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천 년

앙드레 보느리가 들려주는 로마네스크 예술 이야기 29화

by 오래된 타자기

[대문 사진] 피레네 산맥이 병풍처럼 두른 모브쟁 성


서기 천 년으로의 이행을 동시대인들이 단지 기독교 달력 속에서 날짜가 바뀌었다는 정도로 인식한 것은 아닙니다. 라울 글라베흐 수도사가 명쾌하게 설파했듯이 어떤 변화를 예고하는 모종의 흔들림이 이미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가 강생한 지 천 년이 흐른 시기에 또다시 새로운 천 년이 시작되고 있었으며, 이 새로운 세기에 인류는 갱생하면서 새로운 세기마다 짓누르는 두려움과 불행으로부터 해방되고자 몸부림쳤습니다. 혹자는 새로운 세기가 어떤 신비한 마력을 지니고 있다고 믿기까지 했습니다. 그렇지만 진정한 변화가 시작되고 있다고 생각한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되었을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에 와서야 확인된 사항이기는 하나 되돌아보건대 10세기부터 감지되었던 인구의 변화와 정치, 경제 상황의 변화는 11세기와 12세기 사회의 급작스러운 변혁에 힘입어 상황이 급변했다는 점만큼은 확실합니다. 이러한 복잡한 양상을 띤 변화가 오직 하나뿐인 이유로 설명된다는 것이 부적절하기는 하지만, 분명한 것은 점진적인 기후의 변화, 즉 기온이 상승함으로써 농산물 생산이 급증했다는 것이 이를 뒷받침합니다. 마침내 긴 겨울이 끝나고 봄이 도래한 것이죠.


로마네스크 예술이 출현하여 활짝 개화한 시기가 11세기에서 12세기 동안 이루어졌다는 것은 실질적으로 수세기에 걸쳐 거대한 개간지가 개척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경작지가 늘어남에 따라 놀라우리만치 곡물 생산도 증가하였고, 이러한 현상은 유럽 북쪽에 이르는 지역에까지 확대되기에 이르렀으니까요.


게다가 계가법[1]이 발명되면서 이를 이용한 효과적인 사용이 급증하였습니다. 이와 병행하여 새로운 연장들도 등장했음은 물론, 밭에 물을 빼는 배수 농법도 활발하게 이루어졌을 뿐만 아니라 자연의 유의 깊은 관찰을 통하여 획득한 농사기술이나 농학에 근거한 실제 적용도 뒤따랐습니다.


또한 생산성 증가를 목적으로 한 고대 로마 제국에서 사용하던 교차 농법도 눈에 띄게 증가하였죠. 식량의 증가는 자연히 기근과 질병의 감소로 이어지면서 현저하게 인구가 증가하는 원인으로 작용합니다.


<4월>, 「창조의 태피스트리」(부분), 스페인의 제로나 대성당의 보물인 12세기 때 제작된 태피스트리.


11세기부터 농기계가 개량되었습니다. 이전에는 주로 쟁기를 사용하였죠. 11세기에 계가법이 발명되면서 소나 말에 쟁기를 달아 – 이마에 멍에를 씌우고 앞다리 어깨 부분에는 쟁기와 연결된 기다란 밧줄을 매다는 식으로 – 손쉽게 밭을 갈 수 있었습니다. 곡물의 생산량을 높일 수 있는 새롭고도 획기적인 방법이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이로써 활발한 개간이 이루어지면서 새로이 경작할 수 있는 땅 역시 점차 넓어져만 갑니다.


인구의 비약적인 증가는 농촌 인구의 증가로 이어졌습니다. 이에 대해 여러 문헌들이 자주 눈에 띌 정도로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고고학상으로도 현저하게 확인될 정도입니다. 11세에 들어와서는 드넓은 미개간지들이 점차로 사라지면서 시골은 시골대로 인구밀도가 높아집니다.


그러나 인구가 급격하게 증가하게 된 이유는 새로운 도시들이 생겨나면서부터였습니다. 고대로부터 이어져온 도성들은 이제 더는 해골들만 나뒹구는 텅 빈 무덤일 까닭이 없었습니다. 11세기와 12세기에 새로이 인구가 유입되면서 도성들은 이른바 부르지(burgi)라 부르는 성벽과 새로 닦인 도로나 물줄기들에 둘러싸이게 됩니다. 도성에는 ‘성스러운 무덤’도 만들어졌죠. 그러자 무덤을 찾아 순례자들이 도성으로 물밀듯 밀려들어 왔습니다.


스페인 갈리시아 지방에 속한 레보레이로 마을로 난 길인 까미노 프랑세(Camino francés) 위에 설치한 돌다리.


11세기와 12세기의 대대적인 개간은 시골 풍경을 바꿔놓기에 이르렀습니다. 작은 숲들과 황무지의 개간은 새로운 농지와 마을들과 나무로 둘러싸인 전원(목장)들을 등장하게 만들었죠. 새로이 길을 내면서 경제, 문화 교류도 용이해져 갑니다.


도심에는 장이 서고 시장에다 내다 팔 수 있는 농산물들을 더 많이 손쉽게 팔 수 있는 장들 또한 늘어만 갔습니다. 지상에, 수로에, 바다에 상업용 길이 닦이면서 10세기에 거의 사라지다시피 한 교환경제가 되살아났을 뿐 아니라 점차 활기마저 띠어갔습니다.


농산물 생산만이 수입의 유일한 방법일 까닭은 없습니다. 돈벌이가 되는 상업 활동이 증가한 이유도 그와 같은 이유에서였습니다. 상품은 주로 직물과 금속 그리고 공장에서 제조한 물품들이 주류를 이뤘습니다.


