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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래된 타자기 Sep 27. 2023

채색 삽화

앙드레 보느리가 들려주는 로마네스크 예술 이야기 90화

[대문 사진] 채색 삽화


중세 시대에 수사본들을 채색하는 일은 텍스트의 첫머리글자나 테두리를 장식하는 정도였습니다.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곤 로마네스크 시기에는 글을 쓰기 위하여 고대인들이 애용하던 두루마리(volumen) 다발은 더 이상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양피지 낱장을 포개서 묶은 이른바 수사본(codices) 형태를 선호했죠.


이로써 수사본 한 면 전체에 걸쳐 붉은 장식 문자가 그려진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장식 문자가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광물이나 식물에서 추출해 낸 안료를 혼합하여 만든 선명한 색상을 띤 물감으로 제작한 세밀화가 마침내 탄생한 것이죠.


광물질에서 추출한 대표적인 물감으로 하얀색은 석회석에서, 붉은색은 진사[1]나 연단[2]에서, 파란색은 청금석으로부터 추출하였습니다. 식물에서 추출한 물감은 사프란[3]에서 노란색, 꼭두서니 뿌리로부터는 붉은색, 대청[4]에서는 파란색을 채료 하였죠. 동물에서 안료를 채료 한 경우는 뿔고동에서 자줏빛을, 뼈오징어 즙에서 검은색을 추출했습니다. 선명한 색조를 띤 물감들에 더해 바탕에 얇은 금박을 입힘으로써 채색 삽화나 장식문자는 섬광이 번쩍이듯 빛을 발했습니다.


붉은 장식 문자, 레온(León)의 산 이시도로(San Isidoro)에서 제작한 로마네스크 복음서, 1162년.


로마네스크 시기에는 먼저 글씨를 쓰고, 나중에 채색을 하는 식으로 서로 각기 병행하여 작업이 진행되었지만, 고딕 시대에 오면 텍스트에 바로 채색을 입히는 통합된 작업방식을 더 선호하게 되었습니다.


로마네스크의 채색 삽화는 카롤링거 시대의 수사본이 전해준 고귀한 유산과도 같은 장식술입니다. 샤를마뉴와 그의 후계자들 시대에는 몇몇 커다란 공방에서 수사본들이 본격적으로 필사되면서 이에 따라 상당히 공을 들여 제작한 호화로운 채색 삽화로 장정된 수사본들이 잇따라 간행되었죠.


이 눈부시게 화려한 수사본들은 제국의 영토에 해당하는 유럽 각지로 배포되었습니다. 한편으로 동방에서 건너온 예술가들이 액스 라 샤펠(오늘날 독일의 아헨)의 궁정에 속한 공방에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규모가 큰 수도원들이나 대성당(카테드랄)에는 어김없이 수사본을 제작하는 필사실(scriptoria)이 들어섰습니다. 대충 간추려 봐도 훌다(Fulda), 마인츠, 잘츠부르크, 로르슈흐(Lorsch), 랭스(Reims), 투르(Tours), 메츠(Metz), 생 갈(Saint Gall) 그리고 생타망(Saint Amand)이 손꼽힙니다.


로마네스크 시기에는 필사실에 해당하는 스크립토리아가 배로 증가했습니다. 모든 수도원들이 모두 필사실을 갖추기에 이르렀고 대성당들도 대부분 필사실을 설치하였습니다. 물론 모든 필사실이 다 탁월한 예술가들에 의해 활성화된 것은 아닙니다. 이들은 대개 기존의 수사본들을 복사하는데 만족했습니다. 따라서 규모가 큰 공방에서 완성한 이미 널리 알려질 정도로 호화롭게 장식한 수사본들을 복사하는 과정에서 서투른 솜씨로 제작된 수사본들도 간혹 출현하기도 했습니다.


채색 삽화는 미사 전례서들과 교회 종규집들을 우선하여 작업이 이루어졌습니다. 이따금씩 복음서들뿐 아니라 성인들의 생애를 담은 수사본을 비롯하여, 교부 신학자들이 간행한 저술들에까지 채색 삽화가 수록되었죠. 교부 신학자로서 대표적인 인물은 성 아우구스티누스입니다. 이렇게 제작된 수사본들은 고위 성직자들과 수사들에게 배포되었습니다. 또한 라틴어로 된 텍스트를 읽을 줄 아는 일반인들과 아주 부유한 이들에게까지 제공되기도 했죠. 이는 그들을 통하여 수사본을 널리 보급할 목적에서였습니다.


