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지유로 길을 떠나며

몽생미셸 가는 길 101화

by 오래된 타자기


이제 리지유로 길을 떠날 때가 되었다. 벡엘루앵은 다시 깊은 어둠의 적막에 갇혔다. 리지유는 성녀(聖女) 소화 데레사가 하느님께 순명한 영적 도시다. 자동차 전조등 하나만 믿고 달려가야 할 길이기도 하다.


명상과 묵상의 도시에서 밤을 밝혀가며 읽을 책은 앙셀므와 가우닐로의 대어록인 『프로슬로기온』이 아니라, 조셉 캠벨과 빌 모이어스의 대담집 『신화의 힘』이다. 20년전에 읽었던 책을 다시 읽는 기분이란 참으로 묘하다. 그때 내가 놓친 글귀들은 이십 년 후에 진흙탕에서 피어오르는 연꽃처럼 환한 꽃봉오리를 터트리고 있다.


“인간의 이성은 존재하기와 변화하기를 통해 신에게 이르는 데 필요한 것이고, 지성은 존재가 확정된 것, 변화가 끝난 것, 말하자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 알게 된 것을 이용하여 삶의 모습을 가다듬는데 필요한 것”[1]이라든가, “신비를 체험해 본 사람이면 누구나 자기 오감(五感)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우주의 어떤 차원이 있다는 걸 압니다. 많은 『우파니샤드』[2] 가운데 하나에서 적절한 구절을 읽은 적이 있어요. “해 지는 광경의 아름다움이나 산의 아름다움 앞에서 문득 가던 길을 멈추고 ‘아!’하고 감탄하는 사람은 벌써 신의 일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이다.” 이렇게 참여하고 있는 순간에 이 사람은 이미 존재의 경이와 아름다움을 깨닫고 있는 겁니다. 자연계에서 사는 사람들은 날마다 이런 경험을 하지요. 즉, 인간의 차원보다는 훨씬 위대한 그 무엇을 인식하면서 살아간다는 겁니다.”[3]


네덜란드 작가 세스 노터봄은 산티아고를 향한 도상에서 자신이 직덥 겪은 일에 대해 회상하기도 한다.


“여행을 가면 번번이 그런 일이 생긴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여행이 예정보다 길어질 때면 꼭 그런 일이 벌어진다. 집 밖에서 이 엉겨 붙고 굳어져서 마치 덩어리 같은 것이 되어 버리면, 나는 그것을 달고 다녀야 한다.


그런 식으로 길을 다니면 평소와는 다른 질서가 나를 지배한다. 말하자면 여행의 질서라고나 할까,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몸으로 평소와는 다른 것을 쏙쏙 빨아들이는 그 야릇한 느낌, 그것을 담아낼 수 있는 말이 무엇일까 고민을 해보았지만 내 머리로는 ‘외연의 확장’이라는 단어 밖에 생각나지 않는다.


범신론을 주장한 네덜란드 철학자 스피노자는 신과 자연은 하나라고 보았고 외연은 사유와 함께 신의 두 가지 속성 가운데 하나라고 말했으니 내 입으로 이런 말을 하기가 조금 조심스럽기는 하다.


하지만 여행을 다니면서 무엇을 응시하고 소비하고 축적할 때마다 나는 확장된다. 내가 더 유식해진다기보다는 내 안에서 무언가가 차곡차곡 쌓여 간다고 말하는 것이 정확하리라. 길거리에서, 텔레비전에서, 대화에서, 신문에서 내가 접하는 이미지와 텍스트가 나한테 두고두고 영향을 미치면서 켜켜이 쌓여간다.


아니면 그저 살이 찐다고 생각해도 좋다. 일일이 다 헤아리기 어려운 자질구레한 일, 하다 만 생각, 우연히 발을 디딘 고장의 소식으로 몸이 자꾸 불어나고 확장되어서 피둥피둥 살이 오른 그 사람과 나는 어떤 식으로든 소통을 해야 한다. 그렇게 부풀어 오른 사람은 집 생각을 까맣게 잊는다. 잠시나마 다른 곳에 와 있어서다.


다른 곳이라. 나는 지금 아스투리아스와 카스틸라 사이에 있으며 성들로 가득 찬 고장의 중심 도시인 레온의 한 호텔방에 있다. 바닥이 돌이고, 안뜰과 줄지어 늘어선 허름한 아파트가 내려다보이며, 이 방 저 방에서 소음이 어지럽게 섞여 나오는 호텔이다. 스페인의 텔레비전 소리가 다른 나라하고 다른 것은 스페인은 돌로 된 집이 많아 더 소리가 크게 울려서다. 거리를 걷다보면 절감한다.


