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손봉기 Dec 19. 2020

희망봉 투어

아노미


You Die



이 말을 듣는 순간 너무 놀라 온몸의 세포가 갑자기 타올랐다가 꺼지는 느낌이었다. 아노미라는 것이 이런 거구나 라는 생각이 들면서 모든 것을 토할 것만 같았다.


친구와 나는 케이프타운에 도착했다. 공항에서 숙소로 이동해 짐을 풀고 환전을 하러 나갔다. 거리는 한산하고 흑인 이외에 백인이나 동양인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환전을 하고 희망봉 투어를 신청하러 여행사를 찾았다. 2명의 흑인이 환전소부터 우리를 따라온다. 우리는 겉으로는 여유롭게 농담을 건네고 태연한 척하지만 노골적으로 따라오는 그들을 보며 잔뜩 긴장감이 들었다. 다행히 아무 일도 없이 여행사를 찾아 희망봉 투어를 신청했다.


내일 새벽에 숙소로 픽업한다고 하여 픽업 시간을 확인하고 여행사를 나오려다 불안한 마음에 다시 여행사로 들어가서 시내투어를 신청했다. 시내투어는 워터프런트와 아쿠아리움을 시작으로 현지인 마을과 테이블 마운틴 등 7군데를 방문하는 일정이었다.



시내 투어로 제일 먼저 찾은 곳은 워터 프런터이다. 워터 프런트는 케이프타운에서 가장 인기 있는 관광지로 쇼핑몰과 레스토랑 그리고 기념품 상점이 있으며 테이블 마운틴을 배경으로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하고 있었다.



그리고 트어 중간에 들른 보캅은 파스텔풍의 화사한 풍경을 주는 인상 깊은 마을이었다. 케이프 말레이라는 인종이 모여사는 이곳에 1790년대에 건설한 최초의 이슬람 사원 오우왈 모스크와 보캅 박물관이 있다. 시내 투어 중 가장 인상적인 것은 현지인이 사는 마을로 주술에 의해 병을 낫게 한다는 병원이 마을 한가운데 있다. 이 마을은 투어가 아니면 방문할 수 없었으며 사진 촬영도 금지되어 있었다.



시내투어 마지막 일정으로 테이블 마운틴 입구에 도착하자 투어가 끝났다며 차량은 가 버린다. 우리는 케이블카를 타고 정상에 올랐다. 케이프타운을 감싸고 있는 거대한 산의 정상이 테이블처럼 평평해 이름이 테이블 마운틴이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케이프타운은 바다를 배경으로 학의 날개처럼 우아하게 펼쳐져 있다. 같이 간 친구가 묻는다.


왜 사람들이 높은 곳에 오르고 깊은 바다에 들어가는지 아나?  글쎄.... 고요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석양으로 붉게 물드는 케이프타운과 바다를 말없이 바라보며 끝없는 고요를 즐겼다.


다음 날 아침 픽업 시간 7시에 맞추어 일찍 일어나 준비를 마친 후 10분 전 정문으로 내려갔다. 정문에는 이미 우리를 픽업할 차량이 대기하고 있었다. 운전사가 희망봉 투어를 신청했느냐고 물어서 그렇다고 대답하자 차량에 탑승하라고 한다. 아무런 의심 없이 차량에 오르는데 이상한 기운을 감지한 친구가 나를 붙잡는다. 약속시간도 맞고 희망봉 투어까지 확인했는데 왜 그러느냐며 나는 차에 올라탔다. 하지만 친구가 타지 않는다. 친구가 자꾸 눈짓을 해 차 안을 살펴보니 차가 너무 낡은 데다 흑인 가이드 혼자 밖에 없다. 가이드 눈빛도 예사롭지 않았다.


더럭 겁이 나서 바로 내린 후 여행사에 확인한다고 이야기하고 다시 숙소로 올라가서 전화를 걸었다. 너무 이른 시간이라 전화를 받지 않는다. 어떻게 할까 생각하다가 다시 내려가 보니 차가 보이지 않는다. 대신 고급스러운 리무진이 대기 중이었다.


운전석에서 명찰을 단 백인이 희망봉 투어를 신청했냐고 물어서 맞다고 하니까 타라고 한다. 차 안에는 이미 할아버지 할머니들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타고 있었다. 차가 출발하자 가이드가 왜 늦었냐고 묻길래 조금 전에 있었던 상황을 이야기했다. 우리 이야기를 들은 가이드가 깜짝 놀라며 만약 그 차를 탔으면 죽었거나 사막에 벌거벗겨진 채 버려졌을 거라고 이야기한다. 며칠 전에도 2명이 실종되는 사건이 벌어졌다고 한다.


순간 너무 놀랐다. 속이 메스껍고 1시간 이상 바깥 풍경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맞이하는 아노미였고 말로만 들었던 여행하다가 죽을 수도 있는 순간을 겪은 것이다.



차는  광활하고 시커먼 바다 위로 거침없는 파도가 치는 아프리카 특유의 야생적인 바다인 캄프 베이 비치를 지나서 계속 남으로 내려갔지만 나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조금 전 죽을 수도 있었다고 생각하니 온 몸에 힘이 빠져서 꼼짝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가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차는 영국 BBC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안도로 제프 먼스 피크를 달리고 있다. 그 압도적인 아름다움에 아노미가 점차 사라질 무렵 펭귄으로 유명한 볼더스 비치에 도착했다.



아프리카에 웬 펭귄 하는 의구심이 들었지만 가까이 가니 진짜 펭귄이 여기저기 다닌다. 케이프 펭귄이라 불리는 자카스 펭귄은 온난한 지역에서 생활하며 머리 부분에 검은 털이 나 있는 것이 추운 지방의 펭귄과 다른 점이다.



몸 크기가 35센티미터에 불과한 귀여운 펭귄들이 뒤뚱거리며 걷는 모습을 지나자 바위 밑으로 수십 마리의 물개가 무리 지어 바다를 헤엄치고 있다. 몇 마리는 바위 위로 올라와 마치 사람처럼 앉아 있다.


볼더스 비치를 출발해 1시간 정도 지나자 희망봉 표지판이 보인다. 케이프 포인트에 도착했다.



희망봉은 원래 폭풍의 곶이라 불리었다. 하지만 바스코 다 가마가 이 곳을 통과해 인도로 가는 항로를 개척한 후 당시 포르투갈 왕이었던 주안 2세가 이 곳을 희망봉이라 불렀다. 하지만 이 곳이 유럽인의 눈에 띈 이후 침략과 노예사냥 등 아프리카의 약탈이 시작되었고 결국 아프리카인의 영혼까지 짓밟히는 저주와 실망의 상징이 되었다고 생각하면 희망봉이라는 말은 다시 원래의 이름인 폭풍의 곶으로 불리는 것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케이프 포인트 정상에 도착하니 저 아래 희망봉이 보인다. 그리고 희망봉 너머로 끝없이 바다가 펼쳐져 있다. 장엄하며 광활한 바다에서 불어오는 무한한 에너지는 여행자로 하여금 복잡한 감정을 갖게 한다. 그 옛날 후추를 찾아 생명을 걸고 이곳을 거쳐간 유럽인의 모습과 그로인해 말할 수 없는 픽밥을 받았던 원주민인의 모습이 교차하며 희망과 절망의 감정이 동시에 느껴진다. 하지만 희망봉을 감싸고 있는 무심한 바다와 하늘은 선명하게 빛나고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왕가의 계곡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