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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래된 타자기 Dec 06. 2024

한 편의 영화

몽생미셸 가는 길 198화

[대문 사진] 영화 속 무대였던 도빌 로열 호텔


내 기억 속에 떠도는 도빌을 배경으로 찍은 영화는 오직 「남과 여」 한 편뿐이다. 1966년 프랑스 클로드 를루슈(Claude Lelouch) 감독이 제작하고 아누크 에메(Anouk Aimée)와 장 루이 트랭티냥(Jean-Louis Trintignant)이 열연한 이 영화는 한국에서도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다. 흑백과 컬러 장면을 교차시킨 것은 물론이고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인물을 크게 클로즈업시켰을 뿐 아니라 프랑시스 라이(Francis Lai)가 작곡한 주제 음악이 상당히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었다는 점에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영화를 통해 남녀 사이의 통념적 애정 관계를 독특한 시선으로 다뤘다는 점과 프랑스 영화만의 특유의 ‘예술성’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상연된 첫 해 깐느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으며, 다음 해 오스카 최우수 외국어 영화상과 오리지널 각본상을 수상했다.


당시 430,000프랑(우리 돈으로 7천만 원)에 불과한 제작비로 영화를 촬영하다 보니 컬러 필름을 살 돈이 부족하여 흑백 필름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는 감독의 말은 솔직해 보인다. 이 같은 사정으로 클로드 를루슈는 실내 장면은 흑백으로 바깥에서 찍는 장면은 컬러로 촬영했다.


영화를 제작하기 1년전 클로드 를루슈 감독은 「위대한 순간(Les Grands Moments)」이란 영화를 제작하였는데, 그만 실패하고 말았다. 큰 충격을 받은 그는 상심을 달래기 위해 도빌을 찾아가고 이때 그는 도빌에서 「남과 여」를 제작할 것을 떠올렸다


“일이 잘 안 풀릴 때마다 도빌로 갔습니다. 그날은 9월 13일이라고 기억됩니다. 날이 밝았을 때 도빌에 도착했는데 도착하자마자 해변을 찾아 마냥 걸었습니다. 꽤 멀리 걸어갔는데 날씨마저 흐렸습니다. 그때 저 멀리서 역시 해변을 거니는 한 여성을 발견했습니다. 멀리서 봐도 그녀가 매우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그녀 옆에는 여자아이가 뛰놀고 있었습니다. 그녀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가면서 그녀에게 어떻게 말을 걸지를 생각했습니다. 그 순간 앞으로 만들 영화를 위한 아이디어가 떠올랐고 해변을 걸으면서 내내 한 남자와 한 여자에 관한 이야기를 구상했습니다.”


클로드 를루슈는 알제리 태생이지만 유대교로 개종한 프랑스 인으로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부모에 이끌려 전쟁을 피해 알제리로 피신했다가 전쟁 중에 다시 프랑스 지중해가 도시 니스로 돌아와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독특한 경험의 소유자다.


경찰에게 유태인으로 낙인찍혀 학교조차 갈 수 없는 상황에서 모친은 낮에는 어린 자식을 극장에 숨겨놓았는데, 이때부터 후일 영화감독이 되는 이 어린아이는 처음으로 영화와 접하게 된다. 극장에서 하루 종일 똑같은 영화를 반복해 봐도 결코 질리는 법이 없었다고 영화감독은 술회한다. 이때 그가 겪은 어린 시절의 경험은 마치 「시네마 천국」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만든다.


전쟁 후 학교를 졸업한 그에게 부친은 방송국 카메라 기자를 권하면서 카메라 한 대를 선물했다. 이로써 그의 인생이 카메라와 인연을 맺게 된다. 이 시기에 그는 소비에트 연방으로 날아가 비옷 안에 카메라를 숨긴 채 몰래 러시아인들의 일상생활 장면을 촬영하는데, 소련의 실상을 알린 몇 안 되는 프랑스 기자 중의 한 명이었다. 소련에 머무는 동안 모스크바에 있는 영화 제작소 스튜디오를 드나들며 그는 처음으로 영화 제작의 꿈을 갖게 된다.


소련으로부터 돌아온 그는 군대에 복무하면서 뉴스 영화 카메라맨으로 활동하다 감독이 되었다. 군대에서 제대한 뒤에는 소련에서 촬영한 르포르타주 「막이 오를 때」를 통해 그는 제작사인 레 필름 13(Les Films 13)을 설립하기에 충분한 돈을 벌 수 있었다. 그러나 제작사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공증인의 반대에 부딪혀 어쩔 수 없이 기자생활을 계속한다. 이때 그는 특히 자전거 경주대회인 르 투르 드 프랑스(Le Tour de France)나 프랑스의 중서부에 위치한 도시 르망(Le Mans)에서 열리는 자동차 경주대회인 르망 24시(24 Hours of Le Mans)와 같은 수많은 스포츠 행사를 촬영하면서 보도를 이어갔다.


