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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봉기 Oct 08. 2020

로제타스톤

이집트 문명의 비밀을 풀다.

이제 1층 4 전시실로 내려가서 <로제타 스톤>을 감상하자.


처음 이집트 문명을 접한 유럽인들은 웅장하고 거대한 이집트의 유적과 유물을 눈으로 볼 수 있었지만 그 속에 담긴 뜻을 알 수 없었다. 무덤 안의 벽화나 탑에 새겨진 이집트 상형문자를 해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를 해결한 것이 바로 로제타스톤이다. 로제타스톤은 1799년 나폴레옹 원정군이 알렉산드리아에서 동쪽으로 60km 떨어진 로제타 마을에서 발견하여 프랑스로 가지고 오던 중 1801년 알렉산드리아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영국군에게 패하면서 유물을 빼앗겨 지금 대영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로제타스톤에는 같은 내용의 문장이 각기 다른 세 가지 글자로 새겨져 있다. 이집트 상형문자와 민중 문자 그리고 그리스어이다. 당시 사람들은 셋째 단의 그리스어를 번역해보니 그 내용이 기원전 196년 이집트 신관들이 프톨레미 왕의 공덕을 찬양하는 글임을 확인하고 기쁨을 감출 수가 없었다. 같은 내용을 위 단의 상형문자에 대비하여 적용하다 보면 이제 이집트 상형문자를 푸는 일은 시간문제라고 생각하였다.




당시 영국과 프랑스에 있는 고고학자와 역사학자 그리고 언어학자들이 이 일에 매달렸다. 하지만 그들은 한 글자도 해석할 수 없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이집트 상형문자를 표의문자로 보고 해석했기 때문이다. 표의문자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문자로 예를 들어 매는 왕을 상징하고 연꽃은 포로를 상징한다고 생각하였다.


1822년 프랑스의 언어학자 샹폴리옹은 이집트 상형문자가 표의문자가 아니라 영어의 알파벳처럼 표음문자인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타원 형안에는 왕의 이름이 새겨진 것을 착안해 27명의 파라오의 이름을 해독하던 중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M과 SS까지 풀고 앞에 놓인 태양 그림 대신 태양신 이름인 RA라고 놓고 이집트 이에서 가끔 생략되는 모음 E를 집어넣자 RAMSES가 되었다. 그는 외쳤다.



아 그 유명한 람세스 왕의 이름이 아닌가.



이로 인해 2m도 안 되는 이 조그만 돌덩이로 인해 마침내 신비에 싸여 있던 이집트 문명이 세상으로 나오게 되었다. 


이제 로제타스톤으로 알게 된 이집트 조각상들을 계속해서 감상하자.



이집트 문명은 크게 고 왕국 중 왕국 신 왕국으로 나누어진다. 고 왕국은 기원전 3100년 전부터 나메르 왕이 상하 이집트를 통일하면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중 왕국시대를 지나 기원전 1500년경부터 신 왕국이 시작된다. 신 왕국은 이집트 3천 년 역사 중에서 가장 번창했던 시기로 18 왕조의 첫 왕인 아모세가 이집트를 재통일하면서 시작한다. 이후 아멘호테프 1세를 지나 투트모스 1,2,3세로 이어진다.


이 중 투트모스 3세는 이집트의 나폴레옹이라 불릴 정도로 위대한 파라오였다. 그의 너무 어려서 파라오가 되어 처음에는 그의 계모인 하셉수트가 섭정하였지만 그녀의 사후 레반트로 이집트를 확장한 강력한 파라오가 되었다. 기원전 1386년에 태어난 아멘호테프 3세는 투트모세 3세의 아들이었다. 또한 그는 이집트 역사상 최고의 이단아로 불리는 아멘호테프 4세 즉 아크나톤의 아버지였다.


