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생미셸 가는 길 184화
[대문 사진] 쿠르베, 트루빌 바닷가 풍경, 1867
이곳은 트루빌, 소설가의 이름을 딴 <플로베르 호텔>이다. 창밖엔 비가 내리고 다행히 겨울비가 아니라 봄비라서 쓸쓸한 감정이 앞서기보다는 새벽의 들뜬 마음마저 차분히 가라앉는다. 나무로 된 마룻바닥을 밟고 지나다니는 삐그덕거리는 소리만 아니라면 아침의 상쾌함에 빠져들었을 것이다. 아침 내내 마룻바닥을 밟고 지나다니는 소리가 온 호텔에 공명하고 있다. 이런 소란스러움 속에 늦잠을 잔다는 것 또한 무리다. 동이 트자마자 식당으로 내려가 우유를 탄 커피와 함께 버터를 듬뿍 바른 바게트 빵과 마주한다. 간밤의 술기운을 가라앉히고 공복을 달래기에는 어부들이 개발했다는 생선수프가 최고지만, 빗속에 호텔 아침식사를 놔두고 굳이 인근의 카페 레스토랑까지 찾아가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건설현장에서 하루를 시작하는 노동자들은 새벽 인근의 카페에서 아침식사를 한다. 카페 바텐에 서서 버터만 바른 빵, 이른바 타흐틴(Tartine)이라는 바게트 빵으로 아침을 때우는 모습은 여러 도시들을 여행하며 마주친 흔한 풍경이다. 그들보다 행복하다고 결코 단정할 수 없는 나 역시도 하루하루를 그렇듯 밖에서 일하면서 아침마다 카페 바텐에 서서 급히 에스프레소 한 잔에 버터 바른 바게트 빵을 베어 물곤 했다. 이제 긴 휴식처럼 주어진 이 무노동의 휴지를 이용하여 화가들이 화폭에 담은 트루빌 쉬흐 메흐(Trouville sur Mer)에 와 있을 뿐이다.
호텔방으로 돌아온 뒤에는 모든 일정을 취소한다. 비를 맞으면서까지 해안을 거닐 기분이 아니다. 아무리 봄비라지만 빗속에 골목길을 누빌 이유조차 없다. 이럴 때는 조용히 방 안에서 간밤에 그린 그림을 고쳐 그리거나 해안 마을에 흘러들어와 바닷가 풍경을 화폭에 담은 화가들의 그림을 찬찬히 음미해 보든지, 여행용 가방 속에 든 두툼한 책을 꺼내 읽어보는 일에 더 마음이 이끌린다.
마룻바닥 삐그덕 소리만 아니라면 독서 또한 매력적인 일일 수도 있겠다. 아침은 물론이고 하루 종일 삐그덕거리는 소리가 환청처럼 귓가를 맴돌지도 모른다는 지레짐작으로 애꿎게 트루빌 바닷가 풍경을 그린 화가들의 그림들을 수록한 화집을 펼쳐든다.
트루빌을 화폭에 담은 화가들 중에 유난히 귀스타프 쿠르베가 그린 트루빌 바닷가 풍경이 시선을 끈다. 프랑스 동쪽 오르낭(Ornans)에서 태어난 화가는 파리로 상경하여 본격적인 화업을 계속하던 중, 나폴레옹 3세가 참관하는 <살롱 도똔느(Sanon d’automne)>에 「오르낭의 매장」을 출품했다. 고향의 장례식 장면을 그린 이 대형 그림은 당대 그림깨나 그린다는 화가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겼다.
리얼리스트였던 화가는 예술인민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프랑스 진보적인 화단을 이끌던 중 파리 코뮌 시기에는 나폴레옹의 권력에 맞서다가 결국 파리 방돔 광장에 세워진 <나폴레옹 전승비>를 세느 강에 빠뜨린 죄로 재판부로부터 원상복구 판정을 받는다. 엄청난 원상복구 비용을 지불할 수 없었던 화가는 절박하고도 비참한 상황에 쫓겨 스위스로 도망치는데,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레만 호 인근의 마을에서 망명생활을 하다 쓸쓸히 생을 마감한다. 그처럼 화가는 극렬 사회주의자적 면모를 지닌 예술혁명가였다. 그런 그가 어느 날 노르망디의 바닷가를 찾아와 그린 그림이 「트루빌 바닷가 풍경(Plage à Trouville)」이다.
그의 그림이 입증하듯 쿠르베는 당대 어느 누구도 흉내 낼 수 없을 정도로 힘찬 필력을 지닌, 어느 한 군데 소홀한 구석이 없는 정밀화를 그린 대단한 화가였다. 또한 이 사실주의 화가는 당시에 주로 다루던 인물화의 소재주의 화풍을 완전히 타파한 가장 진보적인 화가이기도 했다.
