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켈루앵 수도원장 앙셀므

몽생미셸 가는 길 98화

by 오래된 타자기

[사진] 앙셀므(Anselme)를 주제로 한 제단화


수사의 따뜻한 배웅을 등 뒤로 받으며 입구이자 출구 쪽으로 다시 걸어 나오면서 창가에 놓인 제단화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베크 수도원장이면서 캔터베리 대주교이자 교부 중의 교부 앙셀므(안셀무스)였다. 세 폭짜리 제단화는 활짝 열어젖힌 채로 방문객을 맞이하고 있었다.


앙셀므는 1109년 4월 21일 성주간 수요일에 임종했으니 그의 축일도 같은 날일 것이고, 그때 세 폭짜리 제단화는 활짝 열어젖혀 있을 것이며, 제단화는 그의 거룩한 생애를 되짚어 볼 수 있게 해 줄 성스러운 도구였을 것이다.


제단화 한가운데에는 성인 앙셀므가 대좌에 앉아있고 좌측 상단에는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가 오른편 상단에는 그의 스승 랑프랑이 자리해 있으며 좌측부터 우측으로 성인 앙셀므가 태어나서 임종할 때까지의 생애가 그림으로 새겨져 있다.


앙셀므는 1033년 이탈리아 북부지방인 아오스타 산골짜기 마을에서 태어나 너그럽고도 지적이었던 어머니로부터 종교교육을 받으면서 당시 주된 교육기관인 수도원, 즉 베네딕도 수도원에서 수사들로부터 체계적이고도 엄격한 종교 교육과 문법, 수사학과 논리학(변증법) 등을 배웠다.


1056년 무렵 어머니가 사망하자 앙셀므는 마침내 집을 떠나 3년 정도 프랑스를 여행했다. 첫 해에는 소르본느 대학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파리의 클뤼니 수도원을 비롯하여 프랑스에 산재한 유명한 여러 수도원 학교를 전전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때 스승인 랑프랑크를 만나 방랑생활을 청산하고 그의 후원을 받아 1059년경 가을에 프랑스 북부의 노르망디에 위치한 벡의 베네딕도 수도원에 입문했다.


후세의 평가에 따르면, 앙셀므가 프랑스에서 방랑생활을 하고 또한 프랑스의 베네딕도 수도원에 들어간 것은 앙셀므 자신이나 서구의 학문 세계에 있어서 커다란 행운으로 간주되고 있다. 왜냐면 당시의 프랑스는 신학이나 철학에 대한 연구가 가장 고조되어 있었고, 그런 분위기에 편승해서 앙셀므는 자신도 학문적인 역량을 축적할 수 있는 좋은 기반을 다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 당시 수도원장이던 랑프랑크는 앙셀므와 같은 이탈리아 사람으로서 학식과 인품을 겸비한 저명한 학자였다. 특히 랑프랑크는 당시 가장 유명한 논쟁이었던 ‘성체변화론’에 대해 변증론자인 블랑제르 드 투르와 논쟁을 벌여 승리함으로써 명성을 얻었다. 앙셀므는 저명한 스승과 훌륭한 교육조건에서 신학과 철학에 대해 더 많이 배울 수 있는 행운까지도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은수자 에흘뤼앵이 세운 벡의 노트르담 베네딕도회 수도원에 랑프랑이 설립한 성직자 교육기관은 ‘학문을 위한 성직자 최고의 교육기관’으로 그 명성이 자자했다. 수도원에 들어온 지 1년 후에 아버지마저 세상을 뜨자 앙셀므는 고심 끝에 루앙의 대주교인 모리유의 권유에 따라 정식으로 베네딕도 수도회에 입회하여 수도사가 되었다.


1063년 스승인 랑프랑크가 기욤의 발의로 캉에 생테티엔 수도원을 건설하고 수도원장으로 부임하자 앙셀므는 랑프랑크의 뒤를 이어 벡 수도원의 원장이 되었다. 이어 1067년 수도원 학교의 교장직도 수락했다. 이 시기에 그는 저 유명한 『모놀로기온』과 『프로슬로기온』을 펴냈다. 『모놀로기온』은 신앙의 근거에 대한 독어록에 해당한다면, 『프로슬로기온』은 신앙의 근거에 대한 대어록이라 할 수 있다. 아울러 수도원 교육을 질적으로 한층 발전시켰음은 물론, 베크 수도원 학교를 유럽 최고의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앙셀므가 수도원장이 된 후, 베크 수도원에는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제 그의 명성은 베크 수도원이나 노르망디를 비롯 프랑스에만 머물지 않고 영국에까지 알려졌다. 급기야 1093년에는 영국인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아 영국왕으로부터 최고의 종교적 권한과 국왕 다음가는 막강한 정치적 권한까지도 소유한 캔터베리 대주교로 부임했다. 그러나 앙셀므는 이 또한 처음에는 건강상의 이유를 들어 정중하게 사양했지만, 동료 주교들의 간곡한 부탁으로 마침내 스승 랑프랑크의 뒤를 이어 캔터베리 대주교가 되었다.


