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베르 쉬르 우아즈(Auvers sur Oise)
이 얼마나 황홀한가. 그것은 바로 시(詩)다.
이는 빈센트 반 고흐가 1874년 「만종」을 발견하고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한 말이다.
내가 처음으로 고흐의 그림을 접한 것은 초등학교 다닐 때였다. 아버지 집에 세 들어 살고 있던 선생님 부부가 있었는데, 그 여선생님으로부터 처음 고흐의 그림을 접했다. 초등학교 선생님이었던 그 여선생님은 무릎에 어린 나를 앉히고는 두툼한 고흐의 화집을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그림을 보여줬다. 어린 시절 화가의 도록이라는 걸 처음 접하게 된 나로서는 영 익숙하지 않아 떨떠름해했지만, 결국 그 뒤로 그때 본 것과 같은 노란 표지정장을 한 두툼한 빈센트 반 고흐의 화집을 사게 된 걸 보면, 그때의 인상이 강렬했던 모양이다. 타센(Taschen)에서 발간한 책 뒷면에는 다음과 같은 고흐의 고백이 실려 있다.
내 작품이 팔린 적이 없지만, 먼 훗날 사람들은 내 작품에 표현된 색의 가치 이상의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고흐의 무덤이 있는 오베르 쉬르 우아즈를 찾아가는 동안 나는 유년시절의 기억과 함께 그 노란 커버로 장정된 두툼한 책을 떠올렸다. 오르세 미술관에서 처음 「오베르 쉬르 우아즈 교회」 그림을 바라보면서 내지른 탄성 또한 네덜란드 화가가 「만종」을 처음 발견하고 외친 그 탄성과도 다를 바가 없었다.
파리에 살면서 여러 차례 오베르 쉬르 우아즈를 찾곤 했다. 가족과 함께 혹은 친구나 지인들과 함께 아니 고흐의 흔적을 찾아 저 암스테르담에서부터 안트웨르펜을 거쳐 파리의 몽마르트르, 아흘르, 생 레미 드 프로방스 그리고 오베르 쉬르 우아즈까지 거의 이십여 년 간을 고흐를 찾아 헤매 다녔다.
지금 누가 ‘당신이 처음 보고 충격을 받은 작품은 어떤 것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서슴없이 그 어린 시절에 본 고흐의 그림과 내 친 형이 모사한 귀스타프 쿠르베의 그림이라고 말할 것이다. 고흐와 쿠르베는 그렇게 내 머릿속에 지워지지 않을 상징으로 각인되었다. 아니 텔레비전도 없는 집에서 살던 시절이었지만, 그들의 작품은 내 어린 가슴에 항상 자리하고 있었다.
내 형은 다행히 화업(畫業)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나는 끝내 그 길로 들어서질 못했다. 그때의 충격과 프랑스에서 다시 발견한 고흐의 작품에 감명받은 나는 아직까지도 예술에의 꿈과 미련을 저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고흐는 이렇게 이야기한 바 있다.
내가 예술가들에게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 나는 작품 자체에도 관심이 있지만, 그 그림을 그린 이에겐 더 많은 관심이 간다.
서른일곱의 나이에 불꽃같은 삶을 살다 간 천재화가, 불굴의 노력으로 사후에 가장 화려한 인생 역전극을 펼친 화가, 전 세계인들로부터 가장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화가, 최고가의 경매기록을 갈아치우고 있는 화가, 이 모든 수식어도 부족한 반 고흐는 1853년 네덜란드에서 태어나 1890년 7월 29일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서 권총 자살할 때까지 궁핍과 불안과 회의와 고뇌 속에 예술에의 열정을 불태우면서 불멸의 작품을 창작한 ‘진정한’ 예술가였다.
그가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린 시기로 한정한다면, 거의 10년도 되지 않는 짧은 기간 동안 2천여 점의 작품을 남긴 그는 거의 먹지도, 쉬지도, 잠자지도 않고 작업에 매달렸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가 그림에서 보여준 다 해진 ‘구두’를 신고 이젤을 메고 정처없이 들판을 찾아다닌 이 화가는 내면에서 솟아오르는 어떤 갈증에 시달렸다. 스스로 인생을 확정하고 스스로의 죽음을 예정했던 화가는 자연과 숭고와 고통의 색조를 통해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작품세계를 펼쳐갔다.
