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생미셸 가는 길 183화
[대문 사진] 그림엽서 속의 트루빌 쉬흐 메흐
파리에서 나름 글 깨나 쓴다는 이들이 모여 화기애애한 저녁 모임을 가진 어느 날 카페에서의 일이었다. 나이가 꽤 지긋한 선배가 약간 취기가 도는 음성으로 말했다. “만일 프랑스에서 계속 살아야 한다면 트루빌에서 살고 싶다.” 말년을 어디서 살고 싶은 지 여럿이서 각자 진지한 의견들이 분분하게 오가던 자리였다.
트루빌[1]이라! 트루빌이 어떤 매력이 있는 곳이길래 그의 마음을 흔들어 놓은 걸까? 이어지는 어조에는 힘까지 실려 있었다. “조용하고, 깨끗하고, 인심 좋고, 해물도 싱싱하고”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피서객들이 몰려들어 번잡한 곳은 아닐까? 물가가 다른 곳에 비해 비싸진 않을까? 만일 그런 곳에 산다면 하루 종일 무얼 하며 살아야 하나?”
결국 선배는 그곳으로 이사 가지 못했다. 그보다 좀 더 나이 든 선배는 마침내 파리 생활을 정리하고 충북 옥천 어디쯤인가 과수원을 경영해 보겠다고 떠났다. 그보다 나이가 아래인 덩치 큰 체구에 도수 높은 안경을 낀 선배는 코로나 이후로 소식마저 뜸해졌다. 어쨌든 아직도 트루빌로 향하지 못한 그 대신 내가 트루빌로 향하는 열차에 몸을 싣고서 이 오래된 바닷가 어촌마을을 다시 떠올렸다.
기차는 파리 생 라자르 역을 출발하여 리지외를 거쳐 트루빌-도빌에 닿는다. 이웃한 도빌은 트루빌과 경쟁관계인 마을이다. 나폴레옹 3세 때 파리 정비사업에 적극 협조했던 파리지앵들을 위한 여름 휴양지로 개발한 도시가 도빌이다. 뚜크 강을 사이에 두고 나뉜 두 마을은 여행자의 눈에 한 도시로 보이기 십상이지만 엄연히 역사가 전혀 다른 도시들이다.
도빌은 트루빌에 비해 역사가 짧다. 하지만 지금은 프랑스에서 제일 번듯한 도시다. 이에 비해 트루빌은 오랜 역사를 품은 어촌 고유의 정취를 아직도 잃지 않은 보기 드문 마을이다.
내가 처음 이 마을을 찾은 것은 1995년 어느 봄날이었다. 아마도 일을 마치고 며칠 간의 휴식을 취할 수 있어서 아내에게 다음날 아침 도빌로 떠나자고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내는 도빌을 독일에 가는 줄 알고 “여권을 준비해야겠네요?”라고 응수했다. 그러한 그녀의 말에 이렇다 할 대꾸도 없이 하룻밤 자고 올 테니 짐을 챙기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만 이야기했던 것 같다.
다음날에도 내 충청도 사투리 억양이 섞인 프랑스 어 발음은 도빌에 도착할 때까지 그녀에게는 독일로만 들렸다. 독일에 친구들이 살고 있으니 그녀가 도빌을 독일로 착각해도 무리는 아니었다. 내 인생에 처음 찾아간 도빌은 트루빌 바로 옆에 이웃해 있었다. 이어 도빌보다는 트루빌을 찾아가는 횟수가 늘어갈수록 새삼 깨달았다. 이 두 도시가 성격이 전혀 다른 도시임을 알게 되었다.
나는 지금도 트루빌에 왜 그 많은 문학 예술인들이 들끓었는가를 생각한다. 이 도시가 어떤 매력이 있길래 내로라하는 사람들이 이 바닷가까지 몰려들었을까 생각했다. 트루빌을 찾은 문학 예술인들을 손꼽으라 한다면 손가락이 모자랄 정도다. 『삼총사』의 작가 알렉상드르 뒤마를 비롯하여 평생 단 한 편의 장편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을 펴낸 마르셀 프루스트가 제일 먼저 떠오른다. 다음으로는 마을에 조각상까지 남긴 『보바리 부인』의 귀스타프 플로베르로 이어진다. 그뿐만이 아니다. 20세기 베스트셀러 작가였던 마그리트 뒤라스(나는 그녀의 소설을 좋아하지 않는다.[2]) 역시 이 트루빌에 거주하다시피 했다. 그녀가 머물던 호텔 입구엔 그녀의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들을 위해 명판까지 걸어놓았을 정도다.
