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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봉기 Oct 11. 2020

자그레브 여행 1

발칸반도의 보석

크로아티아의 수도인 자그레브의 여행은 반 옐라치치 광장에서 시작한다. 자그레브의 최대 번화가인 이곳은 반 옐라치치 동상과 상점 그리고  광장 한쪽에 <만두쉐바츠>라는 분수가 있다.


자그레브라는 명칭은 이 분수에서 유래되었다. 중세에 메마른 지역이었던 이곳을 지나가던 영주가 기사들의 목마름을 해결하기 위해 땅을 파서 우물을 발견했다는 뜻에서 이 도시의 이름이 유래한다. 크로아티아어로 자그레브라는 지명과 비슷한 용어인 <자그라비티>는 우리말로 움푹 퍼내다는 뜻이다.




광장 중심부에 있는 동상의 주인공인 반 옐라치치는 19세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부터 크로아티아 독립을 위해 헌신하여 크로아티아의 독립을 이루어낸 영웅으로 이 곳 사람들로부터 큰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다.



지리학적으로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발칸반도는 고대 이래로 열강들이 자신의 이익과 세력을 확대해가기 위한 각축장이었다. 고대 그리스와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시작으로 로마시대에 와서는 동로마와 이슬람 제국이 겨루었으며 이후 합스부르크 제국과 오스만 제국이 대립해왔다.


여기에 오스트리아의 가톨릭과 비잔틴 제국의 동방 정교 그리고 오스만 튀르크의 이슬람이 혼합되어 치열한 종교전쟁도 함께 이루어졌다.


강대국의 패권과 인종과 종교가 뒤섞여 전쟁으로 얼룩진 발칸반도에서 그나마 아드리아의 해의 아름다운 자연으로 여행객을 불러 모으는 곳이 크로아티아였다.


하지만 크로아티아 역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향을 받다가 2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유고슬라비아 연방 공화국에 속한다. 이후 유고슬라비아 연방 공화국을 이끌던 티토가 사망하자 신 유고슬라비아 연방이었던 세르비아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면서 1991년 6월 25일 독립하였다.



옐라치치 광장 바로 위에 있는 자그레브 대성당은 1093년에 헝가리 왕인 라디슬라스가 건설을 시작하여 1102년에 완공했으며 1217년에 성모승천 마리아에게 헌정되었다. 그래서 성당 앞 광장에는 믿음, 소망, 순결, 겸손을 상징하는 네 명의 천사들 사이에서 승천하는 마리아의 황금상이 탑 위로 우뚝 솟아있다.



성당 입구 왼쪽에는 오래된 시계와 기둥 그리고 새로 만든 기둥이 눈에 띈다.



오래된 시계가 가리키는 시간은 7시 3분 3초로 1880년 크로아티아 대지진이 당시 대성당이 무너진 시각이다. 오래된 기둥은 당시 무너진 성당의 기둥이며 새로운 기둥은 1901년에 다시 완공된 모습의 기둥이다.


자그레브 대성당 중앙문 위쪽의 삼각 부분 가운데는 예수님이며 왼쪽은 성인 스테판 오른쪽은 성인 라디슬라우스의 조각상이 보인다.




그리고 그 아래 중앙문 바로 위는 천상에서 하나님과 예수님이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보이고 문 왼쪽에는 성인 키릴과 성인 게오르기우스 그리고 성인 바바라의 조각상이 있고 문 오른쪽에는 성인 카타리나와 성인 플로리안 그리고 성인 메토디오스 동상이 조각되어 있다.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바로크 양식의 제단과 신고딕 양식의 제단 그리고  보물급 유물이 10개 이상이 있는 성당 안으로 들어가면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조각상 위에 보이는 글라골 문자이다.



최초의 슬라브족 문어인 글라골 문자를 이 곳에 새긴 사람은 1,000년 전 성당 건립에 참여한 크릴과 메소디우스로 그들은 성당을 지을 당시의 상황을 벽에 담았다.


이후 글라골 문자는 불가리아에서 사용되었으며 키릴 문자로 변형되어 세르비아와 러시아에도 영향을 주었다.


1991년 크로아티아가 독립을 했을 당시 크로아티아는 글라골 문자를 자신들의 모국어로 사용했는데 이는 최초의 슬라비 문자를 통해 크로아티아의 독립과 우월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글라골 문자가 보이는 입구 반대편에는 티치아노가 그린

<성모승천> 성화가 보인다.



