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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봉기 May 04. 2021

나오시마

소리 없는 아우성

감동이 없다.


런던 내셔널 갤러리와 파리 오르세 미술관 등 유럽 여행을 하면서 수많은 모네의 수련을 보았지만 감동이 없었다. 사람들이 모네의 수련에 왜 감동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수련에 무지한 나에게 그 진가를 알아보게 한 곳은 일본의 나오시마였다.



시코쿠는 일본 열도를 구성하는 4개의 섬 중 가장 작은 섬으로 사누키 우동으로 유명한 곳이다. 여기서 배를 타고 20분쯤 가면 선착장에 쿠사마 야요이의 작품인 노란 호박이 있는 나오시마가 나온다.



나오시마는 구리 제련소가 있었던 곳으로 구리 폐기물로 황폐한 땅이었는데 베네세 그룹의 후쿠다케 소이치로 회장이 이 섬을 예술의 섬으로 바꾸어 놓았다.


인간을 구원하는 것은 결국 자연과 예술이라는 확고한 그의 신념은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버려진 나오시마를 바다와 태양 그리고 미술과 건축을 하나로 엮는 예술의 섬으로 탈바꿈시켰다.


나오시마 아트 프로젝트라 불리는 이 계획은 1987년 후쿠다케 회장이 10억 엔을 들여 섬의 절반을 사들이면서 시작되었다. 원래 후쿠다케 회장은 이 섬을 캠핑장으로 이용하려 했으나 자연과 공조를 중시한 세계적인 건축과 안도 타다오를 만나면서 예술의 섬으로 바꾸어나갔다.


나오시마 아트 프로젝트는 베네세 하우스와 지추미술관 그리고 아트하우스 등 세 가지로 구성되어 있다. 1992년 나오시마 아트 프로젝트는 베네세 하우스부터 시작한다.



라틴어로 좋은 삶을 의미하는 베네세 하우스는 아름다운 세토 해가 보이는 언덕 위에 위치하고 있으며 호텔과 미술관을 겸하고 있다. 이곳에 들어서면 텔레비전은 물론 휴대전화, 컴퓨터와 인터넷 등 모든 문명으로부터 완벽하게 단절되어 있다.



호텔 옆에 위치한 지추 미술관을 입장하기 위해서는 매표소에서 표를 구입해 10분 정도 걸어야 한다. 미술관으로 가는 길 위로 연못이 보이고 연못 안에는 단아하게 핀 수련들이 하늘거린다.



건물 자체가 예술품인 지추 미술관은 자연과의 조화를 중시하는 안도 타다오의 의도에 따라 지형에 맞게 가라앉히는 식으로 지어졌다.



3층 규모의 미술관 내부 역시 안도 타다오의 의도대로 콘크리트로 지어 문명의 삭막함이 감돌지만 콘크리트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한 줄기 빛들로 인해 빛의 의미를 극대화하고 있다. 이 미술관의 주제는 빛과 자연이다. 이 커다란 주제를 관통하는 세 명의 작가, 9개 작품만이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


첫 번째 전시실로 들어서자 조금 전 이곳으로 오는 길가에 왜 수련을 심었는지 자연스럽게 알 수 있다.


전시실 큐레이트의 지시에 따라 실내화로 갈아 신고 한 참을 기다리자 실내로 들어가라고 한다. 대리석 7만 개로 장식된 번들거리는 바닥을 걸으며 실내로 들어서자 인공조명 없이 자연 채광으로 이루어진 하얀 벽에 무엇인가 반짝거리는데 멀어서 정확한 형체를 알 수가 없다.         




한 발 한 발 다가가자 모네의 수련들이 온 사방 벽을 꽉 채운채 여기저기서 넘실거리고 있었다. 유럽의 많은 미술관을 다니면서 모네의 수련을 보았지만 이렇게 장대하면서 화려한 작품은 본 적이 없다.


노을 속 구름처럼 황홀한 이미지를 연출한 모네의 작품에서 수련은 보이지 않는다. 오로지 해와 물이 만나 펼치는 빛의 향연만이 넘쳐나고 있었다. 수련은 후쿠다케 회장이 1998년 천문학적인 금액을 주고 보스턴 미술관으로부터 구입했다고 한다.


다음 작품은 빛의 작가이자 미니멀리즘의 사제인 제임스 터렐의 <오픈 필드>이다. 전시실에 들어서자 이번에도 역시 실내화로 갈아 신고 어두운 전시실로 들어선다.


전시실 계단 위로 푸른색만이 있는 작품이 보인다.



그냥 블루다.


불안한 마음으로 작품을 응시하지만 어떤 감동도 없다. 푸른빛 밖에 없다. 한 참을 보고 있으니 큐레이트가 계단을 올라 작품 앞으로 가라고 한다.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히며 계단을 오르는데 마치 작품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다.


작품 앞에 서자 큐레이트가 작품 속으로 들어가라고 한다. 자세히 보니 과연 작품 안으로 방이 보였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작품 속으로 들어간다.