화가들을 거론하자면 인상주의의 선구자 으젠 부댕, 에두아르 마네, 클로드 모네, 오귀스트 르누아르, 귀스타프 까유보트, 사실주의 화가 쿠르베를 비롯하여 바르비종파 화가 코로 그리고 점묘법의 대가인 조르쥬 쇠라, 그의 더 없는 친구였던 폴 시냐크는 물론이고 20세기 앙드레 함부르크까지 트루빌을 거쳐가지 않은 화가가 없을 정도로 트루빌 해안은 화가들의 전당이요 영감의 원천이었다.
귀스타프 플로베르가 여기서 스치듯 지나가는 젊은 여인에 한눈에 반해 그의 대표작들의 주인공을 그녀를 모델로 삼은 일화는 작가의 전기마다 되풀이되는 에피소드다. 반면 이방인인 나 역시도 내 평생의 반려자인 시인이자 소설가이며 역사학자인 여인과 함께 처음 이 도시를 찾아왔다.
나 역시도 여기서 많은 글을 썼고 새로운 글에 대한 영감을 얻기까지 했다. 심지어는 나의 반려자 옆에서 그림을 그리면서 역사 기행 에세이를 풀어갈 것까지 구상한 것이다. 그렇듯 지금 연재하고 있는 여행에세이의 시작도 트루빌에서 시작되었다.
트루빌은 저 아득한 천 년 전부터 사람을 끌어 모으는 묘한 매력을 지닌 도시였다. 영국을 평정한 노르망디 공국의 일인자였던 기욤은 트루빌을 출발한 선단에서 앞으로 영국 땅에서 자신이 윌리엄으로 불릴 것임을 천명했다. 전쟁의 달인이면서 천부적인 지략가였던 동시에 문화 지상주의자이기도 했던 그는 문맹의 시대에 문자의 힘을 깨달았던 보기 드문 바이킹의 후손이었다.
당시 제일의 문명을 프랑스와 영국에 걸쳐 두 왕국으로 이어 놓은 그의 업적은 영국 프랑스 양국의 역사서를 물들이기에 충분했다. 오늘날 노르망디 지명이 거의 대개가 바이킹들이 사용하던 어휘에서 기원하였음은 이를 입증하고도 남는다. 예를 들어 이 마을의 지명만 해도 ‘신(神)’을 뜻하는 바이킹의 언어에서 기원한 Trou와 ‘도시’를 뜻하는 Ville이 결합하여 Trouville이라는 지명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 같은 지명은 노르망디 전역에서 발견된다.[3]
그런 바탕 위에서 중세가 저물고 근, 현대사가 이어졌다. 트루빌은 영화 촬영의 무대가 되었다. 인근의 도빌에서는 국제 영화제가 매년 열린다. 우리의 영화감독들이 이곳 영화제에서 수상한 경력은 쌓여만 간다. 성공한 프랑스 가수 자니 할리데이가, 최고의 명성을 얻은 제라르 드파르뒤유까지 트루빌을 좋아했던 것은 그리 실감 날 일은 아니나 문학예술인들이 드나들었다는 <증기선(Les Vapeurs)> 식당이나 마그리트 뒤라스가 식사를 하던 중 종이 식탁보에 끄적이는 걸 좋아했다는 <도심(Le Centre)> 레스토랑이 아직도 영업 중이라는 점은 감동으로 다가온다. 나 역시 이곳에서 무던히도 노르망디 해물 요리를 즐겼다.
이 조그만 어촌 마을을 그래서 한 바퀴 둘러보는 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 것이다. 겨울비가 줄줄 내리는 계절을 마다하고 마을을 찾아 하루는 플로베르 호텔에서, 하루는 메르퀴르 호텔에 묵으면서 마을 이곳저곳을 찾아다녔다. 탐사의 갈망은 다름 아닌 묵은지에 싸 먹는 홍어 맛 같은 마을에 대한 진득한 입맛 때문이었다. 그렇듯 트루빌은 내 입맛에도 어울리는 향과 맛을 지닌 마을이었다. 그 향기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답사하기 시작하면서 트루빌은 더 강한 향과 맛으로 다가왔다.
[1] 트루빌은 트루빌 쉬흐 메흐(Trouville sur Mer)를 줄여서 부르는 지명이다.
[2] 피에르 브뤼넬 역시 오늘날의 프랑스 문학을 진단하면서 마그리트 뒤라스의 「정인(情人, L'Amant)」이 공꾸르 상을 수상한 것에 대해 ‘문체의 단순 조잡함’과 ‘주제의 천박함’을 이유로 그녀의 소설들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피에르 브뤼넬(Pierre Brunel) , 『프랑스 문학의 오늘(La littérature française aujourd’hui)』, 뷔베르(Vuibert) 출판사, 1997, 파리, 85-96 쪽 참조.
[3] 장 르노(Jean Renaud), 『바이킹들이 이룩한 노르망디(Normandie de Vikings)』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