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탄불의 가장 화려한 궁전인 돌마바흐체 궁전은 1814년의 대화재로 대부분 불타자 31대 술탄인 압둘 마지드 1세에 의해서 1856년에 석조건물로 재건되었다.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을 모델로 지은 궁전은 외국 사신을 영접하기 위해 지은 궁전으로 쓰러져가는 오스만 제국의 부와 마지막 힘을 과시하려는 목적에서 매우 호화롭고 대규모로 건축되었다. 이곳에서 오스만 제국 후기 술탄 6명의 업무와 생활이 이루어졌다.
바다를 메운 곳에 세워져 <가득 찬 정원>이라는 뜻의 돌마바흐체 궁전의 입구를 지나면 아름다운 정원이 나온다. 수 천 종의 나무와 꽃들이 피어 있는 정원에는 백조가 무리 지어 입으로 물을 뿜어내고 있는 백조 분수가 있어 잠시 마음을 뺏기기에는 충분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돌마바흐체 궁전은 중앙 연회장을 중심으로 왕의 집무실이 있는 셀람륵과 술탄의 가족과 여성들의 공간인 하렘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285개의 방과 43개의 홀 그리고 6개의 발코니와 하맘이 있다. 각자의 방과 홀은 280개의 화병과 156개의 시계 그리고 36개의 샹들리에로 장식되어 있다.
궁전 입구로 들어가면 중앙 홀이 나온다. 배를 타고 궁전에 도착하면 바로 접근할 수 있는 곳에 자리한 중앙홀은 외국의 대사들에게 오스만 제국의 위용과 부를 과시하기 위해 반짝이는 크리스털 난간과 샹들리에로 장식하였다.
중앙홀의 크리스털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황제의 접견실이 나온다.
가로와 세로가 각 40m이며 중앙 돔의 높이가 36m인 황제의 접견실은 14만 톤의 금으로 장식한 천장에 4.5톤의 샹들리에와 750개의 촛대로 장식되어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금치 못한다. 천장에 매달린 샹들리에는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 선물한 것으로 세계 최대의 샹들리에로 살짝 열린 창문으로 미풍이 불면 샹들리에의 장식끼리 부딪혀 마치 악기를 연주하는 것처럼 아름다운 소리가 난다고 한다. 이외에 황제의 접견실에서 여행자의 이목을 끄는 것은 흥미로운 접견실 바닥의 카펫이다. 유럽에서 가장 큰 이 카펫은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헤레케의 에서 만든 것이라 한다.
황제의 접견실의 위층에는 오케스트라와 외국사절들이 자리하고 아래층 중앙에 술탄이 앉았으며 그 맞은편에는 신하들과 남성들이 자리했다. 여성들은 실내로 들어오지 못하고 술탄의 맞은편 창문에 서서 방을 구경하게 되어 있었는데 술탄 이외에 남자의 얼굴을 볼 수 없도록 하였다.
왕의 접견실을 나와 궁전 정원을 지나면 하렘이 나온다.
하렘으로 입장하면 처음 만나는 방이 제26대 술탄인 압둘 아지즈 방이다. 1861년 돌마바흐체 궁전을 지은 압둘 마지드의 동생인 그는 형이 사망하자 술탄이 되었으며 탄지 마트 개혁을 계속 추진하려 하였으나 이미 때는 늦어 있었고 결국 실의 속에 세상을 떠났다고 한가. 그의 치세 속에 오스만 제국은 해외의 정복 영토를 하나둘씩 잃어가며 쇠퇴의 길만을 걸었을 뿐이었다. 그는 형의 아들 무라트 5세에게 제위를 물려준 뒤 자살하였다.
다음 방은 연회장인 블로 홀이다.
블루 홀은 이슬람 축일에 술탄의 어머니가 술탄의 부인과 애첩을 초대하는 방으로 하렘에서 중심이 되는 곳이다. 푸른색 커튼, 푸른색 의자, 청자가 특징인 이 곳에서 순금 밥그릇과 산호 손잡이 그리고 유럽 최고의 크리스털 접시 등 화려함의 극치를 맛볼 수 있다.
블루홀과 핑크 홀 사이에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의 방이 있다.
터키의 초대 대통령인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는 돌마바흐체 궁전을 대통령 관저로 사용하였으며 1938년 11월 10일 아침 9시 5분에 이 곳에서 숨을 거두었다. 고인을 기리기 위해 궁전의 모든 시간은 그의 사망시간인 9시 5분에 맞추어져 있다.
제1차 세계 대전 발발하자 아타튀르크는 오스만 제국이 참전하는 것을 반대하였지만 결국 오스만 제국은 전쟁에 참전하자 아타튀르크도 역시 어쩔 수 없이 전선에 나선다. 당시 대령으로 진급한 아타튀르크는 영국군이 갈리폴리 상륙작전을 실행해 오스만 제국을 공격하려고 하자 이를 성공적으로 막아내는 전공을 세우며 군 지휘관으로서 명성을 떨쳤다. 이 공로로 장군이 되었으며 1923년 10월 29일 터키 공화국 수립과 같이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새로 성립된 터키 공화국에서 강력한 정치와 종교를 분리하였으며 세속주의 정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1924년에는 1300여 년간 지속된 칼리파 제도를 없앴고, 미국인 교육 개혁자인 존 듀이를 초빙해 자문을 얻고 여성교육 및 근대교육 정착에 힘썼다. 또한 1925년에는 모자 및 복식 법을 통과시켜 구시대의 상징인 페스와 히잡의 착용을 금지시켰으며 서구식 정부 제도를 받아들였다. 오늘날 그가 없는 오늘날의 터키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그는 많은 국민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다.