서명까지 성을 버리고 ‘빈센트(Vincent)’라는 친근한 이름을 사용한 고흐는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평범한 주제와 일상적 인물과 풍경을 화폭에 등장시킨, 삶 자체를 예술로 승화시킨 거의 유일한 화가였다. 그는 또한 물질적 궁핍과 사회적 몰인정 가운데서도 좌절하지 않고 끊임없이 동생 테오와 지인들에게 편지를 쓰면서(그가 테오에게 보낸 편지만 652통에 달한다) 새롭게 시도할 작품을 구상했을 따름이다. 총 8백여 통에 달하는 고흐의 편지는 『영혼의 편지』란 제목으로 네덜란드에서 처음 출간되었다. 이후 전 세계어로 번역되어 각국에서 출판되고 있다.
그의 편지는 이처럼 인생의 모든 고통과 번민과 예술에 대한 고뇌로 가득 차있다. 과연 어느 작가가 자신이 완성한 작품들과 앞으로 그릴 그림에 대해 그렇게 누누이 기록할 수 있었겠는가? 고흐에게 있어 예술은 삶 자체였을 뿐 아니라, 작업자체가 일상이었던 셈이다.
그는 매일 그림을 그리면서 편지를 썼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오직 그것뿐이었다. 동생 테오로부터 돈이 도착하면 그 돈으로 약간의 빵과 술과 담배를 샀을 뿐, 월세를 제외한 나머지 돈은 오로지 물감 사는 데 사용했다. 거의 칼비니스트적인 종교관은 그의 해진 ‘구두’가 말해주듯 ‘삶(예술)’ 속에 오롯이 깃들어있다. 그의 세계에 대한, 자연에 대한, 예술에 대한 믿음은 견고하다 못해 너무도 처절하여 그의 작품 하나하나는 마치 그의 신앙의 표현과도 같은 믿음에 대한 종교화를 방불케 한다.
그는 자신이 살고자 하면 할수록 죽음이 너무 빨리 도래할 것이라는 착란에 시달렸다. 이러한 강박관념은 죽기 전 가장 고귀하다 생각한 죽음에의 귀의에 합당한 건축물을 화폭에 담았다. 밀레가 말년에 그린 「그레빌르 교회」처럼 고흐는 「오베르 쉬르 우아즈 교회」를 그린 것이다.
하나의 길이 갈라지는 지점에 우뚝 선 교회, 자신의 예술적 고향이나 다름없는 파리 근교의 오베르 쉬르 우아즈의 유일한 건축물, 두 갈래로 갈라진 길은 교회 뒤편에서 다시 하나가 되고.
장 프랑수아 밀레는 파리 서쪽의 대서양가의 한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 파리의 남서쪽 바르비종에서 생을 다하지만, 고흐는 파리 북쪽에 위치한 네덜란드 태생이어서인지는 몰라도 파리 북쪽에 위치한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서 생을 마감한다. 이 숨 막힐 정도로 정치한 삶의 조화는 밀레처럼 자연의 철학자, 시인이기를 꿈꿨던 반 고흐의 믿음이었다.
밀레와 같이 자신의 본향인 한 작은 마을의 교회를 그렸다는 것은 두 사람 다 같이 죽기 직전에 교회를 그리고 있다는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듯,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 즉 부활일 수 있다는 믿음을 확산시켜 주기에 충분하다.
고흐가 그린 「오베르 쉬르 와즈 교회」에서 읽히는 것처럼, 처음엔 한 길이었다가(예술적 운명) 다시 두 갈래로 나뉘어(개별성), 결국은 원래처럼 다시 하나가 된다는 사실(예술정신에의 일치)은 차라리 밀레와 고흐 이 두 사람의 인생과 예술에 대한 은유이자 상징처럼 보인다.
다시 찾은 오베르 쉬르 우아즈 교회는 고흐의 강렬한 작품에서처럼 마을 언덕에 우뚝 자리하고 있었다. 마치 하늘을 향해 솟아오르듯 그 거대한 몸체를 세운 형상으로 바라보는 이의 시선을 압도하는 듯했다. 이제는 화가의 기념관으로 개조한 <오베르쥬 라부(레스토랑)>나 <오뗄 드 빌(시청)> 또한 빈센트 반 고흐 정원(러시아 태생의 현대 조각가 자드킨이 제작한 고흐 조각상이 서 있다)은 고흐의 그림에서처럼 여전하다.
정수복 형은 자신의 책에서 다시 찾은 이 마을이 예전의 고즈넉함을 잃고 관광 상품화된 듯한 느낌을 받아 안타깝다고 기술하고 있으나, 만일 우리 같았으면 까마귀 나는 밀밭은 벌써 호텔단지나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을 테고, 마을 전체가 온통 고흐 이름을 단 식당이나 술집 노래방 기념품 가게들로 흘러넘쳤을 것이다. 형의 염려처럼 이 마을이 소란스러워진 것도 아니고 오히려 친절하게 옛 모습을 보전하면서 조심스럽게 ‘고흐의 길’을 개발했을 뿐이다. 하여 전 세계에서 몰려든 고흐의 마니아들은 이 길 위에서 가장 사랑받는 화가의 예술과 삶을 되작이고 있을 따름이다. 이왕 이야기 나온 김에 한 마디 더 덧붙이자면,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쓴 유홍준 선생은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서 고흐의 길을 따라 걸으면서 한국도 이처럼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지 않은가?
