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최고의 도시
이스탄불에서 비행기로 1시간 거리에 있는 에페스를 방문하는 이유는 오리엔트 최대의 로마 유적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에페스 유적지에 입장하면 대리석 신전과 도서관 그리고 극장과 아고라 등 고대의 유적이 잘 보존되어 있어 아테네와 로마 다음으로 에페스가 최대 규모의 고대 도시임을 금방 알 수 있다.
기원전 600년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았던 에페스는 기원전 334년 알렉산드로 대왕의 통치를 받았으며 이후 129년 로마의 속주로 편입되어 로마제국의 아시아 수도가 되면서 로마에 버금가는 큰 도시로 성장하였다. 지금 남아 있는 유적들이 대부분 그 시기의 것이다.
정문을 통과하여 울창한 소나무 숲길을 빠져나가면 오른편은 에페소 항구로 통하는 길이고, 왼편은 에페소 유적지로 가는 길이 나온다. 이곳에서 미트리다테스 문까지 약 500m의 대리석으로 포장된 길이 펼쳐져 있다. 아르카디안 길이라 부르는 이 길을 통해 고대에 배를 타고 에페스 항구에 도착한 사람들은 도시로 들어갔다. 당시 상점들이 즐비하였던 이 거리에 50여 개의 횃불 가로등이 있었으며 도로 밑으로 상하수도관이 설치되어 있었다.
고대 도시의 정문이었던 미트리다테스 문을 통과하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원형극장이다.
원형극장은 헬레니즘 시대에 처음 조성되었지만 현재의 유적은 1~2세기 로마제국 시대에 만든 것이다. 37년 클라우디우스 황제 시대에 착공하여 네로 황제 때 완성한 이 곳은 지름이 154m, 높이 34m의 반원형 구조로 약 25,000명을 수용할 수 있다. 이 곳에서 집회는 물론 연극과 예술 공연이 상영되었으며 그리스도교 박해 시기에는 기독교인들을 몰아넣고 검투사 경기와 사자 경기를 치르는 장소로도 사용되었다. 또한 사도 바울이 우상숭배를 금지하며 기독교 전파를 하자 시장에서 아르테미스 여신상 모형을 팔던 시장상인들이 사도 바울을 끌고 와서 난동을 부렸던 곳이기도 하다.
원형 경기장 맞은편은 아고라 광장으로 상인들이 장사를 하던 시장이었다. 항구와 가까이 있는 이곳에서 유럽과 지중해에서 들어온 물건들과 아프리카에서 잡혀 온 노예들이 사고 팔렸는데 전성기의 에페스 노예시장의 규모는 지중해 최고였다고 한다. 지금은 폐허로 변했지만 당시의 영광을 말해주듯 코린트 양식의 둥근 돌기둥들이 여전히 버티고 서 있다.
아고라를 나와 대리석 거리를 걸으며 그 끝에 켈수스 도서관이 나온다.
켈수스 도서관은 소아시아 총독이었던 줄리아스 켈수스의 아들이 135년 부친의 업적을 기리며 세운 도서관으로 지하에는 그의 아버지의 무덤이 있었으며 무덤 위에는 화려한 코린트 양식의 기둥 8개가 있는 2층 도서관이 있었다.
당시 알렉산드리아와 페르가몬의 도서관과 함께 로마 3대 도서관이었던 켈수스 도서관은 두루마리형 양피지로 만든 책 1만 5천 권을 소장하고 있었다. 도서관 정면에는 지혜(Sophia), 미덕(Arete), 지성(Ennoia), 지식(Episteme)을 상징하는 네명의 여신상이 있다. 하지만 석상은 모조품으로 진품은 에페소 박물관에서 소장 중이다.
켈수스 도서관 옆에는 상업 아고라로 들어가는 마제우스와 미트리다테스의 문이 있다. 아치 3개로 이루어진 이 문은 노예였던 마제우스와 미트리다테스가 자유의 몸이 되면서 아우구스투스 황제에게 바친 것으로 아우구스투스 문이라고도 불린다. 당시 로마시대에 사유재산이 인정되었으며 노예 역시 돈으로 자유를 살 수 있었다.
켈수스 도서관을 지나면 헤라클레스 문까지 쿠레테스 거리가 이어진다.
