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생미셸 가는 길 105화
[대문 사진] 리지유 성 베드로 성당
『정복왕 기욤』 역사서에는 ‘파괴된 노르망디 교회’란 말이 나온다. 9세기 바이킹들의 침공을 받은 노르망디는 그야말로 공포의 도가니였다. 세느 강을 거슬러 올라간 바이킹들은 수도원들을 차례차례 파괴하기에 이르렀고 수사들은 도망가지 않으면 어떻게든 목숨을 보전해야 한다는 생각에 골몰하거나 고귀한 성유물들을 어떻게 지킬 것인지에 대해 고민해야만 했다.
아주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이 시대에 수도원은 이제 더 이상 노르망디에 존재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종교적 풍경을 바꾼 사건이 일어났는데, 그게 바로 롤로의 세례다. 롤로의 개종은 일단 정치적인 것이었다. 왜냐면 그의 부하들 역시 세례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바이킹들은 이리저리 몰려다니며 약탈을 일삼았다. 이로 말미암아 노르망디 주교좌 대부분이 공석이 되고 말았다. 천주교의 교계제도를 다시 바로 세우는 데는 오랜 세월이 필요했다. 롤로의 손자인 리샤르 1세 때에 이르러서야 노르망디 지역의 교계가 다시 정립되고 모든 주교좌의 자격을 설정할 수 있었다.
앞으로는 공작에 의해 주교가 임명됨과 동시에 주교좌는 공작령에 의해 조정될 것이었다. 이로써 새로 임명된 주교들은 모두 공작 가문에 속했고 심지어는 공작이 벌인 전쟁에 뛰어들어야만 했다. 예를 들어 바이유의 주교이자 공작의 이복형제인 콩트빌의 오동이 그러했으며, 꾸땅스의 주교인 제오프루아 드 몽브래와 리지유의 주교인 위그 뒤, 그리고 세의 주교인 이브 드 벨렘므가 그러했다.
독실했던 리샤르 1세의 증손자인 정복왕 기욤은 젊은 나이에 벌써 교회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제 나이 17살에 불과했지만 생투엥에서 캉으로 성유골함을 옮겨오는 동안 고귀한 유골들을 자신이 직접 운반하기까지 했다. 1047년에는 ‘하느님에 의한 휴전’을 선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작은 사사건건 교황 레오 9세와 부딪혔다. 사촌인 마틸드와의 결혼이 문제였다.
스스로 성직자의 품행을 개혁하고자 시도했던 기욤은 훗날 그레고리안 개혁이란 이름으로 이를 실행했다. 그러나 교황과의 화해가 급선무였기에 1066년 영국 정복 이후에나 가능할 수 있었다. 이때 교황으로부터 성 베드로 깃발을 받자마자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헤럴드 군대로부터 빼앗은 군기를 되돌려주었다.
기욤은 공작의 권위를 드높이기 위하여 노르망디 교회를 자신의 영향력 하에 두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교황권에 대한 충성만큼은 거부했다. 왜냐면 그레고리안 개혁의 목표 중 하나가 독립에 대한 보장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영적인 권능이야말로 세속의 권능을 능가하는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1049년 리샤르 파의 위그 2세는 리지유 교구에 머물렀다. 1054년 리지외 참사원 회의에서 노르망디 공작은 루앙의 대주교였던 모제흐를 자격 없다는 이유로 내쫓았다. 그는 교회 개혁을 반대하고 나선 선봉장이었다. 교회 개혁은 아주 옛적 훼깡의 수사였던 모리유라는 성스러운 인간으로 인해서만 가능하다는 주장도 펼쳤다.
기욤이 영국왕이 되자 노르망디에서는 새로 선발된 주교에게는 탁월한 재질이 요구되었다. 주교들 또한 행정체계를 정비하여 자신들의 교구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일련의 개혁은 중세시대를 관통하는 모델로써 자리 잡았다.
리샤르 1세의 손자이자 리지유의 주교인 위그 뒤는 대성당을 완성하고 생 데지흐 드 리지유 수도원을 건립한 인물로 알려졌다. 주교는 또한 리지유 백작의 지위도 갖고 있었다. 모든 후계자들이 그러했듯이, 그 역시 공작의 권한을 대행하고 있었다.
공작이 집중한 목표는 그의 수중에 있는 교회들을 영적으로나 세속적으로 권위를 갖추게 하는 것이었다. 더해서 교회가 속한 마을들의 경제를 관리 감독하는 기능을 갖게 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세관에 관세를 부과하는 권한을 준 경우가 이에 해당했다.
이와 같은 일들을 착실히 수행하던 위그 뒤는 1077년 어느 날 퐁 레베크에서 중한 병에 걸리고 말았다. 퐁(Pont)은 투끄 강의 ‘다리’란 뜻이고 레베크(l’Évêque)는 ‘주교’를 가리킨다. 퐁 레베크란 지명은 이와 같이 그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리지유로 돌아오는 도중 그는 목장 한 구석에서 임종하고 말았다. 전기작가 오흐데릭 비탈의 말을 빌자면, “여러 갈래의 햇살이 장례식 천막이 되어 죽어가는 고위 성직자의 몸을 감싸는 것이었다. 이어서 주교의 십자가라 명명된 십자가가 갑자기 벌어진 일에 대한 기억을 재구성하듯 바로 세워지는 것이었다.” 리지유 참사회와 생 데지흐 베네딕도회 수도사들은 그의 시신을 유골함에 봉헌하기로 결정했다.