고흐의 신앙은 말로만이 아닌 실로 몸으로 체현한 예술에의 믿음 자체였다. 진보 또한 입으로만 발설해서 이뤄지는 것이 아닐 것이다. 고흐는 모두에게 감명을 줄 작품으로 나아갔다는 점에서 더 큰 감동을 준다. 그가 꿈꾼 ‘화가공동체’ 또한 예술가들에게 얼마나 유익한 것일 수 있었겠는가? 비록 고갱과의 단절로 성사되지 못한 것이 한스럽기는 하나 화가가 제작한 그림을 그들이 설립한 공동체에서 판매하는 방식은 많은 가난한 예술가들을 구원해 주는 길이었을 수도 있다.
격정적인 톤과 색조는 맘에 들지만, 서툰 표현과 거친 말과 행동 때문에 마음 상한 고갱이 아흘르를 떠남으로써 고흐는 유일한 동지를 잃고 말았다. 노벨상 수상작가인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는 자신의 소설에서 고흐를 주인공 삼아 마치 허리우드 영화에서처럼 거의 ‘정신병자’ 수준으로 진단하고 있지만, 2011년 오르세 미술관 측은 큐레이터의 도움으로 이승에서 헤어진 두 화가를 저승에서나마 만나게 하려는 의도였는지 한 자리에 두 화가의 작품들을 걸어놓았다. 새롭게 바뀐 전시실 내부에서 두 화가의 화해로운 작품세계를 일별 하다 보면 세상은 참 살만한 곳이요, 화폭에 담을 만한 천국의 또 다른 모습이란 생각이 든다.
“불완전한 아르카디아 - 실망은 회의적인 사람들을 짓누르기만 할 뿐이다.”로부터 자신을 구원하고자 그 짧은 생애 동안 치열하게 작업하면서 ‘완전한 아르카디아’에 대한 완벽한 재현을 죽는 날까지 보여준 고흐는 진정한 예술가였다.
오베르 쉬르 우아즈 교회에서 고흐가 동생 테오와 함께 잠들어있는 공동묘지로 향하는 길은 오르막이면서 처연하기만 하다. 왼편으로 밀밭이 펼쳐져 있고 여름, 그가 죽은 칠월이 되면 저 밀 역시 추수할 때가 되어 황금물결을 이루겠지만, 그의 죽음을 알리는 저승사자처럼 까마귀 떼만이 허공을 가득 메우고 있다.
자신의 죽음을 예정하고 그린 「까마귀 나는 밀밭」의 풍경은 아직도 밀밭으로 남아있다. 한 예술가에 대한 농부의 경외심인지, 아니면 화가의 성소를 보존하려는 시 당국이 꺼내든 개발제한이란 노력 때문인지 알 도리는 없지만, 공동묘지 앞 그림 속 풍경은 여전히 밀밭인 채로 방문객을 맞고 있다.
오베르 쉬르 우아즈의 공동묘지엔 고흐 말고도 많은 예술가들이 묻혀 있다. 고흐로 인해 이 마을까지 와서 작품 활동을 하다 죽은 조각가, 화가들의 묘지는 화려하기만 하다. 그러나 정작 고흐의 무덤은 초라하기가 이를 데가 없다. 덩굴식물에 둘러싸여 겨우 무덤의 형태만을 보여주는 화가의 무덤은 공동묘지에서 제일 초라한 무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많은 방문객들이 찾는 무덤, 그곳엔 살아생전 우애가 남달랐던 한 형제가 함께 잠들어 있다. 무덤 위에는 방문객들이 갖다 놓은 꽃들이 수북이 쌓여있다.
살아생전 단 한 점의 작품만이 팔린 불행한 화가가 사용한 검정(고통), 노랑(자연), 파랑(숭고)은 삶의 고통을 상징함은 물론 그의 예술세계만의 모티프였던 자연에 대한 상징이자, 그의 예술혼이 지향한 궁극적 주제 숭고를 향한 열망이다. 그가 죽은 지 120년이 넘었지만, 작품으로 삶을 이야기한 화가의 초상은 ‘예술이 삶이고, 삶이 곧 예술’이라고 말하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