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카제국의 수도
해발 3,300m의 고산에 건설된 잉카제국의 수도인 쿠스코는 하늘과 가까운 거리에 있어 비행기가 하강 준비를 하자마자 착륙하는 진귀한 경험을 여행자에게 제공한다. 공항에서 15분 거리에 있는 쿠스코의 중심인 아르마스 광장으로 가면 스페인 제국의 상징인 대성당이 자리 잡고 있으며 광장 중앙에 스페인에 항거하다 이곳에서 처형된 투팍 아마루 2세의 동상이 대성당과 마주하고 있다.
아르마스 광장에 있는 대성당은 잉카제국시대의 비라코차 신전위에 지은 것으로 1550년에 건축이 시작되어 100년이 지나서야 완성되었다. 또한 1689년에 제작된 대성당의 종탑은 남미에서 가장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성당 내부로 입장하면 300 톤의 금과 은을 들여 지은 화려한 주 제단과 400여 점의 종교화가 관람자를 압도한다. 그중 마르코스 사파타가 그린 <최후의 만찬> 이 가장 눈길을 끈다.
사파타의 <최후의 만찬>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림의 오른쪽 아래에 관람자를 응시하는 사람이 바로 예수를 배신한 유다이다. 그런데 화가는 유다의 얼굴에 스페인의 침략자인 피사로의 얼굴로 그려 넣어 침략자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고 있다.
또한 만찬의 진행되는 식탁에 메인 요리로 쥐과의 일종인 기니피크를 구운 <꾸이>가 보이는데 이는 소와 돼지가 없던 잉카 시절에 이 지역 사람들이 즐겨 먹었던 고급 요리 중 하나로 남미 사람들이 가톨릭을 자신들의 전통과 결부해서 받아들였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특히 이는 대성당 제단에 있는 성모 마리아의 모습을 보면 확연해진다.
제단화 중앙에 있는 성모는 스페인 침략전 자신들이 믿었던 태양신의 왕관을 쓰고 대지의 신을 상징하는 옷을 입고 있으며 얼굴색도 백인이 아니라 자신들과 같은 색을 띠고 있다. 당시 잉카의 후예인 인디오들은 정복자의 강요에 의해 성당에 갔지만 그들 중 상당수는 가톨릭 신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예수와 성모 마리아상을 바라보면서도 그들이 지금까지 믿어왔던 잉카의 어린 왕자와 대지의 여신인<파차 맘마> 로 생각하고 예배를 올렸다. 당시 가톨릭은 이를 받아들여 성화와 조각상에 인디오 신들의 상징을 넣는 것을 허용하였다.
대성당 오른편에 보이는 라 콤파니아 데 헤수스 성당은 잉카제국의 11대 황제였던 <우아이나 까빡>의 궁전 위에 지은 것으로 아름다운 제단과 내부장식으로 유명하다.
아르마스 광장에서 트리운포 거리를 따라 동쪽으로 가면 잉카의 석조 건축의 백미라고 하는 <12 각돌>이 나온다.
골목을 따라 조금 들어가면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 바로 <12 각돌>이 있는 장소이다. 석벽에 박혀있는 돌로 면도날 하나 들어갈 틈이 없게 딱 맞추어 석벽에 박혀있는 12각돌의 각을 세어보면 12각이 나온다.
주위의 돌과 하나가 되기 위해 세밀하게 잘라낸 <12 각돌>은 당시 잉카가 세계 최고의 석공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제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는 코리칸차 신전으로 이동하자. 고도가 높아 천천히 걸어야 한다.
쿠리칸차에 대한 전설은 다음과 같다.
지금의 페루의 남쪽 지방 푸노의 티티카카 호수 주변에 사는 백성들이 살기가 어려워지자 태양신은 그의 아들 망코카팍에게 황금 봉을 주면서 북쪽으로 가라는 명령을 한다. 망코카팍은 백성들을 데리고 북쪽의 어느 계곡에 정착했는데 그곳이 오늘날 쿠스코였다고 한다.