채색 삽화는 처음에 각 장마다 또는 매 쪽마다 등장하는 첫머리글자를 장식한 대형대문자를 가리켰습니다. 미사 전문에서 Te igitur로 시작하는 첫머리글자 T자를 채색하는 식이었죠.


카롤링거 왕조시대부터 가톨릭 미사 경본에 등장하는 십자가를 상징하는 T자를 모두 다 장식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따금씩 문헌에 등장하는 장면들과 연관된 인물들을 형상화하기 위해서도 채색 삽화가 사용되었죠.


그러나 제일 많이 등장한 건 역시 식물과 동물의 모티프에서 취해진 장식 문자였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술가들의 자유롭고도 고유한 상상력까지 제어당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들은 기발한 장식 문자들과 삽화들을 만들어냈으며, 문헌의 내용을 자유롭게 해석하면서 기상천외하고도 익살맞은 장식들을 임의적으로 한데 뒤섞어놓기까지 했습니다.


골리앗, 레온(León)의 산 이시도로(San Isidoro) 로마네스크 성서, 1162년.


만일 수도원이나 교구의 사정에 따라 각각의 필사실 (scriptorium)들이 독립적으로 운영되었다면 오늘날까지 수사본 원본마저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면 수사본들은 돌고 돌았고 다시 복사되었으며 간혹 상당수가 뿔뿔이 흩어지는 경우도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다 치더라도 몇 군데 대규모 필사실이 갖추어진 지역들을 구분함에 있어서 독특하고도 고유한 양식이 발견되기도 합니다.


영국은 일찍부터 아일랜드의 세밀 화가들이 이룩한 탁월한 장식술에 경도되어 있었습니다. 이때가 12세기였는데, 이들은 이미 켈트 예술이 낳은 고유한 방식으로 수사본들을 제작하고 있었죠. 카롤링거 예술을 접하면서부터는 아일랜드의 스크립토리아(필사실)들은 일제히 일대 쇄신을 꾀하기 시작했습니다. 구태의 모호한 특징들을 과감하게 폐기하고 보다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묘사로 나아갔는데, 이러한 취향에 맞춰 자연히 색조도 강렬한 빛을 띠어갔죠. 12세기에 캔터베리와 윈체스터와 같은 영국 남쪽 지역에서 아주 뛰어난 표현들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이들만의 고유한 양식이 개발되었기 때문입니다.


독일은 이미 오토 왕조의 치하에서 카롤링거 채색 삽화의 빛나는 전통을 계승해나가고 있었습니다. 라이헤나우(Reichenau)와 에히터나흐(Echternach) 수도원들이 제작한 수사본들은 비잔틴 예술의 특징들을 고스란히 담아냈습니다. 12세기에 독일에서는 프랑스와 영국의 스크립토리아의 영향을 받은 흔적들이 역력한 수사본들이 쏟아져 나왔죠. 가장 대표적인 스크립토리아를 갖춘 도시들은 잘츠부르크와 쾰른입니다.


로마네스크 시기에 프랑스는 모든 지역에서 착상이 기발하면서도 풍부하고 화려한 채색 삽화로 장식한 수사본들을 제작하고 있었습니다. 북쪽 지역은 생타망 수도원의 스크립토리움(필사실)으로 대변되는데, 여기서 「생타망의 생애」 수사본들이 대량으로 간행되었습니다. 푸아투 지역에서는 세밀 화가들이 프랑스 서부 지역에서 활동하던 벽화 제작자들에게 영향을 받기도 했죠. 이 지역에서 제작된 수사본을 예로 들면 푸아티에에서 간행된 「생토방의 생애」와 「라드공드 성녀의 생애」가 있습니다. 노르망디 지방은 천 년을 앞둔 시기에 훼깡(Fécamp) 수도원에 이탈리아 수사였던 기욤 드 볼피아노가 원장으로 취임하면서 일찍이 겪지 못한 예술에 대한 욕구가 비등하기 시작했습니다. 몽생미셸 수도원에서는 영국에서 제작한 수사본들과 유사한 형태의 필사본들이 제작되고 있었죠.


