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레의 만종
20년 전 유럽으로 인솔을 갔을 때만 해도 미술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다. 당시에는 인터넷이나 정보책자는 물론 자료집조차 귀한 시절이었다. 물론 함께했던 여행자들 역시 미술 선생님을 제외하고 미술에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파리를 가면 유명세 때문에 루브르 박물관과 오르세 미술관을 반드시 방문했다. 당시에는 힘들고 어려웠으나 시간이 지난 지금 생각해보니 당시의 경험이 쌓여 지금의 나를 있게 만들었다.
여행 마지막 날의 마지막 방문지였던 오르세 미술관에서 당시 나의 역할은 그저 마네나 모네 그리고 고흐의 작품이 있는 곳을 모셔다주는 정도였다. 그럼에도 오르세 미술관으로 들어서자 많은 명작들은 반짝거리며 여기저기서 나를 유인하고 있었다.
귀국행 비행기 시간이 빠듯해 서둘러 작품들을 감상하고 나오는데 갑자기 발걸음을 떼지 못하게 하는 작품이 있었다. 조금 멀리 있었지만 나도 모르게 다가가서 작품을 자세히 보니 밀레의 만종이었다.
하늘보다 대지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밀레의 작품에서 농촌의 부부가 해질 무렵 들려오는 종소리에 기도를 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작품에서 넘치는 진실함과 경건함에 나는 한 없는 아름다움을 느꼈다. 마치 내가 앞으로 살고 싶은 모습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당시 어떤 느낌이냐고 옆에 여행자분이 물어보셔서 짧은 시간에 아주 재미있는 소설이나 영화 한 편을 본 것 같은 느낌이라고 말씀드렸던 기억이 아직도 난다.
그 후로 밀레의 만종에 대해 여러 가지 자료를 찾다가 우연히 밀레의 만종을 스토리로 만든 강의를 들었다. 다소 과장은 있었지만 재미와 전문가의 견해가 탁월한 강의였다.
강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19세기 초 산업혁명이 한창이던 파리에 당시 유행했던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던 신고전주의를 거부하고 바르비종이라는 농촌에 살면서 농촌 풍경을 사실적으로 그렸던 화가들이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져 있던 화가들은 매우 가난한 삶을 살았다. 이는 바르비종파의 수장이었던 밀레조차 마찬가지였다.
밀레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자신의 작품을 팔려고 바르비종에서 1시간 거리에 있는 파리로 올라와 화랑을 돌아다니며 그림을 팔려고 했지만 어느 곳에서도 그의 작품을 받아주지 않았다. 화랑 주인들은 당시 유행했던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이상적인 주제나 여신의 모습을 그린 작품을 원했다. 밀레가 그린 농촌의 풍경과 농부의 모습은 천박하고 쓸모없는 대상으로 여겨져 그들의 관심을 받지 못했다.
힘이 빠진 채 집으로 오는 길에 밀레는 화랑을 경영하는 친구를 우연히 만난다. 친구는 초라한 밀레의 모습을 보며 안타까운 마음에 그의 그림을 어떻게든 팔아 보겠다고 가져갔다. 그 작품이 만종이었다.
밀레의 작품을 가져간 친구는 최신 유행하는 이상미가 넘치는 신고전주의 작품들을 경매에 붙였다. 그리고 중간에 슬쩍 밀레의 만종을 올렸다.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천한 농부와 작품의 배경으로만 쓰이는 자연을 주제로 그리다니 정신 나간 작품이라고 비판하였다. 웅성거리는 사람들 중에는 미국에서 건너온 거부들이 있었다.
당시 유럽에서 신대륙인 미국으로 건너가 석유와 금으로 큰돈을 번 사람들이 자신의 부를 자랑하려고 유럽으로 와서 미술 작품과 이태리 가구를 사가는 것이 유행이었다. 이 거부들의 눈에 밀레의 작품은 놀랍고 감동적이었다.
유럽에서 미국으로 건너가 오로지 종교에 의지하며 서부를 개척하던 자신들의 삶이 밀레의 작품에 그대로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거부는 이 작품을 거액에 사들였고 다음날 밀레의 만종은 순식간에 유명해졌다. 작품을 구입한 미국인이 그림을 맡겨 두고 이탈리아로 가구를 사러 간 사이에 프랑스 정부는 자신들의 문화재를 계속 미국에 빼앗긴다는 명분으로 경매법을 바꾸어 만종을 재경매에 붙였다.
하지만 파리로 돌아온 미국인은 화가 나서 천문학적 가격으로 만종을 다시 낙찰받아 미국으로 가져간다. 미국에 간 만종은 미국인들로부터 열광적인 인기를 받으며 최고의 작품이 되었다. 이후 6.25 전쟁으로 미국의 영향을 받았던 우리나라 대부분의 이발소에도 밀레의 <만종>이 걸려 있었다.
만종 이후로 유럽 사람들은 사실주의 작품의 가치를 알게 되었다. 자연이나 농부는 그림의 배경이 아니라 그 자체로 주제가 될 수 있으며, 아름다움 선사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후 미술사는 이상적인 것을 추구하던 신고전주의에서 사실주의로 서서히 나아갔다.
강의를 들은 이후 미술서적에서 만종을 공부하며 만종의 장점은 회화성보다는 탁월한 주제 선택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마네는 평소에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아름다움이란 얼굴에 있지 않고
인물 전체에 있으며
인물이 적절한 행동을 보였을 때 더욱 빛난다.
마네의 말처럼 작품에서 남자를 거의 비추지 않는 역광은 미세하게 여인의 얼굴과 기도하는 손을 비추며 신비감을 더하고 있다. 또한 역광으로 인하여 세부묘사 없이 투박하게 그려진 작품 속 농부는 특정 인물이 아니라 대자연에 종속되어 있는 보편적인 농부를 떠 올리게 한다. 이러한 효과로 작품 전체에 삶의 보편적인 느낌인 애환과 슬픔 그리고 소박함과 경건함이 가득하다.
밀레가 활동할 당시 파리는 산업혁명으로 수많은 노동자들이 도시로 몰려나와 살았다. 그들은 복잡한 도시의 기계문명으로 인하여 소외된 삶을 살았다. 그들에게 고향이었던 농촌과 자연은 위로이자 그리움의 대상이었다. 밀레는 이를 의식한 듯 고단하고 소박한 농촌의 풍경을 자연스럽지만 숭고하게 표현하고 있다.
밀레의 작품이 도시로 떠나온 파리 시민들에게 위로를 주었듯이 1970년대에 우리나라가 산업화를 겪을 당시 농촌을 떠나온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었던 가요로 글을 마친다.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우리 님과 한 백 년 살고 싶어
봄이면 씨앗 뿌려 여름이면 꽃이 피네
가을이면 풍년 되어 겨울이면 행복하네
멋쟁이 높은 빌딩 으시대지만
유행 따라 사는 것도 제멋이지만
반딧불 초가집도 님과 함께면
나는 좋아 나는 좋아 님과 함께면
님과 함께 같이 산다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