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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래된 타자기 Feb 01. 2024

모자이크, 타피스리, 세공품

앙드레 보느리가 들려주는 로마네스크 예술 이야기 93화

[대문 사진] 정복왕 기욤의 대서사시를 담은 자수


벽 장식을 위한 모자이크는 초기 기독교 시대의 교회 건축물들을 장식함에 있어서 가장 선호한 장식술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초기 기독교 시대에서 로마네스크 시대로 이행하면서부터는 모자이크 벽화는 상당히 드물게 제작되었죠. 그렇기는 하지만 눈부신 모자이크 장식이 로마네스크 시기에도 등장한 것은 확실히 이탈리아 남쪽에만 국한된 것이었습니다.


<결투 장면>, 12세기에 제작된 베르첼리(Vercelli) 산타 마리아 대성당 바닥돌 모자이크, 까미오 레오네(Camillo Leone) 박물관 소장.


위 사진 속의 모자이크에서 보듯, 로마네스크 시기에 건물 바닥에 엄청난 공을 들여 제작한 모자이크 장식은 보통 교회 내부 성소 둘레의 바닥을 장식하는데 응용되었습니다.


일찍이 해상왕국을 꿈꿨던 베네치아가 동방 세계와 교역하면서 비잔틴 예술을 받아들인 영향에 따른 것이기도 했죠. 로마 같은 경우에는 모자이크 장식술의 전통이 계속 이어졌으며, 11세기와 12세기에까지 눈부신 문예부흥에 힘입어 활기를 띠었습니다.


따라서 로마는 걸출한 예술가 장인들의 활동무대로 자리 잡아갔습니다. 초기 기독교 시대의 탁월한 예술가들에 비견되는 이 장인 예술가들은 산타 마리아 인 트라스테베레(Santa Maria in Trastevere) 수도원 교회의 소후진들의 뛰어난 벽장식들뿐만 아니라 산 클레멘테(San Clemente)의 눈부신 모자이크 벽화들을 완성하였습니다.


로마 산타 마리아 인 트라스테베레(Santa Maria in Trastevere) 수도원 교회 후진(왼쪽)과 산 클레멘테(San Clemente) 후진(오른쪽) 모자이크 장식.


유럽의 다른 지역에서는 바닥에 모자이크를 장식하는 기술이 개발되기도 했죠. 특히 이탈리아 코스메딘(Cosmedin) 예술가 장인들은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운 여러 색상의 대리석 조각돌들로 도로를 포장하기까지 했습니다. 심지어는 반암[1]으로 도로 표면을 기하학적 문양으로 장식하기도 했죠. 12세기에 완성된 로마의 산타 마리아 인 코스메딘(Santa Maria in Cosmedin)이나 산 사바(San Saba)는 이를 입증해 주는 좋은 예입니다.


산타 마리아 인 코스메딘(Santa Maria in Cosmedin) 대리석 모자이크 바닥(오른쪽)과 산 사바(San Saba) 성당 대리석 모자이크 바닥(왼쪽).


프랑스나 독일에서는 고대의 방식에 따른 모자이크 공법을 여전히 추구하였는데, 커다란 대리석을 잘라 만든 모자이크 끼움돌들을 사용하거나 흙을 구운 타일들이나 색돌들을 활용했습니다. 12세기 때 제작된 여러 빛깔을 띤 모자이크는 갸나고비(Ganagobie)의 프로방스 수도원 교회의 내진과 소후진들 일부 그리고 트란셉트에서 눈부시게 빛을 발합니다. 갸나고비의 모자이크는 얽힘 또는 엮음 장식 안에 자리한 전설에 등장하는 동물들 한가운데 말을 탄 기사들을 묘사하고 있죠. 이 역시 동양의 양탄자를 통해 전해진 모티프에 해당합니다.


<등에 교회를 짊어진 코끼리>, 갸냐고비(Ganagobie) 성당의 후진 바닥돌 모자이크, 1125년경.


이 후피(厚皮)동물에 속하는 코끼리와 나란히 묘사된 물고기들, 고양이과에 속하는 짐승들, 사슴과에 속한 짐승들, 날개 달린 짐승들, 또한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독수리사자, 반인반마, 용가리, 괴수들은 두 명의 기사들에게 덤벼들고 있습니다. 성당 바닥에 하얗고 검고 빨간 모자이크 끼움 돌들로 새겨놓은 형상은 선에 덤벼드는 악의 세력들을 상징합니다.


형형색색의 실로 수놓은 타피스리들은 벽화를 대신하여 벽을 장식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로마네스크의 타피스리를 보여주는 견본들은 타피스리라는 자체가 워낙 부드럽고 재질이 약해서 아직까지 남아있는 경우라 할지라도 거의 조각밖에 남아있질 않아서 그 실상을 전부 다 파악하는데는 어려움이 따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 2개의 타피스리가 눈길을 끕니다. 이 2개의 타피스리들은 그 크기가 엄청날 뿐만 아니라 아주 특별하기까지 한 것들이죠. 타피스리의 품질은 말할 것도 없고 보존상태도 아주 양호한 편입니다.


