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생미셸 가는 길 199화
[대문 사진] 도빌 레 프랑치스캔느 시립 도서관
호텔방에서 읽는 책 한 권, 책 마지막 페이지에는 “1998년 9월 13일 빠리에서 다시 읽다”라는 연필로 적은 글귀가 눈에 띈다. 그해 가을 나는 왜 이 책을 집어 들고 독서 삼매경에 빠졌던 것일까? 9월 13일엔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도저히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나지 않는 건 다시 책을 읽은 날짜까지 적어놓은 것은 분명 습관에 의한 행동이었을 것이라 짐작하지만, 왜 책꽂이에 꽂혀 있는 그 많은 책들 가운데서 굳이 이 책을 택해 꺼내든 것일까에 대한 의문은 여태껏 풀리지 않고 있다.
생각은 수수께끼처럼 스스로 묻고 답하는 가운데에서도 기억 속을 밑돌기만 한다. 지금 여행 중에 똑같은 책을 다시 꺼내드는 것도, 처음 여행을 준비할 때 책을 여행가방에 넣은 것도, 아니 날씨마저 화창한 날에 외출도 하지 않고 호텔방에 뒹굴며 가방에 넣어두었던 책을 다시 꺼내 읽는 것도 이해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모든 것이 모호하고 애매하고 불분명하고 부조리하기까지 하다. 생각이란 것도 어떤 계기가 주어져야 발생하는 것이다. 이러한 모호함과 애매함과 불분명하며 부조리하기까지 한 존재의 균열 상태를 어떡하든지 벗어나려 발버둥 치지만 기대는 그 처음의 의지마저 저버리고 만다. 다만, 스스로와의 약속이 다시 되풀이된다. 확실하고 명확하고 분명하고 구체적이기까지 한 ‘명제’를 떠올리고 그 ‘믿음’을 지켜 가기로 하자.
펼쳐 놓은 책을 다시 읽어간다. 거기에는 여행 중에 의문에 사로잡혔던 모호한, 애매한, 불분명한, 불합리한 생각에 답을 줄 수 있는 글귀가 혹시 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이 앞서 책장을 넘기기를 재촉한다.
동시성(同時性)의 체험
현대의 시간 경험은 무엇보다 우리가 그 속에 던져져 있는 순간의 의식, 즉 현재의 의식이다. 오늘의 인간에게는 모든 시사적인 것, 동시대적인 것, 현시점에 함께 얽혀 있는 것들이 특별한 의의와 가치를 지닌다. 그리고 이러한 의식에 차 있는 까닭에 동시성이란 사실 자체가 그의 눈에 새로운 의미를 지닌다. 중세의 정신세계가 내세지향(來世指向)의 기분으로 찼었고 18세기 계몽운동기의 지적 풍토가 미래에 대한 기대감에 차 있었던 것처럼, 현대인의 정신세계는 직접적 현재와 동시성의 느낌에 젖어 있다. 그는 갖가지 사물 및 사건의 끊임없는 접촉과 상호작용에서 현대 도시의 거대함과 현대 기술문명의 기적(奇蹟)을, 그리고 그의 사상 세계의 복잡성과 심리의 애매성을 체험하고 있다.
‘동시적인 것’의 매혹 – 한편으로는 같은 사람이 같은 시각에 상이하고 상호무관하고 모순된 것을 수없이 많이 체험하는가 하면, 한편으로 다른 곳에 있는 수많은 다른 사람들이 동일한 것을 체험하고 있다는 사실의 발견, 그리고 지구상에서 서로 격리된 여러 곳에서 같은 일이 같은 시간대에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의 발견, 이러한 매혹에 찬 발견과 그에 따른 세계주의를 현대의 기술문명이 현대인에게 의식시켜 주었는데 이러한 세계주의야말로 새로운 시간 개념의 근원이며 현대 예술이 삶을 경련적으로 그리는 원인일 것이다.
이러한 랩소디적인 요소가 현대소설을 종전의 소설과 가장 날카롭게 구별해 주는 동시에 현대 소설에서 가장 영화적인 효과를 이루는 특징이기도 하다. 프루스트와 조이스, 도스파쏘스(John Dos Passos)와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의 작품에서의 플로트와 장면 전개의 불연속성, 사상과 감정의 직접성, 시간척도의 상대성과 모순성 등은 영화의 커팅(cutting)과 용명(fade-in(溶明)이란 ‘영화나 텔레비전에서 화면이 처음에 어둡다가 점차 밝아지는 것’을 가리킨다), 화면 삽입 등의 수법을 연상시키는 요소다.
프루스트가 30년은 좋이 떨어져 있음 직한 두 사건을 마치 단 두 시간의 간격도 없는 것처럼 느끼게 해주는 것도 바로 영화의 마술을 재현한 것이다. 프루스트 소설에서 과거와 현재, 꿈과 명상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손잡는 것이나, 항상 새로운 대상을 찾고 있는 감수성이 시간과 공간 속을 마음대로 방황하는 것, 또는 이러한 끝없고 가없는 상호 연관의 흐름 속에서 공간과 시간의 경계선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 모두, 영화의 생명을 이루는 4차원적 세계에 해당하는 것이다.