에페스의 명동이라 할 수 있는 이 거리에서 외국에서 들어온 향신료와 비단 그리고 도자기 등을 판매하는 상점들이 있었으며 또한 하드리아누스 신전과 공중 화장실, 공중목욕탕, 사창가, 트라야누스 샘 등이 있었다. 놀라운 것은 이 거리 아래에 지하도가 있어 마제우스 미트리다테스 문 아래로 들어가면 사창가로 바로 갈 수 있었다고 한다.
사창가 입구 골목의 길바닥에는 발자국이 있는데 이 발자국보다 큰 발을 가진 사람만이 성인으로 인증되어 사창가를 출입할 수 있었다. 그 발자국 오른쪽에 새겨진 여인은 미인이 있음을 알리는 광고이고 발자국 윗편의 둥근 구멍은 화대를 내야 한다는 의미라고 한다.
사창가 옆의 스콜라스티커 공중목욕탕은 1세기경 3층 구조로 지어졌으나 지진으로 무너진 것을 4세기경 독실한 기독교인 스콜라스티커가 재건하였다고 한다.
사창가와 공중목욕탕 사이에 있는 공중화장실은 가림막도 없이 일렬로 배치되어 있어서 옆에 앉은 사람과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만들어졌다. 용변을 마친 뒤에는 발아래 홈통처럼 흐르는 물에 손을 씻을 수 있었는데 수 천 년 전에 목욕탕의 생활하수를 변기 아래로 흘려보내서 자동 수세식으로 설계되었다는 점이 놀랍다.
공중목욕탕 옆에 있는 하드리아누스 신전은 로마제국의 전성기를 이룩했던 5 현제 중 한 사람인 하드리아누스 황제를 위하여 138년에 세운 것으로 대지진으로 무너진 후 외형만 복원하였다. 아치형 신전 가운데에는 그리스 신화에서 나오는 유명한 두 여신인 테티스와 메두사의 부조가 새겨져 있다.
제우스는 아름다운 바다의 여신 데티스를 사랑했지만 그녀가 낳는 자식은 아버지보다 힘이 더 셀 거라는 예언에 그녀를 인간 펠레우스와 결혼시킨다. 그러나 그녀의 결혼식에 초대받지 못한 불화의 여신 에리스의 간계로 헤라와 아테네 아프로디테 등 세 여신이 다투다가 목동 파리스에 의해서 아프로디테가 최고 미인으로 뽑히면서 트로이 전쟁이 벌어졌다.
바다의 신 포르키스와 케토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세 딸 중머릿결이 곱기로 소문난 메두사는 아테네 여신의 미모와 견주려고 했다가 노여움을 받아 어금니는 멧돼지처럼 뻗어 나고 머리카락이 뱀의 머리로 변한 괴물이 되었다. 이후 누구라도 메두사의 눈과 마주치면 모두 돌로 변해 버렸는데 페르세우스가 아테네 여신으로부터 청동 방패를, 헤르메스로부터는 하늘을 날아다닐 수 있는 구두를 빌려 메두사를 죽이는데 성공하였다.
하드리아누스 신전의 벽에는 에페스의 창시자인 안드로클로스에 대한 내용의 부조가 있다. 그는 물고기와 멧돼지가 있는 곳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라는 신탁을 받았는데 그가 여행 중 이곳에서 식사를 하려고 물고기를 굽고 있을 때 멧돼지가 나타나서 이곳에 에페스를 건설했다고 한다.
하드리아누스 신전 옆에는 세계 최초의 병원 아스클레피온이 있었는데 현재는 그 기둥만이 남았다. 아스클레피온은 의술의 아버지로 불리는 히포크라테스의 고향인 에게해의 코스 섬에서 살다가 신의 계시를 받고 이곳에 세계 최초의 종합병원을 세웠다. 아스클레피온은 주로 지팡이를 뱀이 휘감고 있는 것으로 모양으로 상징되는데 이는 허물을 벗는 뱀은 생명과 재생을 상징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 상징은 오늘날 의사들을 상징하는 마크가 되었다.
이제 히드리아누스 신전 맞은 편에 보이는 당시 부유한 귀족들의 집을 감상하자.
귀족들과 부자들이 살았던 이 곳은 3 층 건물로 입구를 지나면 지붕이 없는 중정이 나오고 그 주위로 업무공간으로 사용한 방들이 있었다. 이 곳에서 다시 안으로 들어가면 가족들의 중앙난방이 완비되었으며 사적인 가족들이 생활하는 방들이 둘러싸인 중정이 나온다. 대부분 연못을 두었던 중정의 한쪽 벽에는 수호신과 조상신을 모시는 <에세드라>라는 공간이 있었으며 나머지 벽은 그림으로 장식하였다. 또한 바닥은 최고급 모자이크가 깔려 있던 이 집들은 현재 기원전 1세기부터 기원 후 7세기까지 집들로 7채의 집을 공개하고 있다.
