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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봉기 Sep 15. 2021

다시 보는 런던 국회의사당

피를 먹고 자라는 민주주의

11세기에 지어진 웨스터 민스터 궁전이 1834 런던 대화재로 불타자  위에 지어국회의사당은 런던 특유의 빅토리아 고딕 양식으로 웅장함과 화려함을 자랑한다.


길이만 265m에 달하는 국회의사당을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는 런던 브리지를 건너 전망대로 가야 한다.


템즈 강 건너에 위치한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국회의사당은 유럽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국회 의사당 오른쪽에 보이는 시계탑인 빅벤은 하원을 상징하고 반대편에 보이는 빅토리아 탑은 상원을 상징한다. <큰 종>이라는 뜻의 빅벤은 <크다>는 뜻의 영어 빅과 시계탑의 설계자였던 벤자민의 앞 글자를 합성해서 만든 이름으로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폭격에도 살아남아 지금까지 영국인들에게 희망의 상징이 되었다.


전망대에서 다시 다리를 건너 국회의사당 정문으로 가면 의사당 정원에 올리버 크롬웰 동상이 있다. 동상은 길 건너 세인트 마가렛 교회의 뒷문에 있는 찰스 1세의 흉상과 서로 마주 보며 영국 민주주의를 아픈 역사를 보여준다.   



1215년 잉글랜드의 존 왕은 프랑스와의 전쟁을 위해 막대한 자금이 필요하자 오랫동안 귀족들이 요구했던 대헌장 <마그나카르타>에 사인했다. 마그나카르타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있었다.


왕은 귀족들의 동의 없이 세금을 거둘 수 없으며 귀족의 신체를 함부로 구속할 수 없다. 앞으로 이 모든 것은 평의회와 법에 의해서 실행된다.


이후 존 왕의 아들이 헨리 3세 때 귀족뿐만 아니라 평민들이 참석하는 의회가 설립되었으며 이는 귀족들로 구성된 상원과 평민들로 구성된 하원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마그나카르타에서 보여주는 의회주의와 법치주의의 정신은 오래가지 않았다. 다음의 왕들은 왕권신수설을 신봉하며 의회를 무시하였으며 어떤 왕들은 의회 자체를 열지 않았다.  


16세기 초반 헨리 8세는 자신을 계승할 자식을 얻기 위해 첫 번째 왕비인 캐서린과 이혼하고 앤 블린과 재혼하려 하자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캐서린 편에 있었던 교황의 반대에 부딪힌다. 그래서 헨리 8세는 가톨릭을 버리고 스스로 영국 국교회를 만들어 수장이 되었다.


이후 유럽은 종교개혁으로 구교와 신교가 대립하게 되었으며 스코틀랜드는 신교 세력인 청교도가 장악하였다. 당시 절대 왕권을 휘둘렀던 찰스 1세는 영국 가톨릭인 국교회를 강요하며 스코틀랜드와 전쟁을 벌리는가 하면 부당한 세금을 거두어들이고 불법적으로 시민들을 체포했다.


이에 청교도이자 의회 파였던 크롬웰은 찰스 1세의 왕당파와 전쟁을 벌여서 승리를 하며 청교도 혁명을 성공시킨다. 전쟁에서 승리한 크롬웰은 인신 구속과 세금은 법에 의해서 거둔다는 권리청원과 공화정을 선포하며 유럽 최초로 왕의 목을 자르는 참수형을 실행한다. 그리고 그 스스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호국경의 자리에 앉았다.


왕과 같이 절대적인 권력의 자리인 호국경에 앉은 크롬웰은 네덜란드로부터 영국의 국익을 지키기 위한 항해법을 선포하면서 영국의 국익을 위해 최선을 다하였지만 자기 자신조차 모르는 결점이 있었다.


그는 사람에 대한 이해와 다양성을 이해하지 못했다. 크롬웰은 철저한 청교도인으로 집권 후 전 국민에게 술과 도박을 금지시키며 모든 국민들이 자신처럼 경건하면서 건강하게 살기를 원했다.



하지만 국민들의 생각은 달랐다. 숨 쉴 수 없을 정도의 엄격한 도덕성보다는 차라리 억압을 선택했다. 그가 병으로 죽자 국민은 다시 왕을 다시 모시고 왔다.  


프랑스로 대피했다가 영국의 국왕으로 돌아온 찰스 2세는 자신의 아버지인 찰스 1세에 대한 복수로 크롬웰의 무덤을 파헤쳐 시신을 꺼낸 후 부관참시했다.


역사는 반복이 아니라 타원형으로 발전한다는 역사학자의 말처럼 왕권에 복귀한 찰스 2세는 왕의 권력은 신으로부터 나온다는 왕권신수설을 다시 신봉하며 자신의 아버지처럼 절대 왕권의 정치를 펼치며 의회를 무시했다.


이에 의회와 국민들은 그를 쫓아내고 네덜란드에 시집간 그의 딸과 남편을 새로운 영국의 왕으로 모시며 명예혁명을 성공시킨다. 당시 입헌군주제를 명시한 권리 장전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왕은 군림하되 지배하지 않는다.



명예혁명을 끝으로 영국은 마침내 왕권을 무너뜨리고 국민이 주인이 되는 민주주의 역사를 실현하였다. 이후 이는 미국의 독립전쟁과 프랑스혁명을 거쳐 오늘날 신분적으로 계급 없는 세상을 만드는데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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