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생미셸 가는 길 111화
냉기가 가득하다. 다시 비가 내린다. 일주일 내내 비가 내린다는 기상예보다. 이제 가을인가 보다. 여름은 가을에게 길을 내주고 먼발치로 물러난 느낌이다. 차가운 빗방울에 앙상히 몸을 떨던 여름 꽃 이파리들도 빗물에 젖어 길바닥에 힘없이 주저앉는다.
가을이면 새로 시작되고 바뀌는 건 무엇이 있을까? 길을 오가는 사람들의 차림새마저 옷소매가 길어졌다. 고국은 풍요로운 추석이 내일이라지만 유럽은 그것도 프랑스는 새 학년이 시작되고 회계연도가 새로 시작하는 그야말로 한 해의 터닝포인트다.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하는 이 가을을 인생의 전환점으로 삼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것은 사람만이 아니다. 만물이 다 그러하다. 꽃은 피어나고 지게 마련, 인생도 힘든 시기가 지나면 기뻐할 일만 남는 법인가?
각박함, 연이은 자연재해로 프랑스는 초토화되었으나 아직 코로나가 종식된 건 아니다. 코로나는 참 많은 세상의 변화를 가져왔다. 산불, 들불로 인해 몸살을 앓는 곳은 지구상 어느 한 곳만이 아니다. 폭우와 장마로 힘든 것도 어느 한 지역만의 일이 아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전 세계를 쑥대밭으로 만든 건 코로나다.
벌써 3년 전 일이다. 코로나가 창궐하여 전 세계를 강타하고 어느 누구 한 사람 예외 없이 불안과 공포에 떨게 만들고 수많은 생명을 앗아간 전 인류의 재앙이 지구상 곳곳을 강타한 지도 어느새 3년이 되었다. 세계 인류는 아직도 그 공포에서 헤어 나오질 못하고 있다. 지금 내가 머물러있는 관광대국 프랑스, 세계에서 제일 많은 여행객들로 붐빈다는 파리가 텅텅 비었다는 사실, 나는 그 엄연한 현실을 한사코 부인하고 싶었을 따름이다.
매일 마스크를 쓰고 다니며, 죽음의 그림자가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는 공포에 전율하면서 아침마다 죽음이 또 하루 유예되었다는 사실에 감사할 수밖에 없었던 일상이라면 일상, 그런 와중에 아버지는 결국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운명하시고 말았다. 가족의 일원으로 항상 자상한 마음으로 온기를 전해주던 동서 형님 역시 코로나로 인해 평소 앓던 질환이 심해져 세상을 뜨고 말았다.
오도 가도 못하는 타국에서 아이처럼 눈물진 밤을 지새우고 유리창너머 동쪽하늘이 밝아올 적마다 무기력한 자신의 타성에 젖은 체념에 스스로 분노하는 날들만 점점 길어져 가던 순간,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는 것이 인간의 의지에 따른 것이라면, 그렇잖아도 험악한 시국에 지상에 날벼락을 떨어뜨린 신의 의지는 과연 어떤 의도일까 나는 회의했다.
이제 모든 걸 운명으로 돌려야 할 때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숙명으로 여겨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죽음 앞에선 겸허해질 따름이다. 내 죽음의 시간은 늦춰졌을 뿐이다. 코로나로 새처럼 세상을 훌쩍 날아가 버린 친구 앙드레를 추모하는 건 먼저 떠난 친구에 대한 미안한 마음 때문이다. 홀로 살아남은 자의 미안함! 장례식조차 못 간 서러움!
코로나는 나를 가족과 친구와 지인으로부터 갈라놓았다. 사회로부터 나라는 존재를 철저히 격리시켜 버렸다. 그리고 매일같이 삶이 연장된 것을 기뻐해야 하는 이 어처구니없는 일상들을 힘겹게 견뎌가면서 내 스스로를 이해시키고 다독이는 법마저 잊고 살았다.
삶이 연장된 것이 아니라 죽음의 시간이 늦춰졌을 뿐, 변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죽음의 시간을 늦춘 건 그러나 세 번의 백신이 아니라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아껴주고 보살펴준 아내 덕이란 사실을 깨닫기까지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격리당한 사회에 다시 발을 들여놓고 글 쓰고 조금은 건강해진 몸으로 이리저리 쏘다니듯 다시 여행길에 나설 수 있는 것 또한 온전히 그녀의 보살핌 때문이라는 사실, 진정 마음속에서 우러나온 고마움을 나는 그 어떤 형식을 빌려서라도 아내에게 전하고 싶었다.
천 년 전
기욤과 마틸드가
결혼을 한
샤토 유(Eu)를 그려봅니다.
천 년이 흘렀건만
우리들 가슴속에 남아있는
두 사람처럼
우리 역시
누군가가 기억해 주는
사랑이고 싶습니다.
2023년 8월 여름 남편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