이후 1960년부터 영화 제작에 뛰어들었는데, 그때까지 축적된 경험은 앞으로 탄생할 영화 「남과 여」의 중요한 모티프로 작용할 뿐 아니라 앞으로의 그의 삶을 규정하기까지 한다.


그 예로 먼저 언급할 수 있는 것은 영화감독으로 명성을 쌓은 그의 정치적 태도다. 파리 드랑슈 기차역에서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떠나는 열차에서 도망쳐 새벽에 두 손에 신발을 움켜쥐고 뛰는 어린 유태인 소녀 시몬 베이유(Simone Veil)는 미테랑 정부가 들어서자 사회부 장관에 기용되었다. 1989년 영화감독은 과감히 그녀를 지지하고 나선다. 2012년에는 대선에서 니콜라 사르코지를 선택했다. 2022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에마뉘엘 마크롱 후보를 지지하고 나섰다. 알제리 인이라는 이방인의 피가 흐르는 유태인의 선택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두 번째로 구 소련은 그에게 흥미의 대상이었을 뿐만 아니라 영화 제작의 꿈을 키워준 곳이었고 이때 뉴스 카메라맨으로 녹화해 둔 르포르타주는 후일 그에게 꽤 많은 돈을 벌게 해줄 뿐만 아니라 이때 싹튼 영화 제작의 꿈을 이루게 해 준 원동력이 되었다.


세 번째로 프랑스 자전거 경주 대회와 자동차 경주 대회를 취재하고 촬영한 경험은 영화 「남과 여」에서 주인공의 직업인 카레이서와 자연 연계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13이란 숫자의 상징성이다. 13은 그가 설립하고자 했던 프로덕션 명칭이면서 동시에 「남과 여」를 처음 구상한 9월 13일 도빌에서의 날짜다. 예수는 13일의 금요일에 십자가에 못 박혀 피를 흘리며 숨을 거뒀다. 재밌게도 미국 할리우드 공포영화의 전설이 되면서 수많은 아류를 쏟아낸 「13일 밤의 금요일」은 13일 금요일 밤에 대학교 기숙사에서 벌어지는 연쇄 살인사건을 다루고 있다. 영화감독의 솔직한 고백처럼 구태연한 자신을 살해하고 거듭나기 위한 노력이 13이란 숫자에 담겨있다고 볼 수 있다.


1966년에 제작한 「남과 여」의 성공은 이런 영화감독의 젊은 감각과 경험이 혼재되어 나타난 결과였다. 카메라 앵글에 잡힌 파격적인 인물의 클로즈업 효과에 따른 영상은 바로 다음 해 이브 몽탕과 아니 지라르도가 주연한 「죽지 못해 산다(Vivre pour vivre)」로 자연 이어진다. 이 영화는 이혼 위기에 처한 나약하고도 처량한 부부의 통속적인 이야기를 다룬 작품으로 중간중간 대사 없이 영상만으로 이어지는 파격적인 클로즈업 수법이 두드러진 작품이다. 결국 「남과 여」야말로 이 영화의 전주곡이었던 셈이다.


그의 작품은 젊은 언어로 씌어진 영화였기에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작품이다. 그가 만든 영화를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 특별히 교육받거나 누군가의 도움을 받을 필요조차 없다. 스토리는 그만큼 상투적이고 진부하며 통속적이기까지 하다. 하지만 그가 생각했던 우리네 삶이 그렇듯이 통속적이고 지리멸렬하며 진부하기까지 하지는 않을까 감독은 되묻는 듯하다. 이런 속된 일상의 이야기를 감각적인 카메라 앵글로 예술로까지 승화시켰다는 것은 대체 무얼 의미하는 걸까? 또 영화란 대체 어느 예술 장르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인가? 그는 그가 생각한 바를 신념으로 믿음처럼 압축하여 토로한다.


내게 중요한 건 삶이 아니라 사랑이었다!


그의 이 진솔한 고백은 영화 속 장면과 함께 두 영화 속의 대사가 기억 속을 떠돌게 만든다.


이제 그만 우리 웨이터를 즐겁게 해 줄까요?


- 영화 「남과 여」에서 아이들은 백사장에서 뛰어놀고 호텔 레스토랑에 앉아 늦은 점심식사를 하던 중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에게 건네는 대사.


여자에게는 역시 태양이 필요해!


- 영화 「죽지 못해 산다」에서 남편 영화감독이 젊은 여자 배우에게 빠져 이혼 위기에 처하자 아내가 여자 친구와 함께 스키장을 찾아 나이트클럽에 가는데 홀로 된 남편이 스키장에까지 자신을 찾으러 나타난 걸 보고 보란 듯이 신나게 놀던 중 허탈해진 상태에서 곁에 있는 친구에게 독백처럼 던지는 대사.


영화 <남과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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