나폴레옹 3세 치하의 벨 에포크 시대의 우아하고도 고상한 아취에 사로잡힌 환상에 시달리면서 귀족 차림을 한 남자들이나 우아한 복장을 한 여성들을 그리던 당대 화풍의 유행에 맞서고자 염포로 싼 시신을 담은 관을 땅에 ‘매장’하는 장면을 지켜보는 시골 마을 사람들을 주인공 삼아 그림을 그린 화가, 그리고 이 파격적인 주제를 담은 대형 그림이 <살롱 도똔느>에 출품되자 이를 지켜보던 심사위원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당연히 나폴레옹 3세가 관전할 전시회에서 출품조차 거부당한 그의 그림 속 주인공은 다름 아닌 그의 고향 마을 주민들이었던 탓이다.
굳이 비교하자면, 「감자 먹는 사람들」을 그린 빈센트 반 고흐가 쿠르베의 이 그림을 알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그리 중요하지가 않다. 화가가 일상에서 마주친 장면을 화폭에 담았다는 점에서 고흐의 「감자 먹는 사람들」이나 쿠르베의 「오르낭의 매장」은 동일선상에 놓인다. 쿠르베는 “당대의 예술 코드를 잔인하게 비판하면서 일상의 장면에 역사화의 차원을 부여한”[1] 작가였다.
그의 화풍은 인물화든, 풍경화든 사실적 묘사에 입각하여 세밀하게 그린 그림이다. 어느 한 구석 빈틈없는 이런 치밀함이 저 이탈리아의 반항아 까라바조를 떠올리게까지 만든다. 그의 그림에는 예술과 혁명에의 에너지가 충만하여 어둔 색조로 인물이나 장면을 강조하다 보니 그림 전체 분위기가 대체로 어두울 뿐만 아니라 강한 붓질에 숨이 막힐 정도다. ‘파도’를 그린 그림도 곧 해안을 뒤덮을 것처럼 강한 역동성을 지니고 있다. 그림 전체의 톤이 너무 강해 그의 격렬한 예술적 충동에 감정이입을 하지 않고서는 그의 그림조차 제대로 바라볼 수 없는 현기증마저 인다.
그런 그가 어떻게 「트루빌 바닷가 풍경」 같은 부드럽고도 섬세한 그림을 그렸을까?
이 그림은 쿠르베가 1865년 여름 트루빌에 체류하며 그린 그림이다. 이때 쿠르베는 평온한 시기를 관통한다.
“1850년대 초 쿠르베는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는 몽펠리에 출신의 부유한 수집가인 알프레드 브뤼야스(Alfred Bruyas, 1821-1877)를 만났고, 그가 화가의 후원자가 되면서부터 경제적으로 완전히 독립하여 많은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쿠르베는 브뤼셀, 베를린, 비엔나 등지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풍경화가로 인정받은 그는 이 시기에 「사슴 사냥 몰이 함성(Hallali du cerf)」(1867)[2]과 같은 사냥 장면과 「잠(Le Sommeil)」(1866)[3]과 같은 누드화로 갈아탄다. 이러한 주제의 풍부함이 그의 예술의 보폭을 한층 넓혀 놓는다.”[4]
첩첩산중 산골짜기 시골 마을에서 자란 화가가 처음 바닷가를 찾은 건 1841년이다. 고향 친구인 위흐뱅 뀌에노(Urbain Cuenot)와 함께 이 해에 노르망디의 르 아브르를 찾아 처음으로 바다를 접했다. ‘물’은 쿠르베의 삶과 작품을 관통하는 아주 중요한 모티프다. 그의 고향 오르낭은 루(Loue) 강이 마을 한가운데를 가르며 흐르며 샘, 폭포, 호수, 강뿐만 아니라 개울, 실개천으로 가득한 곳이다.
르 아브르에서 처음 바다를 발견한 쿠르베는 “수평선조차 없는 바다는 산골짜기에서 자란 내게 너무나도 경이로운 곳이었다”라고 술회하고 있다. 이때 바다를 발견한 그는 트루빌에서 여름휴가를 보내면서 바닷가에서 그림을 그리며, 심지어는 몽펠리에에서 지중해를 발견하고, 생통쥬의 샤랑트는 물론 스위스 망명 생활을 할 당시에도 레만 호가의 시옹성을 화폭에 담을 정도로 ‘물’에 대한 깊은 관심과 애정을 보여줬다.
