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생미셸 가는 길 202화
[대문 사진] 베네흐빌 바닷가 풍경
누구나 집 한 채쯤 장만하고 싶은 꿈을 갖고 있다. 그러다가 여유가 생기면 시골 한적한 곳에 또 하나의 집을 짓고 살았으면 하고 바란다. 나이 들수록 꿈은 더욱 강력해진다. 공기 맑고 조용하며 전망 좋은 곳에 집 한 채 짓고 휴식을 취하며 사는 것이 우리나 이들이나 다 같은 욕망이리라.
공간은 존재를 규정한다. 존재가 어떤 공간에 머무르냐에 따라 인간 됨됨이도 달라진다. 공간에 따라 존재감이 달라지는 게 그런 이유에서다. 건축가는 그럼으로써 우연찮은 곳에 존재의 근사한 공간을 창조해 내는 마술사라 할 수 있다.
바닷가를 여행하다 보면 전망 좋은 곳에는 반드시 멋진 집들이 들어서 있다는 사실에 발걸음을 돌리게 마련이다. 이 집은 누구의 집, 또 이 집은 누구의 집이란 가이드 북까지 등장한다. 꼭 그런 집에 사는 사람을 알아야 하고 반드시 그 집 앞을 얼쩡거릴 필요까지 있으랴마는 전망만큼은 최고이기에 누구의 별장 할 것 없이 발길은 자연 그 집 언저리를 맴돈다.
패션 디자이너들 가운데에 유일하게 노르망디에서 태어나 자란 크리스티앙 디오르는 여름휴가 때만 되면 스페인 지중해가 해변도시인 알리칸테 근방을 떠돌다가 결국 남불의 바르(Var)에 별장을 짓고 휴식을 취하곤 했다. 생선 가시가 목에 걸려 기침을 연발하다가 심장마비로 사망한 곳 역시 햇살 가득한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의 한 마을이었다. 에르메스 회장은 모로코 수도에 별장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브 생 로랑도 모로코 아틀라스 산맥 북쪽 산기슭에 위치한 꽤 오래된 마을, 해만 기울면 붉은빛으로 물드는 마라케시의 한적한 별장에서 휴식을 취하곤 했다. 공통점은 이들 모두가 뜨거운 열기와 태양을 좋아했다는 사실이다.
이브 생 로랑은 어느 날 느닷없이 프랑스 북서쪽 노르망디의 한 작은 마을에 있는 빌라를 구입하여 마라케시 대신 이곳에서 여름휴가를 즐긴다. 이유는 오직 한 가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À la recherche du temps perdu)』의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를 좋아해서였다.
패션 디자이너가 소설가를 좋아할 리 만무한데 그는 프루스트를 얼마나 좋아했던지 이곳 베네흐빌 언덕의 빌라를 구입하여 집안을 온통 프루스트가 살던 벨에포크의 복고풍으로 꾸몄다. 심지어 온 집안을 작가가 좋아할 것만 같은 분위기로 바꿨다. 그는 왜 작가들을 그토록 좋아한 것일까? 특히 프루스트에 빠진 이유는 뭘까?
이 빌라는 두 사람이 공동으로 구입하기 전에 원래 갈리마르가 소유하던 빌라였다. 갈리마르(Gallimard)는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펴낸 출판사를 창업한 출판인이다. 갈리마르는 이때 몇 번인가 인근의 꺄부르를 찾은 소설가를 집으로 초대한 적이 있는 모양이다. 이브 생 로랑 역시 이 저택에서 몇 번 인터뷰에 응한 적이 있는데, 패션 디자이너는 집을 방문하고부터 소설가의 열렬한 추종자로 변신한다.