캔터베리 대주교라는 직책은 앙셀므에게 교황 다음가는 유럽 최고의 종교적 지도자들 가운데 한 명이라는 커다란 명성을 가져다주었다. 허나 다른 한편으로는 당시의 복잡한 정교의 문제, 즉 정치와 종교의 분쟁에 휘말리게 만듦으로써 그로 하여금 평탄치 못한 삶을 살게 만들기도 했다. 당시 영국 국왕은 교황과 협의하지 않고 성직자들을 직접 임명하면서 교황과 성직자들의 연락을 제한하는 등 여러 가지로 종교적 문제에 직접 개입했다.


앙셀므는 영국 국왕이 캔터베리 대주교로 임명했지만 처음에는 고사했다가 교황인 우르반 2세가 구두로 동의를 하고서야 그 직책을 받아들였다. 영국 국왕이 임명했을 때는 대주교직을 받아들이지 않다가 교황의 동의를 받고서야 직책을 수락한 앙셀므였기에 취임했을 때부터 영국 왕이 직접 성직자를 임명하는 것에 강하게 반발했다. 이렇듯 앙셀므가 영국 왕의 성직자 임명에 관해서 계속 반대하고 또한 교회의 자유를 위해 영국 왕에게 저항하자 1097년과 1103년 두 차례에 걸쳐 영국을 떠나 망명길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앙셀므는 영국 왕과 영국 교회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던 교황 우르반 2세를 인정할 것을 국왕과 성직자들에게 요구하면서 국왕 윌리엄 2세(프랑스어로 기욤 르 후(Guillaume Le Roux))와 갈등을 겪었다. 또한 앙셀므는 교황 우르반 2세에게 자신을 캔터베리 대주교로 공식적으로 인정해 줄 것을 요청하고, 아울러 영국 국왕이 성직자를 임명하는 것이 부당하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러 갈등은 극에 달했다.


그러자 영국 국왕이 외면상의 갈등을 피하고자 앙셀므의 주장을 받아들이면서 어느 정도 화해가 되는 듯 보였다. 그러나 앙셀므는 계속해서 교회의 자유와 성직자 계급의 개혁을 주장했다. 특히 대주교가 로마의 교황청과 독자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해줄 것을 요구하면서 영국 국왕과 국왕이 임명한 성직자들과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고, 마침내 그는 영국을 떠나 프랑스로 망명을 떠나게 되었다. 프랑스에서 망명하는 도중 교황 우르반 2세의 요청으로 로마에 잠시 체류하면서 살바토레 수도원의 영지인 스클라비아에서 지내는 동안 최고의 신학 저술인 『신은 왜 사람이 되었는가?』를 집필했다.[1]


『신은 왜 사람이 되었는가?(Cur Deus homo)』는 스콜라 철학의 아버지이자 영국 교회의 신학자인 앙셀므가 제자들의 열성에 감동하여 첫 번째 추방 전에 영국에서 기고하여 추방 중에 나폴리의 북쪽, 카푸아 지방에서 완성한 저술이다. 제자 보손과의 대화형식으로 그리스도의 성 육신(肉身) 교리와 속죄의 교리를 논하고 있는 탁월한 저서라 할 수 있다.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 필연적 이유로써 육화(肉化)한 신과 속죄를 연결하고 있다는 점에서 종교적 사유를 집대성한 중요한 저서로써의 상징성을 지니고 있다.


서문에서 연구 태도를 말하며 문제를 제기하고, 종래의 해석에 불만을 표하면서 육화된 신과 신의 죽음 그리고 인류의 구원과의 필연성을 언급하고 있다. 본론에서는 인간의 지복은 속죄를 필요로 한다는 것, 이 속죄는 신을 필요로 한다는 것, 또한 이 신은 죽음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 신의 십자가 죽음만이 속죄의 요구에 부응하는 것임을 논술하고 있다. 결론에 있어서는 합리적 사변을 철저히 개진하여 신의 정의와 사랑을 양자택일의 형태가 아니라, 사랑도 정의도 아우르는 양자융합이라는 연관관계에서의 조화를 강조하고 있다.