다시 쿠레테스 길로 나와 조금 걸으면 트라야누스 샘이 나온다.
2세기 초 로마 황제 트라야누스에게 바친 샘은 12m의 높이에 2층으로 건축되었으며 그 중앙에 황제의 석상이 있었다. 샘은 석상의 발끝에서 흘러나왔다고 하지만 지금은 그 모습을 찾아 불 수가 없다.
쿠레테스 거리 끝에 보이는 헤라클레스 문에는 헤라클레스가 자신의 상징인 사자 가죽을 어깨에 두르고 있다.
원래 6개의 기둥에 아치가 있는 2층 문이었는데 지금 남아 있는 것은 기둥 2개밖에 없다. 다른 문과 비교해 폭이 좁은 헤라클레스 문은 수레의 통행을 제한하기 위한 것이라 한다.
헤라클레스 문을 지나면 왼편에는 멤비우스 기념비가 보이고 오른편에는 도미티아누스 신전이 있다.
멤비우스 기념비는 BC 86년 로마의 독재자 술라의 손자 멤바우스가 자신의 할아버지인 술라의 소아시아 평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것으로 한 면에 두 사람의 흉상이 보이는데 한 사람의 허리 부분이 잘려져 있다.
멤비우스 기념비의 건너편에 보이는 도미티아누스 신전은 1세기경 악명 높은 로마의 폭군인 도미티아누스 황제자 직접 건립한 것으로 신전 중앙에 7m가 넘는 그의 동상을 세웠다고 한다. 하지만 그가 암살된 뒤 신전과 동상이 파괴되었으며 이후 에페스인들은 도미티아누스의 아버지인 베아파시아누스 황제에게 이 사원을 헌정하였다.
도미티아누스 신전 옆에 보이는 폴리오 샘은 기원 후 97년 유력한 귀족이었던 폴리우스가 건설한 샘으로 에페스로 공급되는 물을 관리하던 곳이었다.
에페스의 물은 에페스 인근의 수원지에서 수도관을 통해 공급되었으며 이 곳에서 작은 수도관을 통해 시내 각지에 분배되었다. 당시 공용 샘터는 무료였으며 돈을 내면 집안에도 수도관을 설치하여 물을 공급받을 수 있었다.
폴리오의 샘 옆에는 조각난 석판들이 많은데, 그중 삼각형 돌판에 새긴 승리의 여신 니케가 보인다. 그녀는 승리를 상징하는 종려나무와 월계관을 가지고 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기 위해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할 때 사람들이 종려 나뭇가지를 들고 호산나를 찬미하며 환영했다고 한다.
에페소 유적지 중 가장 남쪽에는 에페소 의회 건물터와 야외소극장인 오데온이 있다.
신에 대한 제의와 연회장소였던 에페소 의회는 기원전 3세기에 지어진 것으로 건물의 정면에 4개의 기둥이 있었으며 그 뒤에 현관으로 둘러싸인 안뜰이 있었다. 또한 도리아식 기둥으로 둘러싸인 안뜰의 중앙에는 생명의 원천으로 상징되는 성화가 있었는데 여사제들은 365일 이 성화를 지켜야 했다.
1,400명을 수용하는 오데온은 소극장으로 2세기에 세워졌으며 음악회나 연극 등을 상영하였으며 때로는 정치적 의사결정을 위한 곳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오데온은 오늘날 오디오의 어원이 되었다.
오데온에서 위쪽 아고라까지 뻗어 있는 약 165m의 길이의 바실리카는 아우구스투스 황제 때 건립된 것으로 현재는 지붕을 바치던 이오니아식 기둥 위에 황소 머리의 조각만을 확인할 수 있다.
바실리카 오른편에 자리한 위층 아고라는 상업 아고라와는 달리 정치적 회의를 치르던 곳으로 이곳에서 원로원 의원들은 당시의 현안을 논의했다. 이곳 옆에는 대규모 공동묘지인 네크로폴리스와 길이 160m 넓이 73m의 거대한 이시스 신전이 있었으나 모두 무너져 과거의 화려한 자취는 찾아볼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