침대 위에는 중력을 이겨 내지 못하는지 지구 중심 쪽으로 푹 꺼진 매트리스가 있고, 재능이 좀 모자란 화가의 솜씨로 보이는데 아이와 꽃을 그린 그림이 한 점 있고, 내 가방도 있다. 또 책상 위에는 내 소지품과 오려 낸 신문 기사와 메모지와 지도가 있다. 확장된 외연의 나머지는 내 머리에 고이 모셔두었다.


아무리 하잘것없어 보이는 현상 하나도 이 세상 전체를 드러내기 마련이며 지방 신문 한 귀퉁이에 실린 부고 하나도 철학자들이 현실을 낚아 보겠답시고 던져대는 그물만큼이나 세상의 이치를 생생히 드러낸다고 나는 믿는다.


자유롭게 떠도는 정신의 강점은 분명하다. 나는 성모 마리아와 호메로스를 묶을 수 있고, 타계한 작가 보르헤스와 내 머릿속에서 무작위로 이루어지는 그 셋을 이을 수 있으며, 말린 대구 요리법과 이단론을 엮을 수도 있다. 나는 그런 일이 좋다. 호젓한 방도 있고 타자기도 있다.


성모와 눈먼 시인은 연결 짓기가 쉽다. 나도 영세를 받은 가톨릭 신자니까 성모와 인연이 없지는 않다. 그 인연은 아주 멀리, 그러니까 내가 영세를 받았던 당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내 이름은 시제이제이엠(C.J.J.M.) 노터봄인데, 여기서 엠(M)은 마리아를 가리킨다. 개신교 진영에서는 안그렇지만 가톨릭에서는 마리아를 숭배한다. 그러니까 마리아란 이름은 내 평생의 반려인 셈이다. 게다가 나는 수사들이 운영하는 기숙학교를 다녔고 그 학교의 이름은 ‘복되고 원죄 없는 성모’ 학교였다.


학교를 나온 뒤로 나는 성모와는 인연이 없는 길을 걸었지만 성모는 아직도 내가 물려받은 유산의 일부분이다. 그뿐인가, 내가 남달리 좋아하는 나라들에서는 유난히 성모 축일도 많아서 우리는 오다가다 자주 부딪치는 편이다. 바로 어제만 하더라도 나는 바닷가에서 성모를 만났다.


마리아의 축일을 일일이 다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남쪽 레온 산길을 넘어가기 전에 마을 한 곳을 들렀는데 그곳 부둣가는 사람들로 미어터졌고 나는 운 좋게 마리아를 바다 위에 띄우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곳 사람들이 정식으로 부르는 이름은 산타 마리아 델 카르멘이었다. 이스라엘에 있는 카르멜 산의 마리아(여자 이름 카르멘도 여기서 나왔다)라는 뜻으로 어부들의 수호성인이었다.


포구의 고깃배들은 모두 깃발로 덮였다. 뱃사람들과 어부들은 마리아 상을 가장 큰 배에다 실었고 원숭이 한 쌍이 그 뒤를 따랐다. 장정들 머리 위에서 흔들리는 마리아 상은 사람들의 걸음새가 불안하니까 좌우로 기우뚱기우뚱 하지만 그래도 미동도 하지 않는다. 쭉 뻗은 한 손은 바다를 가리키고 머리에 쓴 왕관에 석양의 햇살이 영롱하다.


북유럽인은 그것은 우상숭배일 뿐이라고 툴툴거릴지 모르지만 나는 오히려 그래서 더 마음에 든다. 구릿빛 얼굴들 위로 움직일 듯 멎을 듯 두둥실 뜬 조각상은 학창 시절에 내가 불렀던 성가에서 바다의 별로 그려진 아베 마리아이고, 풍요의 여신 이시스의 딸이며, 생명의 여신 아스타르테의 딸이며, 바다의 물거품에서 태어난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의 딸인데, 오늘은 포세이돈의 아내인 바다의 여신 암피트리테로 나타난다.”[4]






[1] 조셉 캠벨, 『신화의 힘』에서.


[2] 『우파니샤드』는 산스크리트어로 ‘가까이 앉음’이라는 뜻으로, ‘가까이 앉아 스승에게 직접 전수받는 신비한 지식’이라고 해석되기도 한다. 원뜻처럼 문헌 대부분이 스승과 제자 사이의 철학적 토론으로 구성되어 있다. 인도의 정통 브라만 철학의 연원으로서, 철학, 종교 사상의 근간이자 전거가 되었다. 근본 사상은 대우주의 본체인 브라만Brahman(梵)과 개인의 본질인 아트만Ãtman(我)이 일체라고 하는 범아일여(梵我一如)의 사상으로 관념론적 일원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외부가 아닌 내면에 있는 신을 찾고 의례적인 제식이 아니라 만물에 스며있는 브라만을 찾으라는 가르침이 핵심이다.


[3] 조셉 캠벨, 『신화의 힘』에서.


[4] 세스 노터봄, 『산티아고 가는 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