기원전 1400년경 열두 살의 나이에 즉위한 아멘호테프 3세는 그의 아버지가 이루어 낸 성과로 이집트 역사상 가장 번영한 이집트를 물려받았다. 하지만 그는 정치에 관심이 없었으며 모든 것을 제사장과 관료에게 맡겼다. 그가 평생 추구한 외길은 여자와 술 그리고 놀이였다.


그는 정비 외에도 10명가량의 비를 거느렸고 그것도 모자라 3백 명의 여인들을 항시 대기시켰다. 더욱 기가 막히는 것은 오십 가까운 나이에 미타니 왕국의 국왕에게 6년을 졸라서 열다섯 살 소녀인 왕녀를 막대한 보물을 주고 데려온다. 그 소녀가 훗날 자식의 왕비가 되는 네페르티티로 이집트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왕비로 이름을 날린다.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아멘호테프 3세의 조각상은 부처님처럼 인자한 모습을 하고 있다. 두상만 3미터로 온전한 조각이었다면 대영박물관을 뚫고 나갈 정도의 압도적인 크기이다. 옆에 전시된 팔만 보아도 그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 아멘호테프 3세는 단 것을 너무 먹어 대는 통에 이가 흔들리고 잇몸에서 고름이 나오는 병에 시달렸고 결국 그 병으로 병상에 앓아누운 채 숨을 거둔다. 이때 네페르티티의 나이는 불과 17 살이었다. 그는 죽기 직전에 둘째 아들인 아멘호테프 4세에게 왕위를 계승하는데 그가 바로 이단 왕인 이크나톤이다.


이크나톤은 아버지 대에 힘이 세어진 제사장과 관료들을 제압하기 위해 유일신을 섬기고 수도를 옮기는 등 기존 체제를 혁신하려 하였으나 성과를 내지 못하고 몰락의 길을 걸었다. 아멘호테프 4세의 아들은 투탕카멘으로 그의 시대에 18 왕조는 막을 내린다.


다음으로 <람세스 2세 동상>을 감상하자.



18 왕조가 무너지고 19 왕조는 람세스 1세가 세웠다. 이어 세티 1세로 이어지다가 우리가 잘 아는 람세스 2세에 의해 강력한 왕국을 건설한다. 하지만 이후 세티 2세로 이어진 19 왕조 역시 쇠락한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이집트 31 왕조 시대에 페르시아의 지배에 들어가면서 이집트 왕조의 시대의 막을 내린다.


그 후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 대왕의 휘하 장수이던 프톨레마이오스가 왕조를 열어 프톨레마이오스 15세와 클레오파트라까지 이어지다가 로마와 비잔틴 제국 그리고 오스만튀르크의 영향 하에 식민지로 전락하다가 현대의 이집트로 이어진다.


기원전 1279년부터 67년간 이집트를 지배한 람세스 2세 조각상은 무게만 7.5톤에 달한다. 조각상이 너무 무거워 머리 부분과 몸 부분을 따로 나누어 가져왔다고 한다. 람세스 조각상의 아래 부분은 아직 테배 신전에 남아 있으며 지금 조각상의 아래 부분은 다른 조각상의 몸통이다. 몸통 중앙에 구멍이 난 이유는 이집트에서 영국으로 옮겨오기 위해 쇠막대기를 끼워 운반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이집트를 지배한 제19 왕조의 대왕인 람세스 2세는 어릴 적부터 아버지를 따라 전쟁에 참여하였으며 스무 살에 반란군을 지휘하는 등 전쟁 경험이 풍부했다. 스물다섯의 나이에 왕위에 오른 그는 치세와 정복에 치중하였다. 특히 그는 팔레스타인을 사이에 두고 히타이트와 벌인 카네시 전투에서 맹활약을 펼쳤다. 2만 명의 정예부대를 이끌고 나선 람세스 2세는 4만 명이나 되는 히타이트와의 불리한 전투에서 전차를 타고 직접 적진에 뛰어들며 용맹한 모습을 보여주어 전세를 역전시키기도 하였다.