다음은 마자막으로 핑크 홀을 감상하자.
술탄과 황후가 귀한 손님을 맞이하는 핑크 홀은 커튼 장식이 화려하고 핑크빛이어서 핑크 홀이라 부른다. 블루홀과 더불어 핑크 홀은 당시 황후의 높은 예술성과 화려함을 보여준다.
핑크 홀을 마지막으로 하렘을 나오면 아름답게 장식된 바다의 문이 보이며 그 문으로 떠난 오스만 제국의 마지막 황태자가 떠오른다.
17세기 중반 유럽의 최강국이었던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를 공격하면서 오스만 제국은 최고의 정점을 찍었다. 그러나 1683년 비엔나에서 일어난 합스부르크와의 전쟁에서 패하면서 술탄과 관료들은 물론 군인들까지 이스탄불로 돌아왔다. 하지만 이스탄불로 돌아온 사람들은 욕구를 채우기에 급급했으며 방탕한 생활을 이어갔다. 끊임없이 이어진 방탕한 생활은 그 욕구를 채울 외부적 공급이 줄어들자 내분으로 치달았고 그 사이 500년간 영토 회복의 기회를 엿보았던 유럽 국가들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100년간의 힘겨루기 끝에 1789년 프랑스의 나폴레옹이 이집트를 공격함으로써 힘의 균형은 오스만 제국에서 유럽 국가들에게로 기울어지고 결국 거대한 오스만 제국은 1차 세계 대전에서 패망함으로써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리고 독립 전쟁의 영웅 케말 아타튀르크에 의해 터키 공화국으로 새롭게 탄생한다.
1924년 터키 공화국은 술탄을 비롯한 술탄의 가족을 터키에서 추방한다. 터키 정부는 이들을 추방하면서 24시간 안에 터키를 떠날 것과 재산은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할 것을 요구했으며 터키 국민의 자격이 없는 것은 물론 남자들은 앞으로 50년간, 여자들은 28년간 터키로 돌아올 수 없는 법까지 만들었다.
파리에 정착한 오스만 황족은 몇 달 만에 가진 재산을 탕진하고 제국의 마지만 황태자 오르한은 일자리를 찾아 헤매다가 결국 파리에서 17세의 나이에 브라질로 건너간다. 그곳에서 그는 주물공장 직원과 선박 화물 인부 등을 하였으나 역시 정착하지 못해 다시 이집트로 간다. 이집트에서 그의 처지를 동정한 이집트 왕자의 도움으로 자동차를 산 그는 장거리 택시기사가 되어 생계를 유지했다.
하지만 오스만 터키 제국의 황태자가 택시 운전사라는 사실은 언론의 관심이 되었고 그는 자동차를 팔고 전업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 뒤 자동차 배달부 일을 한 황태자는 교통사고를 당해 몸까지 망가져 일을 그만두고 다음 페루로 건너가지만 그곳에서도 정착할 수가 없어 다시 파리로 돌아와 1957년부터는 파리에서 미군용사의 묘지를 안내하는 일을 하게 되었다.
오스만 터키 제국의 마지막 왕손이라는 굴레를 자식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아 평생 독신으로 산 오르한은 돌아갈 수 없는 조국을 방문하고 싶다는 소원을 언제나 안고 살았다. 그래서 시간이 있을 때마다 파리 오를리 공항에 있는 카페에 앉아 이스탄불로 향하는 비행기를 보며 20년을 매일같이 커피를 마셨다고 한다. 이런 사실이 신문을 통해 우연히 터키 국민들에게 알려지고, 황태자가 죽기 전에 조국을 방문할 기회를 주자는 동정 여론이 일어나자 정부도 임시 법을 통과시켜 그를 조국으로 초청했다.
돌마바흐체 궁전에서 태어나고 그곳에서 성장한 오르한이 터키에서 추방당한 것은 그의 나이 15세 때이다. 그가 터키로 돌아와 돌마바흐체 궁전을 다시 찾은 것은 그의 나이 83세가 되던 해로 일주일 동안 그의 모습이 생중계되었다. 성성한 백발에 주름이 깊게 파인 촌로 같은 황태자의 모습에 많은 이들은 슬픔과 연민을 느꼈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가고 다시 파리로 돌아갈 시간이 되자 시민들은 아쉬워했다. 비록 황태자가 나라를 잃은 황실의 적통이지만 당시 여덟 살의 황태자에게 모든 역사적 책임을 전가하는 것은 지나치다는 여론이 우세했다. 또한 터키가 발전해 국제사회의 인정을 받고 있는 만큼 그가 여생을 조국에서 보낼 수 있도록 하자는 여론도 압도적이었다. 결국 터키 정부는 국민들의 뜻을 존중해 그에게 별장을 마련해 주고 여생을 편히 지낼 것을 정중히 요청하지만 그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며 거절한다.
나는 나라를 잃은 죄인입니다. 더욱이 80년 동안 이 나라에 세금 한 푼 내지 않았습니다. 내가 어떻게 다시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살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오스만 제국의 자존심과 명예에 흠집을 내는 일입니다. 여러분의 용서와 사랑만으로도 저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그는 파리로 돌아와 열흘이 채 지나지 않아 자신의 허름한 17평 아파트에서 삶을 마감했다. 그리고 얼마 후 청년 장교들을 이끌고 쿠데타를 일으킨 뒤 터키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인 무스타파 케말은 역시 돌마바흐체 궁전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