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켈루앵 수도원 성당

몽생미셸 가는 길 97화

by 오래된 타자기

[대문 사진] 베켈루앵 수도원 성당


이렇듯 검소하고 소박하기만 한 성당에서 수도사들은 매일 거룩한 미사를 아침저녁으로 올렸을 것이다. 미사에 참례하는 일반신자들도 몇 명 되지 않을 것이고, 마을 주민수가 3백 명이 채 안되니 그 가운데 몇 명이나 참석할까마는 그들을 위한 텅 빈 신자석만큼이나 똑같은 크기의 성직자석이 정 가운데 제단을 경계로 하여 실내를 정확히 반으로 가르고 있다.


꽉 찬 성직자석과 텅 빈 신자석, 가득참은 텅 빔과 같고 텅 빔은 가득참과 같은 이치일까? 있음은 없음과 같고 없음은 있음과 같은 이치일까? 비움은 채움과 같고 채움은 비움과 같다는 논리일까? 그것이 바로 인생의 진리일까? 해서 기독교나 불교마저도 그와 같은 인생의 진리를 설파하고 있는 것일까?


한 가지 놀라운 것은 수많은 석학들을 배출하고 교황과 대주교의 자리에 오른 그 많은 수도사들의 영광이 서린 노트르담 대성당은 파괴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대신 수도원의 긴 복도쯤이었을 회랑을 개조하여 교회로 만든 베켈루앵 수도원 교회에는 더 이상 노르망디 공국의 기품 어린 공작들과 같은 평신도는 보이질 않고 오직 마을을 지켜가는 주민 몇 명과 명예와 치부 또는 권력과는 아주 동떨어진 흰 수사복을 입은 수도사들만이 오직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는, 그 가난하고도 청빈하며 순결하기까지 한 영혼 맑은 수사들만이 기도하고 자신까지도 온전히 하느님께 봉헌하는 미사를 거행하고 있다는 현실, 교회는 온전히 세상의 구원에 관심이 많지만, 이곳에서만큼은 순결한 영혼들에게만 하느님의 은총이 내려지고 있다는 현실에 나는 눈을 감았다.


그렇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신은 존재하는 것이다. 내가 교회문 손잡이를 잡아당기면서 안으로 들어섰을 때 가슴팍에 성호를 그으면서 저 멀리 십자고상을 향해 고개를 숙이는 것은, 그리고 교회문을 다시 밀고 나가면서 허공을 향해 다시 한번 성호를 긋고는 고개를 숙이는 것은 출필고반필면(出必考反必面), 내 어렸을 적 외출할 때마다 허공에 대고 부모님께 “다녀오겠습니다.” 말하던, 귀가해서는 다시 허공에 대고 “다녀왔습니다.” 외치던 것과 같은 이치였다.


지금 내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닌 것처럼, 하느님은 살아 계시고 존재하시며 항상 우리 곁에 머무는 존재인 것이다. 이는 미사 때마다 되풀이되는 넋두리가 아니다.


종교(宗敎)란 말은 불어로 흘리지옹(Relision)이라 한다. 이 말은 라틴어인 렐리기오(religio)에서 왔다. 기오(gio)는 두 존재의 관계가 떨어져 있는 상태를 가리키며, 리기오(ligio)는 떨어져 있는 두 존재를 잇는 것을 뜻한다. 그것도 다시(re).


하여 종교란 우리말이나 한자어로 ‘뿌리 깊은 가르침(설법)’에 해당하지만, 라틴어인 렐리기오는 ‘서로 떨어진 두 존재를 다시 잇는 것’을 의미한다. 이 서로 떨어져 있는 관계를 다시 잇는 것이 종교요, 기독교의 본질이라면, 그 수단과 방법이 되는 것은 성리학(유학)의 세계에서 치러지는 제사와도 같은 가톨릭에서 매 순간 거행되는 미사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대체 가톨릭은 조상께 대한 제사를 왜 금하였는지 모르겠다. 도대체 우리의 제사가 무엇이 잘못되었기에 그것을 금한 것인지 모르겠다.


가톨릭은 매 순간 거행되는 성찬식을 통하여 내 육신의 거듭남을 확인하면서 동시에 그분께 다가가는 영적인 신비를 체험케 해주는 데 그 본질이 있다.


“육화(肉化)한 신이라고 할 수 있는 예수 (…) 예수의 아버지는 하늘에 있는 아버지입니다. 적어도 상징적인 문맥에서는 그렇지요. 십자가로 다가감으로써 예수는 어머니를 이 땅에 남겨두고 아버지에게로 가는 것입니다. 대지를 상징하는 십자가는 어머니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십자가 위에서 예수는 어머니로부터 얻은 자기 육신을 남기고 궁극적․초월적 신비의 근원인 아버지에게로 갑니다.”[1]






[1] 조셉 캠벨․빌 모이어스, 『신화의 힘』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