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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봉기 Nov 20. 2020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2

유럽 및 미국 전시관

이집트 전시실을 나와서 박물관 중앙에 있는 유럽 조각과 장식 미술관으로 이동하자.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작품은 <메두사의 머리를 벤 페르세우스>이다.


이탈리아 신고전주의 대표 조각가인 안토니오 카노바의 작품인 이 조각상은 카노바가 바티칸에다 만든 동일한 조각상을 조금 정교하게 다듬어 복제하여 만든 것이다.



아르고스의 왕 아크리시오스는 자식이 외동딸인 다나에만 있었다. 그는 델포이 신전에서 딸이 낳은 외손자의 손에 죽게 될 것이라는 무서운 신탁을 받았다. 이 때문에 아크리시오스는 다나에를 탑 안에 가두어 그 안에서만 지내게 했다.하자만 제우스가 황금색 비로 몸을 바꾸어 잠입하여 다나에와 관계하여 페르세우스를 낳았다. 깜짝놀한 그의 조부 아크리시오스는 다나에와 그 아들을 궤짝에 넣어 바다에 띄워 버렸는데 궤짝이 세리포스 섬의 한 어부가 발견하고 두 모자를 그 나라의 왕 폴리덱테스에게 바쳤다.


이후 세리포스 섬의 왕은 다나에를 연모하게 되고 이에 방해가 되는 페르세우스를 제거하기 위해 고르고 자매   명인 메두사의 목을 가져오라고 명령한다. 이에 페르세우스는 아테나가 빌려준 방패와 헤르메스가 빌려준 날개 달란 구두를 신고 메두사를 찾아가서 직접 얼굴을 보면 돌이되기에 메두사를 직접 바라보지 않고 방패 속에 비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달려들어 머리를 베어 버리는데 성공한다. 카노바의 페르세우스 매끈한 웅장함을 통해 신고전주의의 영웅적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다음은 장 바티스트 카르포의 <우골리노와 그의 자식들>을 감상하자.



우골리노는 13세기 이탈리아 피사의 귀족으로 대주교 루지에리와 짜고 권력을 잡으려고 했으나 전세가 불리해지자 루지에리는 우골리노를 배반하게 된다. 그리고는 우골리노와 그의 아들들을 감옥에 가두고 열쇠를 아르노 강에 던져 버렸다. 결국 갇힌 우골리노는 아이들이 굶주리는 모습을 지켜만 보아야만 했으며 아들이 한 명씩 죽자 죽은 아들의 시체를 먹어야 하는 자를 고민하며 자신의 입을 찢으며 괴로워했다. 결국 우골리노는 배고픔에 못 이겨 죽어간 자식들의 시신을 먹는 끔찍한 죄를 저지른다.


단테의 소설 신곡에서 우골리노와 그를 배신한 루지에르는 지옥의 얼음 구덩이 속에 얼어붙어 있었다. 우골리노는 루지에리의 뒤통수에 바짝 붙어 루지에리의 뒤통수를 깨물어 먹고 그의 머리카락을 한 움큼 뽑아 입을 닦았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배신을 저지르면 육체는 곧 악마의 손에 빼앗기고 만다. 그 뒤부터는 수명이 다할 때까지 악마가 육체를 지배하고 죽은 후 영혼은 곧장 이 지옥으로 떨어져 온다.


이 작품의 작가인 카르포는 1854년 로마에 유학하여 미켈란젤로에게 깊은 감명을 받았으며 메디치 가에 체류하면서 작가로서의 명성을 쌓았다. 그는 인간의 모습을 사실적이며 생생하게 묘사하였으며 그에 의해 조각된 인체에는 생명력과 활력이 넘쳤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1층에는 고대 이집트와 유럽 조각관 외에 많은 관광객의 발길을 사로잡는 무기와 갑옷관이 있다.



이 곳에 전시된 전시물들은 대개 16세기나 17세기 유럽에서 전쟁에 나간 기사나 말을 위해 만들어진 갑옷들이 대부분이다. 특히 영국의 왕 헨리 8세의 갑옷 등 왕족과 귀족의 갑옷들이 다수 소장되어 있어 많은 여행자들의 인기를 얻고 있다.



1527년 헨리 8세를 위해 만들어진 이 갑옷은 헨리 8세에 의해 런던의 프랑스 대사에게 선물로 주었다. 이후 대사가 사망하자 친구에게 넘어갔다가 그 친구의 후손들이 1919년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판매하여 지금 이 곳에 전시되어 있다.


강철과 금 그리고 가죽으로 만들어진 이 견고한 갑옷의 가슴판에는 창 받침대가 부착되어 있어 전쟁 중에 창을 겨드랑이에 끼고 수평으로 들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장갑의 왼쪽은 창을 들고 오른쪽은 칼을 드는 용도로 만들어졌다. 그 외 남성의 생식기 보호구는 1927년 폴란드의 라즈비 왕자가 기증한 것이라 한다.



갑옷에서 무엇보다도 인상적인 것은 정교하게 세공된 가슴판으로 코끼리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왕의 군사적 승리와 뛰어난 재능 즉 그의 지성과 웅변을 상징한다.


이제 미국 전시관으로 이동하자.