프루스트는 한 번도 날짜나 연령을 명시하는 법이 없다. 우리는 주인공이 정확히 몇 살인지 알고 있는 적이 없고 사건의 연대기적 순서조차 끝내 모호할 정도다. 프루스트의 작품에서 경험과 사건들을 연결시켜 주는 것은 시간적인 인접관계가 아니다. 더구나 이러한 경험이나 사건을 연대(기)적으로 정리하고 구분하려는 노력이 프루스트의 관점에서 더욱 무의미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의 견해에 따르면 사람은 누구나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그 사람 특유의 전형적 체험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소년이 청년이 되고 다시 성인이 되더라도 항상 근본적으로 동일한 체험을 한다. 어떤 사건의 의미는 그 사건을 겪고 견뎌낸 뒤 여러 해가 흘러가야 만이 비로소 머릿속에 떠오르기가 일쑤다. 그리고 지나간 세월의 침전물을 현재 시간의 경험과 구별하기는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니 그는 일생 내내, 언제나 민감하고 불안한 신경을 가진 동일한 아이, 동일한 병자, 동일한 외로운 이방인이 아닌가? 인생의 어떠한 처지에서도 항상 이러저러한 것을 경험할 수 있고, 따라서 세월의 흐름에 대한 유일한 방어를 자기 체험의 고정된 유형성에서 찾는 것이 아닌가? 우리의 모든 체험들은 말하자면 한꺼번에 일어나고 마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이러한 동시성은 결국 시간에 대한 부정이 아닌가? 그리고 이러한 부정은 물질세계의 시간과 공간이 우리에게서 앗아가는 저 내면성을 되찾으려는 투쟁이 아니겠는가?
조이스가 프루스트처럼 질서 정연하고 일정한 순서를 가진 시간을 해체하여 자기 마음대로 뜯어 맞추는 것도 역시 그와 같은 내면성과 경험의 직접성을 쟁취하기 위한 것이다. 그의 작품에서도 경험의 연대(기)적 질서 대신에 의식 내용의 상호 대체 가능성이 등장한다. 조이스에게도 시간이란 인간이 그 위를 오락가락하는 방향 없는 길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조이스는 시간의 공간화를 프루스트보다도 더 극단에까지 밀고 나가서 내면적 사건의 종단도(縱斷圖)뿐 아니라 횡단도(橫斷圖)도 그려낸다. 그의 작품에서는 갖가지 이미지와 상념과 착상과 기억들이 전혀 연관성 없이 울뚝불뚝 병존하고 있다. 이들의 출처는 거의 고려되지 않고 그들의 병존성(竝存性)과 동시성(同時性)이 강조될 따름이다.
조이스에서 시간의 공간화는 어찌나 철저히 진행되었는지, 우리는 「율리시즈」를 그 전후 관계를 대강만 알면 아무 곳에서부터나 읽기 시작할 수 있을 정도다. 누구 말처럼 다시 읽을 때부터나 그런 것도 아니고, 읽는 순서 역시 앞뒤로 아무렇게나 읽어도 된다. 독자가 체험하는 작품 세계는 실상 철두철미 공간적이다. 왜냐하면 이 소설은 더불린이라는 대도시를 그리고 있을 뿐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그 도시의 구조를 작품의 구조로 채택하기조차 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여기저기 서성거리고 걸어 다니고 언제 어디서든 마음대로 멈춰 서기도 하는 거리와 광장들의 얽힌 조직을 이 작품에서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이 수법의 영화적 성격을 가장 잘 말해 주는 것은, 조이스가 이 소설의 각 장을 순서대로 쓰지 않고 영화제작에서 늘 그러듯이 플로트의 전후순서를 떠나 여러 장을 한꺼번에 쓰곤 했다는 사실이다.
영화와 현대소설에 나타나는 베르그송적 시간 개념을 우리는 – 영화와 소설에서처럼 뚜렷하지 않을 수는 있지만 – 현대 예술의 모든 장르와 경향에서 찾아본다. 무엇보다도 이른바 ‘심적 상태의 동시성(La simultanéité des états d’âmes)’이 현대 미술의 여러 경향을 연결시켜 주는 기본 체험으로서, 이탈리아의 미래파에서 샤갈의 표현주의에, 피카소의 입체주의에서 조르지오 데 키리꼬(Giorgio de Chirico)와 살바도르 달리의 초현실주의에 이르기까지, 각양각색의 움직임에 일관된 것이다.
정신 활동 과정의 대위법과 그 내면적 상호 연관의 음악적 구조를 발견한 것은 베르그송이었다. 마치 우리가 한 음악 작품을 제대로 듣는 경우 지금 울려 나오는 음정 하나하나와 그전에 난 모든 음정들과의 상호 관계를 귀에 담고 있는 것처럼, 우리의 가장 깊고 중요한 경험에서는 우리가 과거에 체험하여 우리 것으로 만들었던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충분히 이해할 때 우리는 우리 영혼을 마치 하나의 악보처럼 읽게 된다. 그리하여 두서없이 뒤섞인 소리들의 혼돈상태를 지양하고 여러 음정의 예술적 합창으로 변모시키는 것이다.
모든 예술은 혼돈과의 유희요 혼돈에 대한 싸움이다. 예술은 언제나 혼돈을 향해 점점 더 위태롭게 다가가서 더욱더 넓은 정신의 영토를 그로부터 건져오는 작업이다. 예술사에 어떤 진보가 있다면 그것은 혼돈으로부터 탈환해 온 이러한 영토의 끊임없는 확대를 말하는 것일 게다.
영화라는 시간의 분석을 통해 이러한 발전을 또 한걸음 밀고 나갔다. 전에는 음악을 통해서만 표현될 수 있었던 경험을 시각적으로 나타낼 수 있게끔 해준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새 가능성, 아직 비어 있는 이 새로운 형식을 참다운 삶으로 가득 채워줄 예술가는 아직도 나타나지 않았다.”[1]
[1] A. 하우저, 『文學과 藝術의 社會史(現代篇)』, 백낙청/염무웅 共譯, 創作과 批評社, 1993, 서울, 245쪽에서 248쪽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