마리아가 죽은 지 사흘 뒤에 영혼과 몸이 하늘나라로 들어 올림을 받은 성모승천은 마리아가 지상 생활을 마친 뒤 영혼과 육신을 지닌 채 하늘의 영광으로 영입되었다는 내용이다. 이 작품에서 특이한 것은 성모가 입고 있는 옷이 마리아 상징색인 빨간색과 파란색이 아니라 지상에서 즐겨 입던 청록색과 진홍색으로 그려져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청록색은 가난을 즐겨하는 마음을 나타내고 진홍색은 하느님에 대한 열렬한 사랑을 의미한다고 한다.




성당의 중앙제단으로 계속 들어가는 길에 매우 섬세하면서 화려한 제단들이 눈에 띈다. 그중 특히 예수를 안고 있는 요셉의 제단이나 신약성서의 저자인 마가의 제단은 아름다움으로 여행자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또한 성모의 일생을 그린 4폭의 재단화를 배경으로 중앙에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상이 있는 성모 마리아 제단은 압도적이다.



중앙제단 근처에서 보이는 무덤의 주인공은 스테파나츠이다 . 그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자그레브의 대주교로써  유고 슬라비아 연방으로부터 독립하려는 크로아티아 중심의 파시스트 세력인 우스타세 정권을 암묵적으로 지지하였다.


로마 가톨릭인 그는 세르비아의 그리스 정교 세력과 대립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그는 나치의 발칸반도 점령을 환영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하느님은 우방국의 지도자이신 아돌프 히틀러와 우리의 지도자이신 안테 파벨리치로 하여금 무력으로 우리의 압제자를 쫓아내도록 인도했다. 하느님께 영광을! 아돌프 히틀러에게 감사를! 안테 파벨리치에게 무한한 충성을!


이후 그는 히틀러와 안테 파벨리치 중심의 유스 타세 정권이 자행한 크로아티아 내 세르비아인들의 대학살에 어떠한 의견도 표명하지 않았다. 크로아티아 사제들도 적극 가담한 대학살에 30만 명 이상의 세르바아인이 희생되었다.


결국 2차 세계대전이 연합국 쪽으로 우세해지고 티토가 이끄는 유고연방이 크로아티아를 점령하자 재판이 열려

스테피 나츠는 16년형을 선고받는다. 이에 반발해 바티칸은 그를 추기경으로 임명하며 성인으로 대우하였다.


스테파나츠는 감옥에서 16년이라는 세월을 보냈으며 감옥에서도 그는 신앙심을 버리지 않고 끝까지 믿음으로 순종했다.


현재 크로아티아에서 나 치과 함께 그를 세르비아 대학살의 방조자로 인식하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가톨릭의 순교자로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그의 무덤 옆에 무릎을 꿇고 예수님에게 그의 죄를 고백하는 스테파나츠의 부조에서 여행자는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성당이 자랑하는 화려한 오른 간을 보면서 성당을 나오면 스테파 나츠의 이름을 건 가게들이 많다. 그 가게들을 지나면 현지인들의 활기를 느낄 수 있는 대표적인 재래시장인 돌 락시장이 나온다.



시장에는 과일과 생화 그리고 수공예품 등 다양한 물건을 판매하는 노점상이 있고 광장 뒤편의 지하 시장은 생선과 육류, 와인 등 식료품을 판매한다.



돌 락시장 아래쪽 입구에는 먼 거리를 걸어서 직접 키운 농산물을 팔아서 가족의 생계를 유지했던 크로아티아의 어머니의 조각상이 있어 크로아티아의 가난하지만 강인한 역사를 느끼게 해 준다.  


돌락 시장을 거쳐 언덕을 오르면 성 게오르기우스 동상이 보인다.



동상은 성 게오르기우스가 인간 제물을 요구하는 용을 죽이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성 게오르기우는 초기 기독교의 14 명의 성인 중의 한 명으로 용으로부터 사람들을 구하고 그들을 기독교로 개종시켰다. 이후 로마의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박해로 참수형을 당했다.


성조지 동상 바로 위에 돌의 문이 있다.



터널처럼 생긴 돌의 문안에는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 제단화가 있다. 그리고 그 앞으로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하고 있는 모습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15세기 자그레브 성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5개가 있었는데 1731년 화재로 인해 모두 불에 타서 그 모습을 잃었다. 하지만 바로 이곳 돌의 문 안에 있었던 성모자의 그림만이 화재 속에서 살아남았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많은 크로아티아 사람들은 이 기적을 기억하며 힘든 일이 있거나 혹은 기적을 바라는 마음에서 이곳에서 기도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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