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생미셸 가는 길 196화
[대문 사진] 도빌 미국 영화제 개막식 장면
도빌에서는 해마다 국제 영화제가 열린다. 공식 명칭은 Festival du cinéma américain de Deauville로 우리말로 옮기면 ‘도빌 미국 영화제’다. 축제 형식으로 진행하는 이 영화제는 1975년부터 한 해도 거르지 않고 가을이 시작되는 9월 열흘 동안 도빌의 해안에서 개최되고 있다. 바리에르 그룹과 도빌 시의 지원을 받아 축제 형식으로 화려하게 펼쳐지는 이 영화제에 미국 할리우드 영화계의 스타들이 참석하기 시작하면서 그 명성을 해마다 더해가고 있다.
프랑스 영화제인 깐느 영화제와는 달리 도빌 영화제에는 왜 미국 영화제라는 공식 명칭이 붙었을까? 도빌 미국 영화제의 개최 목적은 프랑스에서 대규모 미국 프로덕션을 위한 발판을 만들고자 하는 데 있었다. 지금도 그 기능을 포기하지 않고 각종 상을 통해 미국 독립 영화를 홍보하고자 적극적이다.
프랑스는 영화란 장르를 탄생시킨 나라다. 그의 위상에 걸맞게 깐느 영화제는 이미 세계적인 프랑스 영화제로 알려졌다. 이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영화는 전 세계적으로 많은 관객층을 형성하면서 예술성이 농후한 영화로 인식되기 쉽상이다. 심지어 깐느 영화제 시상식은 미국의 아카데미 시상식과 비견되기까지 한다.
1929년부터 미국 및 국제 영화 제작의 우수성에 경의를 표하기 위해 매년 로스앤젤레스에서 거행되는 아카데미 시상식이나 프랑스 영화의 국제적인 명성을 드높이고자 개최되는 깐느 영화제는 영화 팬들의 열렬한 관심 속에 사랑받는 영화제가 된 지 오래다. 이에 비해 도빌 미국 영화제는 역사가 짧다. 그럼에도 도빌 미국 영화제가 단지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연관된 것만은 아니라는 점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파리 오페라 지구 스크립(Scribe) 호텔 벽면에는 뤼미에르 형제(frères Lumière)가 영사기를 발명했다는 사실을 기억시켜 주는 명판이 붙어있다. 미국 할리우드에서 제작된 영화가 전 세계의 영화관에서 동시 상연되는 현실에서, 대한민국 영화가 전 세계의 영화 팬들을 사로잡고 있는 21세기 상황에서 이 기념비가 갖는 의미는 흥미롭다 못해 호기심까지 유발한다.
1895년 12월 최초로 영상을 대중 앞에 선보인 지 6개월 후 미국으로 건너간 뤼미에르 형제는 1896년 6월 18일 뉴욕에서 최초의 영화를 상연한다. 그러자 이를 본 이들은 충격과 감동에 빠졌고 뤼미에르 형제가 상연한 영상은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뤼미에르 형제가 제작한 영화가 미국 전역에서 호황리에 상연될 조짐을 보이자 이를 지켜본 세계 최초로 축음기를 발명한 토마스 에디슨(Thomas Edison)은 발명 특허가 자신에게 우선권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미국인을 위한 미국’을 강조하고 나섰다.
실상 그의 조수였던 윌리엄 케네디 로리 딕슨은 세계 최초의 영화감독이었으며, 이미 148편의 영화를 제작하고 촬영하여 키네토그래프 카메라로 녹화하고 키네토스코프(돋보기로 보기)를 사용하여 대중이 개별적으로 볼 수 있도록 준비해 둔 상태였다. 결국 에디슨에 의해 촉발된 ‘특허 전쟁’은 이듬해 뤼미에르 형제로 하여금 미국을 떠나도록 만든 계기가 되었다.
프랑스에 돌아온 뤼미에르 형제는 1902년에 결국 영화 제작을 중단하고 말았는데. 이는 두 사람이 영화가 앞으로 이 지구상에서 얼마나 중요한 장르로 부상할지를 전혀 예감하지 못한 결과였다. 더해 두 사람은 영화라는 이 새로운 언어를 스스로 이해하지 못한 결과이기도 했다. 반면 토마스 에디슨은 이 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며, “영화는 훗날 인류 문화의 기둥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 온 미국 영화는 이제 세상을 지배하는 가장 강력한 문화예술의 무기가 되었다. 21세기 프랑스 노르망디의 해안가에서 열리는 영화제에까지 미국이란 말이 들어갈 정도로 미국 영화는 유례가 없을 정도로 전 세계 팬들을 폭넓게 확보했음은 물론 할리우드를 지구상에서 최대의 영화 산업의 메카로 확고하게 자리 잡게 만든 것이다.
영화는 훗날 인류 문화의 기둥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다.
- 토마스 에디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