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래된 타자기 Mar 11. 2024

로마네스크 법랑 세공품

앙드레 보느리가 들려주는 로마네스크 예술 이야기 94화

[대문 사진] 법랑을 입힌 십자고상


법랑이란 금속 도료로써 금속 산화물들에서 얻어진 색조를 띤 유리 분말가루입니다. 코발트에서 청색을, 은에서는 황색을, 주석에서 흰색을, 구리의 서로 다른 산화작용 정도에 따라 터키옥(玉) 빛깔과 녹색, 붉은색, 검정 등을 추출합니다.


법랑을 입히는 기술은 차가운 유리 색조 분말가루를 금속판 위에 어떻게 입히느냐에 관건이 달려있죠. 금속판은 금, 은, 구리, 청동 등 다양합니다. 다음으로 색조를 띤 유리 분말가루가 금속판과 한데 용해될 수 있도록 열을 가합니다. 이때의 섭씨[1] 온도는 700도에서 800도 사이가 적당합니다. 이어서 용해된 금속 도료를 매개체를 이용하여 변질되지 않도록 응고시키고 유리처럼 접착시키죠. 이때 반투명이 되는 경우가 발생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불투명하게 고착됩니다.


금속 도료의 선명한 색채에 금속의 섬광이 결합하여 눈부시게 빛나는 법랑 세공품은 반들반들 윤이 나도록 만든 제품입니다. 그러나 간혹 조각을 새긴 세공품도 제작되었습니다. 아주 오랜 옛날 법랑을 입히는 기술은 칠보 무늬가 새겨진 자기를 만드는 정도였죠. 이 기술은 중세 초기에 발달했는데, 대부분 황금으로 만든 금속 표면에 같은 재질로 된 가느다란 줄무늬들을 접합시켰습니다. 이는 세공품의 측면을 기다란 줄무늬 띠로 장식하기 위한 방편이었죠. 세공품의 표면을 길고 섬세한 줄무늬 띠로 나눈 다음 띠 위에 보석들을 박아 넣은 장식술이었던 셈입니다.


꽁끄(Conques) 마을에 위치한 성녀 화(Foy) 수도원의 보물인 페팽(Pépin)의 유골-성물함.


성물함은 아끼텐느 국왕이었던 페팽 2세(864년 사망)가 기증한 것으로 프레퓌스(Prépuce) 성인의 유골들을 담은 성물함입니다. 사진의 것은 11세기에 다시 제작한 것입니다.


보니파스(1107-1121)가 수도원장일 때 꽁끄 수도원에서 처음으로 시도된 금속판 바탕에 법랑을 부을 자리를 파내는 기술은 로마네스크 시대에 앞으로 비용이 훨씬 저렴한 세공품을 제작할 수 있는 획기적인 기술이었습니다. 이 기술은 법랑을 부을 자리를 만들기 위해 금속 표면을 우묵하게 파내는 기술과 함께 측면 역시 긁어내는 기술을 가리키죠. 일반적으로 구리나 청동을 소재로 하여 기본 금속판을 제작할 때 두터워진 부분을 조각용 작은 끌로 파낸 자리에 법랑을 입히는 식입니다. 법랑을 입히지 않을 부분은 대체로 조각을 하거나 금박을 입혔습니다.


리모쥬는 1169년에 이미 최고의 품질을 자랑하는 이른바 리모쥬 산(産) 도자기(opus lemovicense)라 불리는 법랑 금속 세공품을 생산하는 중심지로 거듭났습니다. 리모쥬 지역의 공방들에서 생산된 법랑을 입힌 세공품들 대다수가 유골-성물함들이거나 병자가 영성체 할 때 사용하는 성작들, 십자고상, 수사본을 장정할 때 사용하는 금속판으로 제작한 책 겉장과 같은 종교적 제기나 수공품들이었습니다. 이렇게 제작된 세공품들은 유럽 전 지역으로 보급되었죠. 에스파냐의 실로스와 유럽 북부 지역에 속한 라인 강 유역과 모젤 강 연안은 법랑을 입힌 금속 세공품의 주요 생산지로 떠올랐습니다.


토마스 베케트(Thomas Becket) 성인의 순교 장면을 새긴 유골 성물함.


성물함은 12세기에 리모쥬(Limoges)에서 생산된 금박을 입힌 구리 판의 표면을 긁어내고 법랑을 부어 굳힌 세공품입니다.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캔터베리 대주교였던 토마스 베게트는 주교 서임권을 둘러싸고 헨리 2세 플랑타쥬네 국왕과 갈등을 빚다 국왕의 지시에 따른 암살자들에 의해 1170년에 살해당했죠. 대주교는 1173년에 성인으로 축성되었습니다.


13세기 리모쥬(Limoges)에서 제작된 법랑을 입힌 십자고상.
토마스 베게트의 암살을 다룬 장면, 유골-성물함(부분), 루브르 박물관 소장.


십자고상은 아비뇽(Avignon) 노트르담 데 동(Notre-Dame-des-Dom)[2] 대성당이 소장한 보물 가운데 하나입니다.



병자들을 위한 영성체 때 사용한 성작(聖爵)


13세기에 제작된 금박을 입힌 구리로 만든 세공품으로 두꺼운 표면을 긁어내고 법랑을 입혔습니다.  앙굴렘(Angoulême)의 샤랑트(Charante) 고고학 및 역사학회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1] 온도를 가리키는 섭씨(攝氏)라는 말은 스웨덴의 물리학자 셀시우스(Celsius)의 중국어 음역인 섭이사(攝爾思)에서 유래했습니다. 셀시우스는 물의 끓는점과 어는점을 온도의 표준으로 정하여 그 사이를 100 등분한 온도 눈금을 가리키죠. 단위 기호는 °C입니다.


[2] 동(Dom)이란 말은 라틴어 데오 옵티모 막시모(Deo optimo maximo)의 약자로 종교 건축에 새기는 봉헌의 경구로 사용된 “지극히 선하고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 봉헌하다.”란 뜻입니다.


작가의 이전글 까마귀 나는 밀밭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