다시 쿠르베의 「트루빌 바닷가 풍경」으로 돌아가면, 그림에 등장하는 유일한 등장인물은 조개를 캐는 단 두 명의 인물뿐이다. 으젠 부댕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화려한 옷차림을 한 상류층 여인들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오직 풍경만을 고집하여 그린 것이다. 이런 시류에 영합하지 않는 화가의 고집스러움이 그대로 표현된 작품이 「트루빌 바닷가 풍경」이다. 비록 호황을 누리던 카지노가 그에게 숙소를 제공할 만큼 쿠르베 인생에서 유일하게 물질적으로 풍요로웠던 이 시기에조차 화가는 시류에 영합하는 어리석은 우는 범하지 않았다.
반면 으젠 부댕은 성공하고 싶어 그림마다 상류층 여인들을 집어넣었다. 이점이 상류사회에 속하거나 동경하던 이들로 하여금 그의 그림을 사게 만들었고 부댕 역시 성공가도를 달릴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심지어 클로드 모네까지도 당시 유행하는 우아한 분위기를 화폭에 담았다. 그러나 쿠르베의 고집스러움은 시대를 훌쩍 넘어 지금까지도 진솔한 풍경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고집스러움! 화가의 극단적 정치성향은 결국 그의 삶을 파국으로 몰고 갔다. 예술에의 혁명만이 아니라 사회 체제의 전복을 기도했던 그의 정치적 삶이 결국 ‘망명’으로 종결되었기 때문이다. 정치가이자 동시에 예술가였던 쿠르베는 망명지에서조차 그의 고집스러움을 꺾지 않았다. 레만호가에서 쓸쓸히 죽어간 화가의 장례식에는 그 어느 유명인사도 참석하지 않았다. 파리 오르세 미술관에 걸려있는 상당수의 작품들도 실상을 알고 보면 나폴레옹 전승비 원상복구 비용으로 청구한 벌금 때문에 벌어진 해프닝, 즉 국가가 벌금 징수라는 차원에서 그의 작품을 압류한 결과였다. 그는 죽을 때까지 그만의 고집스러운 예술가의 삶을 고독하게 걸어간 화가로 기억된다. 이러한 화가들이 몇 명 더 있기는 하지만.
인물이 제거된 그림, 그저 단순한 화면엔 오직 조개 캐는 이들밖에 없는 그림, 구름 속에 부드러운 분홍빛 햇살이 힐끔거리는 하늘, 멀리서 동쪽을 향해 바람이 부는 가운데 돛을 활짝 편 두 척의 배, 백사장으로 밀려오는 파도 이게 전부다.
그러나 그의 그림은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림을 자세히 보자. 어느 구석 하나 빈틈이 없다. 화면 구성이나 묘사는 이런 치밀함에 있다고 인상주의 도래 앞에서 그가 절규하는 듯하다. 그럼으로써 그는 리얼리스트가 된다. 세상을 바로 보고자 했던 화가, 구태의 악습을 되풀이하는 것에 진절머리를 느꼈던 화가, 소외당한 이들을 보듬고 싶었던 화가, 예술의 지방주의를 정치적 논쟁의 화제로 삼았던 화가, 당대의 그 어느 정치인보다 진보적이었던 화가, 정말 그림을 잘 그렸던 화가, 내가 노르망디를 대표하는 으젠 부댕을 좋아하지 않는 이유는 잘 차려입은 여인을 그리지 못해 환장 들린 사람처럼 유난히 상류층 여인네들만 등장하는 바닷가 풍경을 그렸다는 점 때문이다.
이러한 나의 예술적 기호가 상류층을 혐오하고 배척하고 싫어하기 때문이 아니라는 점만큼은 분명하다. 단지 그 여자들에 가려 바다가 제대로 보이질 않는다는 점 때문이다. 더군다나 양산을 펼치고 있는 여성이 등장하기라도 하면 바다는 그저 배경에 지나지 않는다. 그놈의 양산 때문에 바다가 제대로 보이지 않는 것이다. 파라솔이 눈에 거슬려 바다가 제대로 보이지 않는 것이다. 반면에 쿠르베처럼 바다를 바다답게 그린 화가가 또 어디에 있겠는가? 그의 그림을 바라보면 그런 사실까지도 깨달을 수 있다. 내가 그의 그림 속 풍경을 음미하면서 깨달은 화가와의 동일시는 바로 그런 깨달음에서 비롯한다.
[1] 「귀스타프 쿠르베는 누구인가?」, 오르낭(Ornans) 쿠르베 미술관.
[2] 브장송 조형미술 및 고고학 박물관(Musée des Beaux-arts et d'Archéologie de Besançon) 소장.
[3] 파리 프티 팔레(Petit Palais) 시립 미술관 소장.
[4] 「귀스타프 쿠르베는 누구인가?」, 오르낭(Ornans) 쿠르베 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