미국 전시관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전시실은 큰 원형 모양의 735번 갤러리이다. 반델린 파노라마라고 이름 붙여진 이 공간은 미국의 신고전주의 화가 존 반델린이 수 많은 스케치를 통해 그린 베르사유 궁전과 정원이 파노라마 형식으로 전시되고 있다.  


미국 전시실의 정 중앙에는 찰스 엥겔하드 코트가 있다. 미국인 사업가인 찰스 엥겔하드는 국제적인 금속 광산을 소유했던 갑부로 그가 막대한 기부금을 내어 이 공간을 만들었다.



이곳에서 가장 인상적인 작품은 중앙에 있는 다이애너 상이다. 정교한 형태와 금박을 입힌 표면으로 아름답게 조각된 다이애너은 관람자의 마음과 상상력을 사로잡는다.


사냥의 여신인 다이애너는 고대 신화에서 높은 산과 신성한 숲에 사는 신성한 존재로 알려져 있다. 원래 이 작품은 매디슨 스퀘어 가든의 꼭대기에 설치된 풍향계로 5미터 정도 크기로 제작되었다. 하지만 너무 커서 바람에 따라 돌지 않아 결국 4미터 정도로 줄였으며 그 원본 조각상은  필라델피아 미술관에 있다. 여기 있는 조각상은 2미터로 다시 다시 만든 것이다.


다이애너의 동상 뒤로 보이는 신고전양식의 건물은 미국관으로 원래 작은 정원을 사이에 두고 지어진 별도의 건물이었다. 그런데 박물관이 통합되자 건물의 앞면을 뜯어 지금처럼 전시하고 있다.



그리고 남쪽 벽면에는 미국의 대표적인 공예가인 티파니가 디자인한 이국적인 출입문이 서 있다. 이 문은 뉴욕 롱아일랜드에 위치한 티파니의 집인 로렌트 홀에 있었던 것을 가져와 장식하였다고 하는데 이국적인 스테인드글라스와 기둥들이 인상적이다. 특히 기둥은 연꽃, 모란, 양귀비, 목련으로 이루어진 세라믹 꽃들과 녹색 유리 조각으로 이루어진 줄기로 구성되어 있다. 1957 년 화재로 일어나서 집이 무너지자 폐허에서 기둥들을 회수하여 지금 여기에 전시하고 있다고 한다.


이제 19세기부터 현재까지 미국 부유층에게 큰 영향을 주었던 프랑스의 귀족인 태세 저택의 살롱을 감상하자.



18세기 프랑스 로코코 양식의 살롱을 재현한 태세 저택의 응접실은 당시 사용했던 가구와 카펫 그리고 벽의 몰딩과 장식품들로 꾸며져 있다. 로코코 양식은 루이 14세의 통치 말기에 시작하여 루이 15세에 번성한 양식이다.


1715년 태양왕 루이 14세가 죽자 왕위는 그의 손자인 루이 15세가 물려받지만 그의 나이 5세였다. 그래서 루이 14세의 동생의 아들인 필립 2세가 어린 왕을 대신 해 섭정을 하게 되는데 그는 처음 한 일이 베르사유 궁전을 벗어나 파리로 이사 오는 것이었다. 그의 뒤를 이어 교외 생활을 벗어나 도시로 오기를 열망했던 수많은 귀족들이 파리로 이사 오면서 로코코 스타일로 저택을 짓기 시작하였다.


당시 귀족의 저택은 사교의 장소로 거의 매일 밤 파티와 음악회 그리고 무도회가 열렸으며 이런 행사는 살롱이라는 거실에서 이루어졌다. 이 곳에 있는 태세 저택은 당시 루브르 박물관 바로 맞은편에 있는 집에 있던 장식을 그대로 재현하여 전시하고 있다. 살롱 벽의 장식과 가구 그리고 샹들리에는 당시 귀족들의 화려한 생활을 보여주고 있다.



최근 공개된 미국의 대통령인 트럼프의 펜타하우스 역시 프랑스의 화려한 바로크 양식과 로코코 양식으로 실내 공간을 장식하였다. 이는 트럼프가 자신과 국민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좋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와는 달리 현대를 상징하는 단순미와 자연과의 조화를 강조한 미국의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만든 집을 감상하자.



미국 위스콘신주에서 태어난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일생동안 800여 개의 작품을 발표하면서 일관된 건축 철학을 보여주었다. 그는 건축물은 주변 환경과 호흡할 정도로 어울려야 하며 건축물의 내부와 가구 역시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 환경과 조화로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곳 박물관에 전시된 집은 1903년 라이트가 프랜시스 리틀을 위해 미네소타 교외에 지은 집으로 창틀과 천장에 보이는 선들은 집 밖의 숲 속에 존재하는 식물형태로 장식되어 있다. 또한 모든 실내 인테리어는 떡갈나무를 사용하여 자연과 거실 실내가 분리된 공간이 아니라 연속된 공간으로 만들었다. 또한 중앙의 난로에서 발연되는 따뜻함을 표현하기 위하여 낮게 깔린 지붕과 폭넓게 드리워진 처마 그리고 투명한 창문으로 집을 지었다.  


1932년 프랜시스 리틀이 사망하자 그의 부인은 이 집을 딸에게 주지만 그녀는 집을 유지할 비용이 없어 1972년 집을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 팔았다. 박물관은 집을 해체해서 거실은 지금 이 곳에 전시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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