“1966년 이래로 우리 두 사람은 여름마다 모로코의 마라케시 별장에서 여름휴가를 즐겼습니다. 하지만 더위에 지친 우리는 마라케시 별장 대신 트루빌 근처에서 여름을 보내기로 작정했죠. 그러던 중에 비데흐만(Bidermann) 직물 회사 그룹이 샤토 가브리엘(Château Gabriel)을 팔려고 내놓은 겁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 두 사람은 지금의 베네흐빌 빌라를 구할 수 있었습니다. 빌라는 전쟁 이후로 사람이 살지 않는 텅 빈 곳이었습니다. 지붕에 구멍이 뚫려 있기도 했죠. 이곳에서 프루스트를 떠올린 것은 이브(생 로랑)였습니다. 우리는 이곳이야말로 가장 멋진 전망을 즐길 수 있는 빌라일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을 뿐만 아니라 이 전망 좋은 빌라를 우리 두 사람은 정말로 좋아했습니다. 여기서 바라보는 도빌의 빛은 장엄하기까지 했기 때문입니다.”
알뱅 미셸(Albin Michel) 출판사에서 펴낸 『이브 생 로랑과 피에르 베르제의 은밀한 낙원(Les Paradis secrets d’Yves Saint Laurent et Pierre Bergé)』에서 피에르 베르제가 털어놓은 속내다.[1]
피에르 베르제는 참 복잡다단한 삶을 산 사람이다. 이브 생 로랑과의 동성애자이면서 사실상 동반자처럼 살았던 그는 한 마디로 평생 역사적으로 길이 회자될 이브 생 로랑의 패션쇼를 개최해 온 인물이다. 사업수단 또한 대단하여 평생 ‘돈’과 ‘명예’를 쫓아 산 인물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좌파적 정치 성향에다 동성애 지지자였던 그였지만 바스티유 오페라 상임 감독이었을 시절에는 오케스트라 지휘자인 바렌 보임을 내쫓은 인물이기도 하다. 천안문 사태 이후로 중국에 등을 돌려 망명한 중국인들에게 기꺼이 은신처를 제공했던 기이한 이력도 지니고 있다. 중국이 1860년 제2차 아편전쟁 당시 베이징에 있던 중국 황제의 이화원(頤和園)을 불태우는 과정에서 프랑스 군인들이 훔친 두 개의 청동 동물 머리(쥐와 토끼)의 반환을 요구했으나 실패했을 때, 사업가인 베르제는 “나는 지금 당장 청동 머리를 중국 정부에 제공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들이 해야 할 일은 인권을 구현하고, 티베트인들에게 자유를 주고, 달라이 라마를 그들의 영토에 받아들이겠다고 선언하는 것뿐이다.”라고 외쳤던 특이한 인물이기도 하다.
이브 생 로랑과 피에르 베르제 두 사람이 구입한 샤토 가브리엘(Château Gabriel)은 건축가 자크 그랑쥬(Jacques Grange)가 맡았는데, 두 사람의 친구이기도 한 건축가는 네오 고딕 양식의 저택 장식을 위해 이탈리아 영화감독 루치노 비스콘티(Luchino Visconti)의 영화 세트와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의 문학적 상상력에 흠씬 젖어 있던 이브 생 로랑(Yves Saint Laurent)의 남다른 집착을 충분히 반영하여 호화로운 직물과 값비싸고 귀중한 가구들을 이용하여 실내를 꾸몄다. 1983년 패션 잡지 <보그(Vogue)>(프랑스 판)에 게재한 사진들을 보면 이브 생 로랑의 취향이 어떻게 반영되었는지를 여실히 확인할 수 있어 흥미롭기까지 하다.
두 사람의 친구이기도 한 자크 그랑쥬는 이브 생 로랑의 요청에 따라 프루스트의 세계를 창조한 것이다. 각 방의 이름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등장하는 캐릭터의 이름을 따서 지었는데, 이브 생 로랑은 스완(Swann), 피에르 베르제는 샤를뤼 남작(Baron de Charlus)이란 명패가 붙어있는 방을 사용했다.