우선하여 예를 들자면, 바이외(Bayeux)의 타피스리라 할 수 있는데, 이 엄청난 크기의 타피스리는 정확하게 말하면 자수(刺繡)에 해당합니다. 전체 천의 면적이 35평방미터에 달하고 58개의 장면들이 긴 띠를 이루며 천 위에 수놓아져 있죠. 길이는 약 70미터에 달하며 폭은 50센티미터입니다.


정복왕 기욤(윌리엄)의 형제였던 오동 주교의 주문으로 제작된 천으로 만들어진 시트는 당시에 바이외 대성당에 전시되었고 정복왕 기욤이 영국을 정복하는 과정을 상세히 다루고 있습니다. 물론 노르망디 왕국의 입장에서 모든 것을 유리하게 묘사한 것만큼은 확연합니다.


영국 독립을 수호하고자 했던 영웅 해럴드는 하늘의 뜻을 거역함으로써 천벌을 받는다는 주제를 다루고 있는 이 자수는 성스러운 권위에 도전하는 자는 패망하고야 만다는 성서적 진리에 입각하여 그것도 쇠팔로 무장한 노르망디 전사들에 의해 멸망한다는 이들만의 서사를 수놓은 것입니다.


<해스팅스 전투 장면>, 바이외 타피스리(부분), 바이외(Bayeux) 자수박물관.


바이외의 타피스리는 당시의 생활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더할 나위 없이 귀중한 자료에 속합니다. 예를 들어 복식이라든가 건축, 물품, 선박 건조, 군대, 군사장비 등 이루 다 열거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11세기의 앵글로 노르망디 왕국의 실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더없이 귀중한 보물에 해당하죠.


오동의 지시로 영국에서 제작된 것으로 알려진 정복왕 기욤(윌리엄 1세)의 서사를 담은 자수, 노르망디 바이외 자수박물관.


또 하나의 자수는 천지창조의 타피스리라 불리는 것으로써 스페인의 제로나 대성당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습니다.


<천지창조의 타피스리>, 1100년경, 제로나(Gérona) 카테드랄 박물관.


타피스리 한가운데 자리한 예수 그리스도는 창조물들에 에워 싸여있습니다. 빛, 물, 흙, 동물들과 식물들, 아담과 이브가 등장하는 원 바깥으로 수놓아진 말 탄 네 명의 기사들이 뿔피리를 불고 있는 가운데 창조의 기운이 바람을 타고 숨 가쁘게 일고 있습니다.


가로 세로 길이가 12미터인 정사각형 자수는 원래 3개의 면으로 제작한 것입니다. 페레 데 파롤(Pere de Palol)에 따르면 제작 시기는 12세기입니다. 현재 남아있는 부분은 하느님 말씀(Logos divin)에 따라 세상이 창조된 것을 일종의 찬가 형식으로 제작한 것이죠. 정 가운데 자리한 작은 원안에는 창조주인 하느님이 앉아있고 그 바깥 둘레로 큰 원이 에워싸고 있습니다. 큰 원안에는 창조의 과정들이 형상화되어 있죠. 자수의 구성이나 도상(圖像)으로 볼 때, 고대인들이 즐겨 차용하던 준거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로마네스크 시대에 와서 특별 미사 전례나 축일을 기념하는 제식 때 사용할 성물함들을 위한 장식 세공품 역시 빈번하게 제작되었습니다. 실상 엄청난 숫자에 달하는 교회들이 자체적으로 공방을 설치하고 성골함을 제작하였다는 사실은 제식에 따른 새로운 요구가 점차적으로 증가함에 따라 상당량의 성물함들이 제작되기에 이르렀다는 것을 의미하죠. 예를 들어 성작들, 유골함들, 성물함들, 성반들 등이 이에 해당합니다.


성스러운 제기들에 대한 요구가 넘쳐나면서 금은세공 일도 활기를 띠어갔습니다. 가장 활기를 띤 지역은 라인 강 유역에 속한 지역들입니다. 뫼즈(Meuse) 강 계곡 연안지역에서 두각을 나타낸 고드프리두스 오리펙스와 같은 금은 세공인들은 놀라우리만치 멋지고도 세련된 세공품들을 제작하였습니다. 고드프리두스 오리펙스가 제작한 2개의 유골함들은 벨기에의 위(Huy) 성모 마리아 대성당에 보관되어 있죠.


벨기에 위(Huy) 성모 마리아 대성당 소장품인 성골함.