앙셀므는 1100년 윌리엄 2세가 사망하자 그의 후계자인 헨리1세에 의해 복권되어 캔터베리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는 성직자 임명에 관한 영국 국왕과의 견해 차이로 1103년 다시 망명길에 올랐다. 이 2차 망명 시기 동안 영국 국왕과 앙셀므는 화해를 도모하게 되고, 1106년에 결국 화해에 이르게 된다. 영국 왕은 대주교에게서 빼앗았던 캔터베리 대성당의 재산을 돌려주고 앙셀므는 영국 왕이 성직에 임명했다 파문한 주교들을 인정하기로 서로 간에 타협을 맺었다. 그리고 로마의 교황으로부터 인정을 받게 되었고 마침내 영국에서의 성직자 서임권에 대한 갈등은 끝이 났다.


사실상 세속 국왕의 성직자 서임에 대한 문제는 앙셀므가 벡의 수도원에 있을 때가 정점이었다. 특히 독일(당시의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와 교황 그레고리오 7세의 갈등은 극에 달했다. 교황 그레고리오7세는 클뤼니 수도원 출신으로 이상주의적 개혁성향을 지닌 강력한 교황이었다. 그가 하고자 한 개혁의 주된 내용은 세속의 권력으로부터 교황권의 독립과 성직매매 금지 그리고 성직자의 혼인 금지 및 세속 권력자의 성직 임명을 금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개혁과 더불어서 강력한 교황권을 확립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러한 개혁에 대한 의지는 결국 독일 황제 하인리히 4세와 성직자 서임권(임명권)에 대한 문제로 마찰을 일으키게 되었다. 교황은 반 황제적인 독일 국내의 귀족들과 결탁한 반면, 황제는 도시민들의 지원을 받았으나, 안팎에서 공격을 받자 결국 이탈리아 카노사에서 굴욕을 당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저 1077년에 일어난 저 유명한 ‘카노사의 굴욕’이다. 앙셀므 또한 이때 카노사로 가서 교황의 주장을 변호했다. 그러나 몇 년 후 황제 하인리히 4세는 교황 그레고리오 7세를 결국 살레르노로 유배 보내고 교황은 그곳에서 홀연 병사하고 만다.


영국 국왕과의 갈등에서도 알 수 있듯이, 캔터베리에서의 앙셀므의 삶은 무척이나 불행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앙셀므가 1098년 초 교황에게 보낸 서신을 보더라도 캔터베리에서의 불행한 삶이 잘 묘사되어 있다.


이러한 마음의 갈등을 기도와 묵상을 통해 극복하던 중 건강이 악화되어 결국 앙셀므는 그가 그렇게 떠나고자 했던 영국의 캔터베리에서 1109년 4월 21일 성주간 수요일에 임종했다. 그리고 캔터베리 대성당 안에 스승인 랑프랑크 무덤 곁에 안치되었다.


앙셀므는 다른 이단이나 세속의 정치적인 세력과 대항하여 교회의 확고한 입장을 확립하고, 교회를 이단이나 세속적인 정쟁으로부터 해방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오늘날까지도 모든 주교들의 표본으로 간주되고 있으며, 교회의 영원한 스승인 성인으로 추앙받고 있다. 그리고 그는 베네딕트회의 종교적인 삶인 ‘윤리적인 생활과 종교적인 수련을 통한 덕의 함양’이란 이상적인 생활태도를 모든 성직자들이 지니기를 너무도 간절히 원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이상은 당시 현실적 상황에서는 너무나 높은 목표였고, 따라서 단지 하나의 이상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었다.


앙셀므는 베네딕도 수도원의 교육에만 만족하지 않고 그 스스로 프랑스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부족한 것을 채워나갔다. 그래서인지 그는 베네딕도회의 신학을 그대로 답습한 신학자는 아니었다. 이러한 점은 도미니코 수도원에 소속되어 있었지만 도미니코회의 신학을 답습하지 않았던 성 토마스 아퀴나스나 프란치스코 수도원 소속이면서도 프란치스코회 신학자라고만 할 수 없는 성 보나벤투라와 둔스 스코투스와도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2]





[1] 김영철,『안셀무스』, 살림출판사, 2006, 서울에서.


[2] 김영철, 위의 책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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