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트르타를 떠나며

몽생미셸 가는 길 130화

by 오래된 타자기


길 위에 서서 길을 생각하다.



삶에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는 오늘도 책을 읽고 글을 쓸 따름이다. 내 생애에 스스로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모르겠다. 나이 들대로 든 사람처럼 주절거릴 뿐, 길은 멀고도 막막하다. 되돌아본 순간 지나온 길만이 아름답다. 갑자기 그림을 그리고 싶어 진다. 길을 그려보고자 고심한다. 무슨 연유로 길 위에 설 때마다 멀고도 막막함을 먼저 떠올리는가? 왜 지나온 길만이 아름답다 생각하는가?


샤를르 보네(Charles Bonnet)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삼라만상은 원래 애벌레였지만, 지금은 번데기이다. 언젠가는 나비가 될 것임에 틀림없다.
Le monde en son entier a été larve, le voici chrysalide ; un jour, sans doute, il deviendra papillon.


샤를르 보네의 이 말 한마디에 푸코는 다음과 같은 정의를 내린다.


모든 종 역시 마찬가지로 놀라운 변신을 통하여 새롭게 거듭날 것이다.
Et toutes les espèces seront emportées de la même façon par cette grande mue.


스위스 제네바에서 활동한 18세기 동식물학자는 참으로 간단한 사실을 갖고 잠언(아포리즘)에 가까운 진리를 설파했다. 지금 읽고 있는 1966년에 간행된 갈리마르 사에서 펴낸 미셸 푸코의 『말과 사물 』에 나오는 글귀다. 나는 이 간단한 진리를 줄 치고 다시 읽고 몇 번을 거듭한 끝에 이제 이 노트에다가도 기록해 놓는다. 우리는 얼마나 단순한 사실을 단순하다는 이유만으로 아무 가치 없는 것으로 제쳐 두는가? 우리가 제쳐 버리는 그 사실이 우리의 인생을 꼭 짚어주는 잠언이라는 새로운 사실을 깨닫지 못하기에 우리네 삶은 불행할 수도 있다.


결국 나는 불행한 삶을 산 한 남자에 불과하다. 인생을 참 헛되게 살아왔을 수도 있다. 책을 읽지 않으니 인생길이 보일 리도 없고 책을 가까이하지 않았으니 인생이 참으로 무미건조했을 수밖에 없다. 책에는 그처럼 인생의 아포리즘이 흘러넘친다. 그걸 주어 담지 못하고 그저 하늘만 공허하게 바라본 꼬락서니였다니, 그래서 삶의 권태니 지루함이니 막막함 같은 것들을 떠올렸으리라.


책을 읽어가는 중에 내 지난 삶을 되돌아본 것은 참으로 다행이었다. 이 아름다운 계기가 오늘의 나를 되살려줄 것이란 깨달음 또한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


지금 불특정 한 삶을 살고 있는 한 존재가 지닌 이 과중한 책무는 다름 아닌 ‘존재에 대한 자각’과도 같은 것이다. 나는 또 한 번 내게 묻고 싶어 진다. 길을 가다 길에 대해 묻는 거나 다름없다.


일찍이 나는 한 마리 애벌레였다. 지금은 번데기였다가 어느 날 나는 과연 한 마리 나비가 되어 날아오를 수있을까? 스위스의 동식물학자 샤를르 보네는 세상의 진리를 인간에게도 적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일까?


나는 지금 긴 여행을 준비하고 있다. 내 생각이 옳다면 나는 다시 태어나야 한다. 그게 바로 샤를르 보네가 떠올린 Palingénésise다. Palin = nouveau ‘새로운’ 이란 뜻이고 génésise = naissance ‘태어나다’란 뜻이니, 새롭게 태어나야 하는 것이리라. 만물은 이런 공(空)의 생명의 법칙을 갖고 있다. 인간이란 존재도 예외는 아니다. 샤를르 보네의 이러한 잠언은 자연의 법칙 속에서 인간 삶의 법칙을 깨닫게 된 경우일 것이다.


저 고비를 지나가면 길은 막다른 길일 수 있다. 아니면 곧고 평탄한 길일 수도 있을 것이다. 길 위에서 길을 상상하는 것은 오래된 버릇이다. 운전대에서 손을 놓지 못하는 이유 중의 하나다. 이젠 차를 버리고 걸어가야 할 때인지도 모른다.


예측마저 불허하는 도상에서 내 스스로 상상하는 일만이 남았다. 어쨌든 진리는 나를 비껴갔다. 아니 스스로 그것을 도외시해 왔다. 그럼으로써 발가벗겨진 알몸, 그리고 그 자체의 헐거운 육신만이 남았다. 어디까지 걸어갈 수 있을지조차 가늠하기 어려운 상황에서는 오직 자신을 믿고 길을 계속 걸어가는 수밖에 없다.


상상은 금물이다. 쉴 곳을 찾아야 하고 먹을 것을 구해야 하고 그리고 계속 나아갈지 어떨지를 고민해야 한다. 인간은 쉽게 주저앉지 않는다. 모든 포유류의 특성이기는 하나 인간은 특히 좌절하는 법이 없다. 좌절할 때는 심리적으로 극단적인 상황에 직면했을 때다. 내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심리적 불안감이 팽배했을 때에는 자살도 불사한다. 죽음에 이르는 병이 다름 아닌 자아의 내면에 가득 들어찬 상실감이나 외로움이란 사실은 이를 잘 반증해 준다.


논리를 추구하는 인간은 그러나 주저하지 않는다. 그는 오직 심신이 지칠 때까지 자신이 추구한 삶 때문에서라도 가던 길을 계속 걸어간다. 맹목적인 의지가 한계에 도달할 즈음 도움을 청하기도 한다. 이때 그가 판단을 되풀이하는 것은 계속할 것인가 말 것인가 그렇다면 다른 삶은 무엇인가 하는 것 등이다. 인간의 보폭은 다른 포유류에 비해 크지도 넓지도 않다. 그러나 그 흔적만큼은 그 어떤 동물보다도 크고 넓다. 또한 울림까지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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