마찬가지로 레니에 드 위나 니콜라 드 베흐덩 같은 세공인들도 맹활약을 하였습니다. 스타블로(Stavelot) 수도원을 중심으로 한 모젤 강 유역은 금속판 바탕에 법랑[2]을 붓는 새로운 세공기술을 개발한 곳입니다. 이는 일찍이 리모쥬에서 발명된 도자기기술을 응용한 것입니다. 그 첫 번째로 완성을 본 것이 1145년에 쾰른에서 제작한 성물함입니다.


독일 쾰른(Köln) 대성당의 성물함.


쾰른은 당시에 아주 물질적으로나 영성적으로 풍요로운 주교좌 도시였습니다. 1170년경에 또 다른 금은 세공 기술의 중심지가 탄생했는데, 이곳에서 제작된 에리베흐 성인(Saint Héribert)의 유골함은 놀라운 솜씨를 유감없이 발휘한 경우에 해당합니다. 성골함은 모젤 강 유역에서 발명된 세공 기술에 장식을 더한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성유물에 속하죠.


프랑스로 눈을 돌리면, 12세기 때 금속에 법랑을 입히는 세공 기술자들이 맹활약을 하던 도시는 리모쥬였습니다. 이들이 제작한 성물함들은 모두 금은 세공품들에 도자기처럼 법랑을 입히는 기술이 발명된 덕분에 더욱 정교한 세련미를 지니게 되었죠.


금속판 우묵하게 꺼진 부분에 법랑을 입히고 구워낸 세공품은 – 이때 법랑을 입힐 우묵한 부분은 모티프들을 묘사한 윤곽선에 정확히 일치시켜야한다는 점에서 고도의 기술을 필요로 합니다. – 금속 조각용 끌과 동판 조각용의 강철 바늘로 움푹하게 파낸 자리에 법랑을 부은 것입니다.


이러한 기술은 칠보 자기를 만들 때 법랑을 입히는 기술과 연계된 것입니다. 황금판 위에 작은 금속 막대기를 이용하여 납땜을 하고, 금속으로 된 칸막이들에 의해 형성된 안쪽 공간에 철분이 섞인 도료를 입히는 기술이 개발되면서부터 더욱 활기를 띠게 되었습니다.


구리나 놋으로 만든 리모쥬의 법랑 세공품은 금으로 제작한 칠보무늬 법랑 세공품보다 가격 면에서 저렴하였습니다. 또한 유럽 전 지역에서 리모쥬에서 생산된 법랑 세공품을 높이 평가하기에 이르렀죠. 이러한 이유로 말미암아 법랑 세공 기술자들이었던 장인들은 점점 더 강렬한 색깔들을 입힘으로써 심미적으로 아주 뛰어난 품질을 자랑하는 세공품들을 제작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생산된 세공품들은 수도원들이 은밀히 보관하고 있던 성인들의 유골이 들어있는 성골함들이 대부분을 차지했습니다. 순례자들 또한 성골함들이 보관되어 있는 수도원들을 향해 나있는 길을 따라 긴 행렬을 이루어갔죠.


꽁끄(Conques) 수도원은 성물함 제작의 본산지였습니다. 1100년경부터 꽁끄 수도원은 이동이 간편한 제단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이는 수도원이 자랑하는 보물로써 금속판에 도료를 입히는 리모쥬에서 개발한 법랑 세공 기술을 예고하는 것이었습니다.


한편으로 다른 공방들에서는 품질이 아주 형편없는 세공품이 쏟아져 나오기도 했습니다. 이와는 다르게 에스파냐의 실로스(Silos) 수도원에서 활동하던 예술가들은 리모쥬 기술을 받아들여 그때까지 중단됨 없이 지속해 온 비잔틴 장식술에 접목시켰습니다. 왜냐면 비잔틴 장식 기술이 아무래도 리모쥬 기술보다는 우세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들은 또한 이슬람 예술이 기여한 장식술에 더해 그들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개발하기도 했죠.


생 꺌맹(saint Calmin)의 유골-성물함, 1168년경. 오베르뉴 지방에 위치한 모자크(Mozac)의 성 베드로 수도원.


위의 유골함은 나무판으로 만들어졌는데, 이를 다시 14개의 놋으로 제작한 금속판에 법랑을 입혀 덧씌웠습니다. 금속판에 유약을 입히는 법랑 세공 기술로 만든 유골함이자 성물함은 모자크 수도사들이 수도원을 창건한 칼미니우스(Calminius)와 나마디아(Namadia)를 기리기 위해 제작한 것입니다.




[1] 반암(班岩)은 반상(斑狀)의 구조를 지닌 화성암(火成岩)으로 보통 황색, 백색, 회색이며 알칼리 장석, 석영 등을 반정(斑晶)으로 하며, 운모, 각섬석(角閃石)을 포함합니다.


[2] 광물을 원료로 하여 만든 금속 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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