전투의 결과에 대해서는 이집트와 히타이트의 설명이 서로 다르며, 양쪽 모두 자기들이 승리했다고 기록하지만 오늘날 역사학자들은 대체로 히타이트가 승리 내지는 우세한 상황에서 끝난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불리한 상황에서도 람세스 2세는 세계 최초의 평화조약을 이끌어내는 리더십을 발휘하였다.


람세스 2세는 전쟁과 더불어 건축 사업에 열중하였다. 그는 아문 신을 숭배하는 룩소르 신전과 카르나크 신전 그리고 아부심벨 신전을 건축하여 자신의 이름을 영원히 아로새기고자 하였다. 그리고 오늘날 그의 소원은 이루어졌다. 모든 사람들이 람세스 2세를 기억한다. 그가 신전을 공사하면서 히브리 인들을 동원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이 사건을 성경 속에서 이야기하는 모세의 출애굽의 시작으로 추정하는 학자들도 많다.


람세스 2세는 역사상 가장 화려한 여성 편력의 소유자였다. 그는 정부인 네페르타리를 비롯하여 50명이 넘는 아내와 200명이 넘는 자녀를 가졌다. 훗날 람세스 2세의 미라가 발견되어 분석해 본 결과 그는 매부리코에 붉은 머리카락을 가졌으며 키는 165센티미터였다고 한다. 람세스 2세 사후 이집트는 본격적인 쇠락의 길로 접어든다.


이어서 <왕들의 계보>를 감상하자.



기원전 1250년 람세스 2세에 의해 만들어진 왕들의 계보는 카르투수라 불리는 타원형 테두리 안에 34명의 왕들이 기록되어 있다. 왕들의 족보에서 18 왕조 시대의 4명의 왕인 아멘호테프 2세와 3세 그리고 이크나톤으로 불리는 아멘호테프 4세와 투탕카멘의 이름이 훼손되어 있다.


이들 4명의 왕들 중 아멘호테프 4세는 이집트 전통 종교인 다신교를 버리고 일신교로 변혁을 꿈꾼 왕으로 후대에 그의 아버지와 아들들까지 파라오로서의 지위를 지우려고 파괴했다고 한다. 아비도스 신전 유적지에서 발견된 왕들의 이름에서 람세스 2세의 이름도 보인다.


다음은 <고양이 청동상>과 <쇠똥구리 석상>을 감상하자.



고양이는 고대 이집트인들이 신성시했던 동물 중 하나로 쌀을 훔쳐먹는 쥐를 잡아먹는 동물로 풍요의 상징이고 새끼를 많이 낳아 다산의 상징이었다. 이집트에서 고양이 머리를 한 여신을 <바스테트>라고 부른다. 이는 암사자 머리를 한 사나운 여신인 <세크 메트>와 한 몸으로 그중 온순한 면이 발현된 것으로 태양신 라의 부인이면서 딸로도 알려져 있다.


고양이 청동상은 절대 권력을 상징하는 반지를 코에 끼고 있으며 고양이의 이마에는 부활을 상징하는 쇠똥구리가 있고 목걸이에는 보호와 충성을 의미하는 호루스의 눈이 보인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쇠똥구리의 습성을 신비하게 생각하였다. 포유동물의 배설물로 공 모양을 만들어 그것을 굴리는 쇠똥구리의 모습을 보면서 공은 태양을 쇠똥구리는 태양의 운행을 상징하는 신인 태양신 케프리와 동일시되었다. 이 때문에 풍뎅이는 태양 재생과 부활의 상징으로 숭배되었다.



이집트 사람들은 죽음을 삶의 연장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현세를 죽음을 준비하는 시간으로 여겼기에 신체를 신성시하며 보존했다. 또한 죽음을 미학적으로 승화시켰다. 그들은 메멘토 모리 즉 늘 죽음을 염두에 두면서 오늘 하루의 삶을 정의롭고 소중하게 살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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