남쪽으로 한참 멀리 떨어져 있는 리모쥬에 위치한 생 마흐시알(Saint Martial) 수도원은 자체의 모델에 입각한 수사본들을 제작할 것에 대한 요구가 점점 비등해지고 있었습니다. 이에 대한 결과로 나타난 것이 11세기에 간행된 성 스테파노(Saint Etienne) 대성당의 성무일도 책자라 할 수 있습니다. 성무일도 서는 현재 파리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이보다 조금 늦은 시기인 1150년엔 리모쥬 인들의 열화와 같은 집념으로 탄생한 탄성이 절로 나오는 「수비니 복음서」가 간행되기도 합니다.


툴루즈와 알비를 비롯한 미디(Midi) 지방에서 출현한 수사본들에게서는 꽃 장식 무늬와 얽힘 장식의 모티프를 병합한 채색 삽화가 두드러졌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특징들은 이 지역만의 고유한 특색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들이기도 합니다.


부르고뉴 지방에 소재한 클뤼니 스크립토리움에서 제작한 수사본의 경우에는 카롤링거 시대의 전통에 입각한 특징들이 고스란히 나타나 있습니다. 또한 시토회 수도원장이었던 에띠엔느 아흐댕(1108-1133)은 복음서를 더욱 돋보이도록 하고자 한 의도에서 채색 삽화로 장식할 것을 주문하기도 했죠.


이러한 결과로 태어난 것이 이 시대의 성인들 가운데 가장 특출 났던 그레고리오 성인이 제작한 『성업(聖業)의 덕목(Moralia in job)』이란 네 권의 저술입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클레르보의 베르나르 성인(1153년 영면)은 시토회의 모든 스크립토리아에서 제작되는 수사본들에 등장하는 채색 삽화를 하나도 남김없이 다 삭제할 것과 만일 굳이 삽화나 장식을 넣어야 한다면 오로지 단색으로만 처리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나서기도 했죠.


수도사 나무꾼, 그레고리오 성인의『성업의 덕목(Moralia in job)』, 1111년경, 디종(Dijon).


에스파냐 북쪽에 위치한 기독교 왕국은 10세기부터 그들 고유의 독자적인 세밀화 기술을 발전시켜 나갔습니다. 이 시기는 이슬람 세력이 에스파냐 남쪽 지역을 점령하고 점점 그 세력을 넓혀가던 때였죠.


이슬람 문화와 뒤섞여 모사라베 예술이 꽃피워지던 시기에 기독교 왕국은 그 영향 하에 놓여있었습니다. 이 시기에 아주 흥미로운 수사본들이 간행되었는데 그게 바로 아스투리아인 수도사였던 베아투스 데 리에바나(Beatus de Liébana)가 780년경에 펴낸 『묵시록에 대한 주해서(Commentaires de l’Apocalypse)』에 관한 수많은 복사본들이었습니다.


이 복사본들을 총칭하여 『베아투스 필사본』이라 불렀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유럽에서는 처음이자 상당히 독특하게 이루어진 문화 현상 가운데 하나였죠. 베아투스 필사본들은 낯설고도 비현실적인 세계에서 가공해 낸 상징적 삽화들까지 아주 폭넓게 다루었다는 점에서 특별한 것이었습니다.


풍부한 채색술을 사용한 동양의 장식 예술을 한 차원 발전시킨 이들만의 고유한 장식술을 개발함에 있어서 등장인물들을 장식적 요소로 의인화했다는 점 또한 아주 독특한 경우에 해당합니다. 『묵시록의 주해서』의 텍스트는 에스파냐 기독교도들의 희망을 견고히 하려는 목적에서 제작되었습니다. 이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저항하고자 했던 이슬람 정복 세력들과의 싸움에서 기독교도들의 단단한 결속을 부추기고자 한 것이 수많은 복사본들을 낳은 원인이기도 했죠.