이후 영토가 점점 넓어져 9대 황제 코리칸차에 이르러 잉카 제국은 전성기를 맞았다. 당시 코리칸차는 태양신전의 외벽을 황금 띠로 장식했으며 신전에서 일하는 수녀들의 방을 금과 은으로 된 꽃병과 가구들을 장식하였다. 또한 선대의 미라를 꺼내 황금 마스크와 호화로운 목걸이 그리고 순금으로 된 망토를 입혀 황금 관에 안치했다.
16세기 중엽 태양의 신전을 점령한 스페인 군은 이곳에 장식된 금과 은이 적어도 6톤에 이른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 스페인군은 모든 금을 모아 용광로에 녹여 금괴를 만들어 스페인으로 가져갔으며 이로 인해 당시 스페인 경제가 급격한 인플레이션에 시달렸다고 한다.
신전으로 들어가면 5개의 방이 보인다. 이 곳에 잉카 마지막 황제 아따우알파가 감금되어 있었다. 피사로는 황제에게 황금을 가져오라고 협박을 하였으며 황제가 거절하자 이 방에서 그를 죽였다. 이후 정복 군들은 태양 신전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신전위에 산토도밍고 교회를 세웠으나 1650년 쿠스코 대지진으로 무너졌고 지금의 형태로 복원하여 관광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신전 벽에는 잉카인의 우주지도가 전시되어 있으며 신전 바닥에는 작은 돌로 만들어 놓은 옛 길이 그 모습을 간직한 채 전시되어 있다.
잉카 인들에게 천문학은 농사를 짓고 태양신을 섬기기 위해 매우 중요했다. 그들에게 잉카 황제는 태양의 아들로 인식되었으며 달과 별자리는 신의 세계로 인식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신의 세계를 그린 우주 지도를 제작하였으며 오늘날 우리는 그 모습을 감상할 수 있다.
이제 마지막 여행지로 삭사이와만으로 이동하자
쿠스코 동쪽의 해발 3,700m에 위치한 삭사이와만은 원주민 언어로 <당당한 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잉카 부족이 들어오기 전에 쿠스코에는 현지 원주민인 키르케 인들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서기 900년부터 잉카인들이 들어온 1200년까지 이 이 지역을 지배했었다. 키르케 인들이 건설한 삭사이와민은 잉카제국 시절에 그 규모를 확장한 것으로 고대의 사원과 군사시설이 있었던 요새형 신전이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삭사이와만 건설에 사용된 석제들은 채석장에서 자갈을 이용하여 대충 깎은 다음 동아줄을 이용하여 삭사이와만까지 가져왔다. 그리고 잉카제국의 건축가에 의하여 정교하게 다듬어 쌓았다고 한다.
고대 삭사이와만에서 9일 동안 진행된 태양제 행사에는 다양한 의상을 입은 참가자들이 춤과 행진으로 대자의 신 파차마마에게 감사를 드리며 풍년을 기원했다고 한다. 지금도 해마다 6월이면 이곳에서 잉카의 후예들이 전통복장을 입고 태양제를 지낸다.
삭사이와만 요새는 잉카의 군사들이 스페인 군대에 대항하여 최후의 항전을 벌인 곳으로 스페인 군대가 삭사이와만의 출입구를 봉쇄하자 식량과 물을 공급받지 못한 잉카군은 결국 궤멸되었다.
이후 스페인의 정복자들이 잉카의 신전위에 성당을 건축하기 위해 삭사이와만 요새의 바위를 사용하는 바람에 삭사이와민은 원래의 모습을 많이 잃어버렸다. 하지만 아직까지 남아있는 세 개의 성벽 가운데 가장 큰 것은 높이가 6m에 길이 400m에 달하며 옛 잉카제국의 위용과 자부심을 보여준다.
삭사이와만 요새에서 조금 가면 쿠스코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미라도르 전망대가 나온다. 스페인 침략 시절에 가톨릭으로 개종할 것을 거부한 잉카인들이 이곳에서 모두 학살당했다. 이곳에 세워진 높이 8m의 예수상은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이곳으로 피난 왔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브라질 2대 도시인 리우에 있는 예수상을 모델로 하여 제작한 것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