대해서 알고 실물 모양을 인지하고 있기에 보이는 것이지만, 이 뱃지를 전혀 본적이 없다면 이게 뭔지도 모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번은 서있는 사람들끼리는 어깨가 닿을 정도로 차있던 지하철을 탔다. 임산부 뱃지를 달고 배려석 앞에 섰으나, 그 자리에 먼저 앉아있던 젊은 남학생은 전공책에 집중하느라 내가 서있는지도 몰랐다. 반대편에 앉아있던 나이 지긋한 중년의 아주머니가 나를 발견하고 여기 와서 앉으라고 소리치시는데, 서있는 사람들을 제치고 움직이기도 힘들었을 뿐더러 우리 엄마보다도 연세가 있어보이시는 분께 자리를 양보받기도 마음이 편치않아 괜찮다며 사양했다. 아주머니가 젊은 남학생을 보고 임산부 좌석에 앉아서 왜 양보도 안하느냐고 목소리를 높이셨고 객실 안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나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그 남학생은 이어폰을 끼고있느라 주변에서 어떤 상황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모르고 자신의 할 일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러나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사람 중에서도 내가 선 자리에 가까운 곳에 있는 분들은 아무도 먼저 양보해주시지는 않았다.


"정말 못 봤어요. 정말 죄송합니다."


두 정거장 정도를 그렇게 서서 지나가다 그 학생이 나를 발견했는지 너무 죄송한 얼굴로 다급하게 일어났다. 한 정거장만 더 가면 내려야하는 상황이어서 괜찮다 말했지만 연신 죄송하다고 고개를 숙이며 나를 앉을 수 있게 해주었다. 여태 나를 알아봐주지 못한 그 학생이 야속하기도 했지만, 늦게라도 알아봐주고 너무나 미안해하는 얼굴이 참으로 고마웠다.


비워져있는 임산부 좌석은 대놓고 양보를 바랄 수 없는 임산부에게는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하지만 사실 만원 지하철 안에서 임산부 좌석을 항상 비워놓기란 비효율적인 일이기도 하다. 그저 현재 임산부 핑크뱃지를 보유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당부하고 싶은 건 임산부가 아닌데 핑크색 좌석에 앉게 되었다면 적어도 주변에 이 자리를 비켜줘야할만한 사람이 있을지 관심있게 둘러봐주시면 좋겠다.


나도 직접 이 뱃지를 차게 되기 전까지는 몰랐다. 이 좌석이 왜 필요한지, 하나의 좌석이 누군가에게는 얼마나 소중한지. 누구에게나 배려를 부탁하게 만드는 이 핑크색 뱃지는 요즘도 매일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에 대한 미안함과 감사함의 감정을 느끼게 해준다. 이제는 뱃지를 챙겨나오지 못했더라도 양보를 받은 적이 있을 정도로 배가 나온 6개월차 임산부가 되었다. 배에 약간의 무게감을 느끼고 있지만 안정기에 접어들고나니, 사실 대중교통을 타는 것은 임신 초기때와 비교하면 덜 힘든 것 같다. 그만큼 임산부임을 말하기 어려운 임신 초기의 여성들을 위한 배려가 더욱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옷깃 속에서 살짝 빛나도 알아볼 수 있는 암행어사의 마패처럼, 임산부 핑크뱃지도 모른 척 달고만 있어도 누가 먼저 발견해줄 수 있으면 좋겠다. 달고있는 것 만으로도 미안하고 감사한 임산부들의 마음을 알아봐주신다면, 그 순간 세상이 조금은 따뜻해질거라 믿는다.


임산부 뱃지는 이렇게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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