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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봉기 Sep 04. 2021

그때 알았으면 더 좋았을 로마

포로 임페리얼

로마의 랜드마크이자 로마네스크 양식의 특징인 아치로 내 외부를 휘감은 콜로세움은 2천 년이 지나도 무너지지 않는 저력을 보이며 로마 제국을 상징하고 있다.


네로의 폭정에 못이겨 원로원으로부터 황제로 지명된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유대와의 전쟁으로 예루살렘에서 로마로 돌아와 네로의 황금 궁전 자리에 시민들을 위한 공공 경기장인 콜로세움을 지었다.


이후 그가 사망하고 황제가 된 그의 아들 티투스가 유대와의 전쟁 승리로 획득한 전리품과 노예 2만 명을 동원하여 서기 80년에 콜로세움을 완성하였다. 단 10년만에 완성되었으며 80개의 아치로 된 1층 입구를 통해 동시에 5만 명이 입장 가능했던 콜로세움은 오늘날 어느 도시에나 있는 메인 스타디움의 원형이 되었다.


콜로세움을 나서면 고대 로마시대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포로로마노가 나온다.



장엄한 터에 앙상한 기둥만이 보이는 이곳에서 기원전 756년에 로마가 건국되었으며 기원전 100년 전후로 인구 100만 시민들이 생활했다.


포로 로마노 안을 거닐다 보면 귀족들이 원로원에서 연설을 하고 시민들은 시장에서 흥정을 하고, 변호사들은 법원에서 변호를 하며 신관들은 조용히 신전에서 기도하는 모습이 자연스럽게 떠 오른다.


또한 개선문을 향해 뻗어 있는 신성한 길을 걷다 보면 전쟁에서 승리한 군사들을 향해 열띤 환영을 하는 로마 시민들의 모습과 함성이 들린다. 그리고 그 역사적 현장에 내가 서 있다는 사실만으로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포로 로마노 옆으로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 그리고 트라야누스 황제의 공회장이 있는 황제들의 포룸이 펼쳐진다. 기존의 포로로마노가 팽창하는 로마 시민들의 수요를 감당하지 못하자 로마의 황제들은 포로 로마노 옆으로 시민들을 위한 새로운 공회장을 짓기 시작했다.




포로로마노에서 베드로와 바울이 갇혀 있던 감옥인 마메르티움을 지나면 가장 먼저 카이사르 포룸을 만난다.


카이사르는 고대 로마시대 공화정을 실질적으로 끝낸 인물이지만 끝내 황제직에 오르지 못했다. 하지만 이후로 황제가 된 사람들은 그의 위대성과 이름을 본 따 카이사르라고 불리기를 원했다.


젊은 시절 알렉산더 대왕이 되겠다는 담대한 야심을 가졌던 카이사르는 지금의 프랑스와 네덜란드 그리고 이탈리아 북부지역인 갈리아 지역에서 7년 동안 8백개 도시와 3백 종족을 정복하였다. 그의 명성에 위협을 느낀 로마 원로원은 카이사르를 로마로 불러들여 제거하려 하였으나 이를 눈치챈 카이사르는 로마 군사 분계선인 루바콘 강을 무장한 채 건너며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다.



로마에 입성한 카이사르는 모든 정적을 제거하고 로마 최고의 일인자가 되었다. 그리고 황제가 되기 전에 로마제국의 염원이었던 지금의 이란 이라크 지역인 파르티아 정복을 선언하기 위해 원로원에 입장하는 순간 자신의 양아들인 부르투스를 비롯하여 공화정을 지지하는 원로원 의원들의 칼에 맞아 사망한다. 그의 마지막 말이 다음과 같다.



부르투스 너마저



카이사르 포룸 맞은편에 아우구스투스의 포룸이 있다. 두 포룸 사이에 있는 4차선 도로는 2차 세계 대전 당시 무솔리니가 황제들의 유적지 위에 만든 것이로 임페리얼 도로라고 불린다.



카이사르의 후계를 이어받은 아우구스투스는 극도의 인내로 자신의 위치를 다져나갔다. 카이사르처럼 뛰어난 군사적 재능을 못 가졌던 아우구스투스는 정치를 알았고 지략이 뛰어났다. 그는 군사적으로 뛰어난 친구인 아그리파를 앞세워 자신의 정적들을 하나씩 물리치고 로마 초대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황제에 오른 그는 시민들을 위한 화려한 공화장을 건설하였지만 자신은 검소하고 소박하게 살았으며 죽는 순간까지 덕과 관용을 앞세우며 절제된 삶을 살았다. 그의 삶을 가장 잘 보여주는 말이 그가 남긴 마지막 유언이다.


내 연기가 볼 만했습니까?
내 인생의 연극이 마음에 들었다면 박수를 쳐 주시오.          


아우구스투스 포룸을 지나면 지금의 백화점보다 더 큰 규모를 자랑하는 고대 로마의 시장인 트라얀 시장과 트라야누스 기념탑이 있는 트라야누스 포룸이 나온다.



로마 제국의 식민지였던 스페인에서 태어난 트리야누스는 로마 역사상 가장 위대한 황제였다. 로마제국이 천년이나 지속할 수 있었던 이유는 식민지 출신의 군인이었던 트라야누스가 로마의 황제가 될 수 있는 정치적 개방성과 원로원과 황제 그리고 호민관들이 서로의 권력을 견제할 수 있는 삼권분립 제도 때문이었다.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군인이었던 트라야누스는 도미티아누스의 후임이었던 네루바의 지명으로 황제가 되었다. 황제에 취임한 그는 서기 101년 지금의 루마니아 지역인 다키아 지역을 정복하였으며 서기 113년에는 지금의 이란 이라크 지역인 파르티아를 정복하였다. 그로 인해 식민지에서 들어오는 금과 은을 비롯한 막대한 부를 로마제국에 선사했다.


또한 시민들을 위한 공공시설인 트라야누스 포룸을 지어 도서관과 시장 그리고 신전을 제공하며 시민들의 윤택한 삶과 교육에 최선을 다하였으며 알리멘타라는 복지 기금을 만들어 노인과 고아 그리고 미망인  사회적 약자를  위한 복지 정책을 구사하였다.


외치와 내치에 성공한 트라야누스는 경쟁 상대였던 원로원 의원들에게 공정하면서 겸손한 자세를 보여 이들로부터 국부라는 칭호를 받았다.


하지만 로마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가졌으며 위대한 황제로 인정받는 트라야누스의 삶은 순탄하게 끝나지 않았다. 말년이 되자 자신이 정복한 파르티아의 반란으로 시리아 총사령관으로 지내다가 63세의 나이에 뇌경색으로 갑자기 사망한다.


이후 로마의 황제들은 취임식 날 다음과 같이 선서했다.


나는 황제로써 아우구스투스의 덕과 트라야누스의 업적을 이어받아 성실히 황제직을 수행할 것을 선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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