모사라베 예술은 프랑스 남서쪽 지역에까지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 지역에 속한 갸스꼬뉴 지방의 생 세베흐 수도원의 수도사들에 의해 「베아투스」 수사본이 1050년경에 필사되기에 이르렀죠. 이 필사본은 불안과 절망을 상징한 채색 삽화들의 정도가 에스파냐 수사본보다는 훨씬 덜하였습니다. 프랑스의 필사본에서 다루어진 희망은 온전히 종교적인 차원에서 구원이라는 대 명제에 부합하는 희망이었던 셈입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카탈루냐 지방은 아직도 카롤링거 왕조시대의 장식예술에 입각해 있었습니다. 11세기에 가장 활발하게 수사본들의 필사와 삽화 제작이 이루어지던 스크립토리아를 갖춘 카탈루냐 지방의 수도원들을 꼽는다면, 리폴(Ripoll)과 산 페레 데 로데스(San Pere de Rodes)라 할 것입니다. 이곳에서는 채색 삽화를 풍부히 집어넣은 2권의 복음서가 완성되었습니다. 한 권은 바티칸에 보관되어 있으며, 다른 한 권은 파리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쿠사(Cuixà)의 성 미카엘 수도원 역시 매우 활발하게 수사본 제작이 이루어지던 곳입니다. 페르피냥이 소장하고 있는 채색 삽화가 곁들인 복음서는 바로 이곳에서 제작되었습니다. 12세기에 접어들어 비크(Vic)나 제로나(Gérone) 역시 아주 흥미진진한 채색 삽화를 곁들인 수사본 제작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죠.


이탈리아는 이보다 조금 늦게 시작되었습니다. 삽화 채색술이 등장한 것은 로마와 토스카나의 필사실인 스크립토리아에서 성서들에 채색 삽화를 삽입하면서부터였습니다. 이탈리아 반도의 남쪽 지역에 위치한 몬테 카씨노 수도원은 1070년경 데시데리우스 수도원장이 재임하던 시기에 가장 왕성하게 수사본 제작이 이뤄졌죠. 여기서 제작된 수사본 원본 가운데 한 권이 「환희(Exultet)」라는 미사 전례 기도문을 적은 두루마리입니다.


이 두루마리 안에는 기도문이 적혀있는 이면에 채색 삽화들이 그려져 있는데, 부제(副祭)가 악보대위에 펼쳐놓고 한 말씀 끝나면 기도문을 찬송하고 또 한 말씀 끝나면 찬송하기 위한 용도로 제작한 것입니다. 찬송이 이뤄지는 동안 악보대 맞은편 신자석에 앉아있는 신자들은 수사본 두루마리가 악보대 너머 아래로 늘어뜨려질 때마다 성가와 관련한 채색 삽화들을 볼 수 있도록 고안한 것이죠.


끝으로 성지(聖地)와 관련해서는 12세기에 예루살렘에서 세밀 화가들이 활동하던 아틀리에가 기능하고 있었습니다. 이 공방들은 성묘(聖廟)교회 주변에 밀집해 있었죠. 유럽의 모든 지역에서 활동하는 세밀 화가들과 마찬가지로 동양의 기독교 예술가들도 다방면에서 그들의 솜씨를 자랑하면서 예술에의 전통을 착실히 이어가고 있었던 셈입니다.


묵시록에 등장하는 다섯 번째 장면에 해당하는 천사의 나팔소리[5], 「바야돌리드 베아투스(Beatus de Valladolid)」, 970년경.




[1] 진사(辰沙)란 수은과 유황의 화합물로 그림 그리는데 쓰는 적색을 채료하는 진홍색의 광물질을 가리킵니다.


[2] 연단(鉛丹)은 납을 산화시킨 물질인 산화연으로부터 추출한 붉은 가루 물감입니다.


[3] 사프란(safran)은 온대 각지에서 재배하는 붓꽃과의 다년초를 일컫죠.


[4] 대청(大淸)은 해변에 자생하는 겨자과의 2년 초 식물로서 잎은 타원형이고, 초여름에 줄기 끝에 노란 꽃이 핍니다. 열매는 장각(長角)과에 속하며, 물감 원료로 쓰이기도 합니다.


[5] 요한의 묵시록 9장 1절-11절까지를 형상화한 채색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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