작품 속으로 들어가는 순간 모든 방향감각과 공간감은 사라지고 오직 푸른빛만이 존재한다. 나는 어느새 작품의 일부가 되어 작품 속을 거닌다. 내 주위에는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푸른빛으로 나를 채운다. 그렇게 작품 속을 걸으며 방의 끝에 다다르자 푸른빛의 다음 방이 다시 기다린다. 푸른빛에 무장 해제된 나는 그저 허허거리며 정신을 놓아 버린다.


제임스 터렐은 중국의 베트남 침공 때 비행기를 몰다가 죽음에 이르렀던 경험이 계기가 되어 빛을 탐구하는 작가가 되었다. 그는 모네의 빛을 현대적으로 확장해가며 빛을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을 완성했다.


미술관에서 마지막 만난 작품은 미국의 작가 월트 드 마리의 <타임, 타임리스, 노타임>이다.



성스러운 신전을 연상시키는 전시실에 들어서자 금박을 입힌 27가지 나무 모형이 2.2미터의 구형 화강암을 둘러싸고 엄숙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해의 움직임에 따라 치밀하게 배치된 전시실 창으로 빛이 들어오면 금박의 사각 모형과 중앙의 둥근 구가 다양한 이미지를 창출하면서 관람자를 압도한다.


마치 우리를 넘어선 그 무엇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일깨우며 우리의 인식이 얼마나 미미한지 보여준다. 특히 관람자를 비웃기라도 하듯 구형의 화강암은 방안의 풍경을 때로는 압축하고 때로는 확대하여 보여준다.


지추미술관 감상을 마치고 뒤로 나가면 바다로 열려있는 푸른 들판이 나오고 조금 걸으면 역시 안도 타다오가 설계한 하얀 건물인 이우환 미술관이 나온다.



1936년 한국에서 태어난 그는 프랑스와 일본에서 공부하였으며 나무와 돌 그리고 철판 등으로 작품을 만드는 작가이다.


이우환 미술관을 돌아다니다보면 마치 사람이 앉아 있듯미술관 곳곳에 돌과 철판이 덩그러니 놓여 있다. 그런데 돌과 철판에서 알 수 없는 고립감과 외로움이 느껴진다. 또한  돌과 철판 위로 펼쳐진 아름다운 바다와 하늘의 모습에서 동양화에서만 볼 수 있는 여백의 미도 보인다.    


지추 미술관을 나와 나오시마 마을의 빈 집을 설치 미술로 바꾸어 놓은 아트 하우스로 향했다.



마을 내 버려진 빈 집 3채를 개조해 시작한 아트 하우스는 현재 7채가 예술작품으로 변모해 있다. 섬 마을 사람들이 사는 집들 속에 위치한 아트 하우스는 민속촌의 박제화 된 정형성을 배제한 채 자연스럽게 위치해 있다.


예쁜 안내판을 따라 일본식 옛집이 늘어선 아름다운 골목길을 걸으니 첫 번째 아트 하우스 <가도야>가 나타난다. <가도야>는 밖에서 보면 평범한 일본식 전통 가옥이지만 안으로 들어서면 놀라운 풍경이 펼쳐진다.



불을 완전히 끈 어두운 대청마루에 물을 채우고 물속에서 0을 제외한 1에서 9까지의 숫자가 다양한 색깔로 여기저기서 반짝인다. 어두운 밤하늘에 별을 연상시키는 이 작품은 설치작가 미야지마 다쓰오가 제작한 것으로 인간의 생과 사를 보여준다.


어둠 속에서 깜박거리며 나이를 상징하는 숫자를 바라보고 있으면 시간이라는 것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가를 알게 된다. 중요한 것은 순간순간 빛나는 삶이지 시간이 아니라는 생각이 불현듯 든다.


<가도야>를 나와 아트하우스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미나미 데라>로 향했다. 이 곳은 안도 타다오와 제임스 터렐이 완성한 곳으로 <달의 뒤편>이라는 부제가 달려 있다.



옛날 절터에 있던 빈 집을 개조한 이 곳에 들어서자 칠흑 같은 어둠만이 존재한다. 한참을 앉아서 어둠에 익숙해지자 큐레이트가 어둠 속을 걸어보라고 한다.


어둠을 헤치고 한 발 한 발 걸으니 어둠 너머로 다시 어둠이 펼쳐진다. 겹겹의 암흑 속에서 두려움을 넘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절규가 느껴진다.


마지막으로 나오시마 주민들이 <고>라는 게임을 즐기던 건물을 새롭게 개장한 <고 카이 쇼>를 방문했다.




이 곳에는 2개의 소박한 다다미방과 작은 정원만이 있다. 한쪽 방에는 화려한 동백들이 사람처럼 앉아 있고 나머지 한쪽 방에는 한 송이 동백꽃이 덩그러니 놓여 있다. 정원에는 그들이 태어난 동백나무 한 그루가 본향처럼 마주하고 있다. 일본인 특유의 서정성이 집안 가득히 넘친다.


나오시마를 여행하면서 나는 그들이 행하는 도발적이며 용기 있고, 일상적이면서 독특한 예술적 정신과 실천에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었다. 자연과 예술 그리고 사람이 어우러지며 빚어내는 향기로운 성취는 오랫동안 여행자의 마음을 놓아주지 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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