지난 세기에 생계수단에 불과했던 경제활동은 새로운 세기가 시작되면서 교환경제에게 자리를 내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회적으로도 새로운 계층이 등장했는데 이들이 바로 중산층(부르주아지)[2]이라 부르는 중세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될 계층입니다.


국왕 필립 1세의 묘석 횡와상, 흘뢰리 수도원, 생 브누아 쉬흐 루아르.


경제구조의 변화는 심대한 정치적 변혁을 요구하였습니다. 9세기말에 카롤링거 제국으로부터 생겨난 왕국들은 거대한 영토에 행정체계를 세우는 일이 거의 불가능했죠.


권력의 실체는 백작이었습니다. 모든 일들은 점차적으로 백작들의 손을 거쳐야만 했습니다. 백작이란 국왕이 지명한 고위 관리를 가리키는 호칭에 불과했지만 그러나 백작들은 국왕으로부터 주어진 영지를 넘어서 직접적으로 그러나 표면에 나서는 일 없이 국왕을 조정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윽고 백작의 직분은 세습되기에 이르렀으며 백작들은 자신들의 권한으로 그들에게 복속된 주민들에 대한 통치를 전적으로 행사하였습니다.


이런 와중에 공국이 탄생하였죠. 공작은 백작보다 더 우위에 서게 되었을 뿐 아니라 훨씬 더 강화된 권력으로 실질적으로 공국을 통치했음은 물론, 더욱더 야심 찬 시도를 감행하기까지 합니다.


같은 시기에 봉건제도하의 영주들은 주어진 영지 안에서만이 그들의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영지에 속한 주민들을 법과 재판을 통해 다스렸고, 세수를 거둬들였으며, 방어에 필요한 조직을 신설하고 이를 위해 군대를 편성함과 동시에 요새를 구축했죠. 또한 영지 내에서의 통치를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도로들을 신설하기도 했습니다.


모든 사회계층을 하나로 묶기 위한 시도로 가신[3]들의 영토와 종주[4]들에게 복속된 영토를 체계화함으로써 이를 한데 연계시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즉, 가신들과 종주들 역시 일종의 권리와 의무를 지움으로써 이들 역시 사회계층 안으로 편입시키기 위한 의도였습니다. 이를 흔히 봉건제도라 부릅니다. 이로써 11세기부터는 모든 유럽 국가들이 봉건제도하에서 통치를 시작하게 됩니다.


봉건제도를 이야기함에 있어서 제후가 임의로(독단적으로 또한 부당하게) 통치를 감행하는 것을 보편화시키는 의미로 간주할 수 있는 여지는 충분합니다. 다시 말해 봉건제도라는 것이 제후가 가장 강력한 수단인 힘을 통하여 권한을 극대화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여지가 있는 것이죠.


그러나 봉건제도는 이와 반대로 세분화된 사회를 기꺼이 받아들여 이를 정부 형태의 조직으로 편성하였습니다. 이 세분화된 사회는 아직도 얼마간은 더 자급자족의 상황에 처해있어야 함은 물론, 적으로부터 침입받았을 경우 궁지에 몰려 누군가로부터 보호받아야 할 처지에 놓여 있었던 것 역시 사실입니다.


당시의 상황에 비춰볼 때, 봉건시대는 확실히 정치적인 면에서 사회에 유리한 창의적 모델을 설정하는 것이 가능했던 사회였습니다. 그럼으로써 경기부양책이 마련될 수 있었고 이와 더불어 인구 유입도 가능해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브쟁(Mauvezin) 성, 12-15세기, 성채는 봉건사회의 권력을 상징했습니다.


프랑스 오뜨 피레네(Hautes-Pyrénées) 지역에 세워진 모브쟁(Mauvezin) 성은 수수하게 흙을 쌓아 올린 둔덕 위로 나무로 지은 탑이 솟아올랐습니다. 탑만이 유일하게 서기 1천 년에 지은 것입니다. 성은 11세기부터 조금씩 변형되기 시작하여 성벽의 보루가 동종을 에워싼 형태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동종(Donjon)이라 함은 중세 때 적의 동태를 관찰하기 위해 성곽 안에 설치한 망루를 가리키는데, 그 용도가 점차 확대되어 적을 관찰하는 기능만이 아니라 그 안에서 영주가 일상적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습니다. 따라서 동종에는 적병을 관찰하는 망루 이외에도 거실, 침실, 객실, 회의장, 주방, 식당, 심지어는 기도소까지 갖춰졌습니다.





[1] 계가법이란 말이나 소에 쟁기를 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2] 부르주아(bourgeois)란 말은 중세시대 때 성벽으로 둘러싸인 장이 서는 마을인 부르그(bourg)에 사는 사람들을 일컫는 용어에서 그 쓰임새가 출발합니다. 오늘날 ‘도시민’이란 말에 해당합니다. 이에 비해 부르주아지(bourgeoisie)란 용어는 봉건시대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중산층’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고 있습니다.


[3] 가신(家臣)이라 함은 제후의 측근으로서 제후에게 속한 업무를 관장하던 관리를 뜻합니다. 봉토를 하사 받은 자라 해서 봉신(封臣)이라 불리기도 합니다.


[4] 종주(宗主)라 함은 봉건시대 제후의 위에서 패권을 잡던 맹주(盟主)를 가리킵니다. 제후가 위기의 상황에 처할 때마다 반란을 도모하던 주역들이기도 합니다.




피레네 산맥 인근은 로마네스크 예술이 활짝 꽃핀 지역입니다. 모브쟁 성(Château de Mauvezin)은 그곳을 향한 중간 기착지 가운데 한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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