같은 시기에 수도원들의 서가 역시 불타고 말았다. 10세기때 노르망디는 그야말로 문화의 황무지와도 같은 곳이었다. 기욤 공작이 읽고 쓸 줄 알았다는 건 분명하지만, 이 또한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박식한 이들을 존경했고 그들에게 문예부흥이라는 엄중한 책무를 부여했다. 노르망디 공국을 말 그대로 문화부흥을 꾀하고자 했던 것은 물론, 선의로 서로의 경쟁을 부추기기도 했다.
공작은 성직자들로 하여금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에 관한 글을 쓰도록 독려했다. 기욤 드 푸아티에[1]는 공작에 대한 찬사로 가득한 전기를 집필했다. 또 다른 수도사였던 기욤 드 쥬미에쥬[2]는 공작에 관한 역사서를 기술하기도 했다. 모든 노르망디 수도원에서는 사료편찬관들이 노르망디의 지적인 삶의 섬광이 어떠한 것인지를 여실히 증거해 보였다. 랑프랑 역시 기욤에 관한 책을 저술했는데 불행하게도 소실되고 말았다.
수도사들은 노르망디 지방에 거듭되는 재난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었기에 공국에 다시 편입되는 것을 주저했다. 빈사상태에 처한 수도원 제도는 그러나 외부의 종교적 영향을 받아 새롭게 되살아났다.
쥬미에쥬 수도원이 복구되고 생 방드리유 수도원이 복원된 것이 가장 큰 요인이었다. 이를 주도한 인물이 다름아닌 이탈리아 출신의 교회개혁자였던 기욤 드 볼피아노였다. 그는 클뤼니 수도원의 수사였으며, 리샤르 2세의 부름을 받아 훼깡의 수도원장이 된 인물이다. 그가 새로이 건설한 수도원은 새롭게 등장한 수도사에 의해 운영되었다.
너그러운 로베르(Robert Le Manifique)의 갑작스런 서거에 따른 혼란이 얼마간 계속되는 동안 공작의 권위가 바닥에 떨어진 틈을 탄 남작들은 그들의 고유한 영지에 수도원을 세우고 종교적인 건축물들을 짓는 데에 골몰했다. 기욤은 권력의 정점에 올라서자마자 남작들의 재단들을 엄밀히 감시하고 기금의 출처를 조사했으며 자신의 영향권 하에 두었다. 이처럼 기욤은 교회개혁의 선봉이었으며 자신의 권위를 스스로 강화한 첫 번째 인물이었다.
이후로 노르망디 지방에는 수도원들이 물결을 이루듯 퍼져나갔다. 프레오, 세, 성 베드로 쉬흐 디브, 그르탱, 퐁트넬르, 생 세베흐, 그리고 오흐데리크 비탈이 수도사로 있던 생테브훌이 들어섰다.
기욤이 죽기 전 침상에서 들려준 이야기가 의미심장하기만 하다.
“하느님의 도움으로 나는 내 선조들이 세운 9개의 수도원과 수녀원들이 번영을 누리도록 하였다. 이는 자신의 이익을 희생하고서까지 남의 이익을 도모하려는 발로에서 비롯된 것이다. 더해서 공작이었던 때에 나는 수도사들을 위해 19개의 수도원을 건립하였고, 수녀원들을 위해선 6개의 수도원을 건립하였다.”
노르망디 공작이자 영국 왕이었던 기욤(윌리엄)은 이에 그치지 않고 자신을 위한 수도원인 <아베이 오좀므>와 아내 마틸드를 위한 수녀원인 <아베이 오담므>를 공국의 수도 캉에 건립했다. 그리고 그곳에 묻혔다.[3]
[1] 기욤 드 푸아티에(Guillaume de Poitiers) : 노르망디 공작의 명령을 수행하던 기사로서 1073-1074년경에 공작 기욤의 생애와 무훈담에 기초한 『노르망디 공국과 영국을 지배한 탁월한 윌리엄(Gesta Willelmi, ducis Normannorum et regis Anglorum)』이란 저술을 집필했다. 1066년 영국 정복을 입증하기 위해 고심했던 그는 수많은 전투에 기초한 사료들을 수집하는데 열성적이었다고 전해진다.
[2] 기욤 드 쥬미에쥬(Guillaume de Jumiège) : 왕국의 찬양을 담은 서사시의 작가. 1071년경에 뒤동을 재조명하였고 초기 일곱 명의 공작들의 생애를 기록한 『노르망디 공국의 무훈시(Gesta Normannorun ducum)』를 간행했다.
[3] 『정복왕 기욤, 역사의 발자취를 따라』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