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운명을 개척한 카이사르
한 집안의 가장은 물론 모든 국가의 리더는 국민을 보호하고 그들의 생존을 책임져야 한다. 특히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야 하며 국민들울 행복하게 해 주어야 한다. 이를 로마제국 시대에는 다음과 같이 불렀다.
빵과 서커스
로마 시민들의 빵과 서커스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자신의 명예와 욕망을 채웠던 황제들은 모두 무참히 살해되었다. 그 대표적인 황제가 카리칼라와 도미티아누스와 그리고 네로 황제이다.
반대로 빵과 서커스에 심혈을 기울이며 훗날 성군으로 기억되는 황제는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 그리고 트라야누스 황제이다.
왕정을 지나 공화정시대에 카르타고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며 지중해 무역권을 장악한 로마는 풍요의 시대로 접어들었으며 카이사르가 게르만족을 제압하며 유럽의 중부지방을 평정하며 그 세력을 유럽 전역으로 넓히며 제국의 기틀을 잡았다.
로마 공화정 말기, 카이사르의 삼촌이자 민중파의 대부인 마리우스가 죽음에 이르자 귀족파의 수장인 술라는 민중파를 대거 숙청한다.
조금의 관용도 없이 닥치는 대로 살해한 술라는 민중파 수장의 자식과 결혼한 카이사르에게 이혼하면 살려줄 것이라는 협박을 하자 카이사르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내가 살기 위해서 아내를 버리란 말입니까?
이후 그리스로 도망가는 배안에서 해적에 잡힌 카이사르는 자신의 몸값을 20 달란트에서 50 달란트로 높이 부르며 자유롭게 해적 진영을 유유히 활보하였으며 돈을 갚고 풀려나자 군사들을 데리고 그 해적들을 소탕했다.
술라가 죽고 로마로 돌아온 그는 큰 빚을 내어가면서까지 연회를 베풀며 로마 시민들의 인기를 얻었으며 그 인기를 바탕으로 재무관과 법무관에 임명되었다. 이후 속주지역인 스페인 총독의 부관으로 그 임기를 채운 후 로마로 다시 돌아와 그는 41세에 집정관이 되었다.
집정관이 된 그는 로마 시민들의 안전과 경제적 풍요를 보장할 갈리아(지금의 프랑스와 독일) 지역의 총독으로 가서죽을힘을 다해 갈리아 지역을 평정한다.
기원전 52년, 5만의 군사로 8만 명과 갈리아 군사와 싸우던 카이사르는 갈리아 연합군 26만 명에 의해 재포위되자자신이 앞장서서 적의 약한 지역을 집중공략하여 활로를 뚫어내었고 그 길로 강력한 로마 기병대가 나가서 적의 배후를 다시 공격하며 전쟁을 승리로 이끈다.
안팎으로 34만 명의 포위군을 5만의 군사로 이겨낸 인류 전쟁사에 전무후무한 활약이었다.
그의 힘이 원로원에서 견제할 수 없을 만큼 커지자 원로원은 로마에 있던 또 다른 집정관인 폼페이우스를 앞세우며 카이사르에게 군사를 물리고 혼자 귀국할 것을 종용한다.
그의 암살을 예견한 카이사르는 <주사위는 던져졌다>라고 외치며 루비콘 강을 건너서 로마로 진격하여 로미를 순식간에 장악했다. 이후 이집트로 도망간 폼페이우스를 물리치면 카이사르는 로마의 절대적인 일인자가 되었다.
클레오파트라와 사랑에 빠졌다가 로마로 돌아온 카이사르는 알렉산더 대왕처럼 큰 업적을 남기기 위해 로마제국의 마지만 염원인 파르티아(지금의 중동지방) 원정을 나가기 위해 의회연설을 나갔다.
하지만 자신의 양아들인 브루투스를 비롯한 공화파 의원들에 의해 23번의 칼에 맞아 죽음에 이른다.
카이사르의 장례식날 브루투스는 다음과 같이 연설한다.
제가 카이사르를 덜 사랑했기 때문이 아니라 로마를 더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카이사르의 노예로 살 것입니까. 카이사르 없이 자유민으로 살 것입니까
하지만 카이사르의 부관이자 동지인 안토니우스가 연설을이어가자 로마시민들은 술렁이기 시작한다.
카이사르는 갈리아에서 수많은 포로를 데리고 온 후 그들을 팔아서 국고를 충당했습니다. 그리고 가난한 자들을 도왔습니다.
그는 조국의 번영과 평화를 위해 파르티아 원정을 준비하다가 살해당했습니다. 이제 그의 피 묻은 옷과 그의 유언장을 공개하겠습니다.
그는 자신의 재산으로 모든 로마 시민들에게 75마르크(약 2천만 원)를 줄 것을 유언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사유지인 테베르 강가의 정원과 과수원을 시민들의 공원으로 조성하라고 했습니다.
카이사르의 유언장이 공개되자 성난 로마시민들은 암살을주도한 공화파 의원들의 집을 습격하며 차례로 그들의 재산과 목숨을 앗아갔다.
결국 황제는 소수의 기득권 세력이 아닌 다수의 로마 시민들의 경제적 풍요화 삶의 질을 위해 복무할 때 구성원들의 사랑을 받게 된다는 빵과 서커스의 문화가 정착되는 순간이었다. 이후 로마는 로마제국으로서 그 장대한 첫 발걸음을 내딛었다.
카이사르의 죽음에 찬성을 했던 공화파의 지도자인 키케로는 시민들에 의해 쫓겨나서 평생 지방에 머물며 살아야 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인문학에 전념하여 아래와 같은 말을 남겼다.
인문학은 유년을 날카롭게 세우며 노년을 달래주고
기쁜 일을 축하해 주며 고난에는 위안을 마련해 주고
집 안에서는 즐거움을 도우며 집 밖에서는 도움을 주고 우리와 함께 밤을 지새우며 먼 여행의 길 동무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