약 800제곱미터의 거실 공간이 있는 지상층에는 위층으로 이어지는 웅장한 나무 계단이 설치된 입구 홀, 2개의 대형 거실, 도서관, 식당, 당구장, 거대한 테라스에서 공원으로 이어지는 무성한 식물이 자라고 있는 겨울 정원에 이르기까지 어디 내놓아도 손색없는 노르망디 풍의 빌라였다. 1층은 집주인을 위한 공간이고 3개의 스위트룸이 갖춰져 있으며, 2층에 있는 6개의 침실은 모두 손님용 방으로 사용되던 공간이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을 주제로 자크 그랑쥬가 완전히 새롭게 디자인한 샤토 가브리엘(Château Gabriel)은 30헥타르 규모의 공원에 러시아식 여름 별장인 ‘다차(datcha)’가 들어서기도 했다. 통나무는 시베리아에서 가져왔으며, 프랑스에서 제작한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은 19세기 것으로 알려졌다.
이 고요한 우주를 상징하는 공간에서 창조적 재능의 소유자였던 디자이너는 생각에 잠기기를 좋아했다고 전해온다. 정원에 완성한 여름 별장은 이브 생 로랑에게 있어서 피난처 구실을 톡톡히 한 공간이었던 셈이다. 아쉽게도 이브 생 로랑 사후에 아름답고 멋진 빌라는 룩셈부르크 회사를 통해 러시아 사업가에게 매각되어 현재는 주인이 바뀐 상태다.
베네흐빌 쉬흐 메흐에는 또 한 채의 빌라가 눈길을 끈다. 현재 청소년 복지 교육 기관으로 사용하고 있는 이 빌라는 미국인 부부의 간절한 소망과 애틋함이 묻어나는 아주 특별한 장소다.
노르망디만의 특별한 빌라 건축 양식을 보여주는 마누아 데 까이유에(Manoir des Caillouets)는 1906년 마리 포티에(Marie Pottier)가 프랑스 르노 자동차의 창업주인 르노 가문의 주문을 받아 지은 저택이다. 1938년 노르망디가 좋아 이 마을까지 흘러 들어온 부유한 미국인 토마스 프란시스 게리(Thomas Francis Gurry)와 그의 아내 시몬 들라티(Simone Delaty) 부부가 매물로 나온 저택을 사들인 것이다.
그렇듯 빌라는 훌륭한 역사를 지녔을 뿐 아니라 카니지 언덕(Mont Canisy)에 위치해 있어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고, 도빌 해안선의 멋진 전망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부부는 이곳에 별도로 마구간을 짓고 승마를 즐기며 살았다. 그러나 2차 세계 대전 발발하자 이곳에 주둔한 독일군이 몽 카니지에 위치한 빌라 인근에 해안 대공포 포대를 설치함은 물론 연합군의 상륙작전을 예의 주시하는 진지를 구축하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전쟁 중에 독일군에 재산을 모두 강탈당한 토마스 프랜시스 게리는 전쟁이 끝나자 미국으로 되돌아가기로 결정하고 빌라를 매각할 계획을 세웠다. 이때 그의 아내 시몬은 남편에게 빌라만큼은 어려움에 처한 어린 소녀들을 위하여 사용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간절히 애원하면서 당시 고아가 된 소녀 아이들을 위한 ‘가정 경제 학교’가 될 수 있도록 남편을 설득했다.
시몬 들라티는 남편을 처음 만났을 때 가족도 잃고 친척마저 알 길이 없는 외톨이 고아 출신이었던 자신의 처지는 물론이고 정부에서 운영하던 고아원에서 자라 사회 복지사의 길을 걸어갔던 아득한 젊은 시절의 기억까지도 들춰냈던 것이다. 정부에서 지원하는 사회 복지관을 운영하기도 한 남편은 아내의 뜻에 따라 기꺼이 빌라를 파리 시에 기증하고 보살핌 속에 교육을 받아야만 하는 ‘고아가 된 아이들을 위한 교육 기관’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선처를 베풀었다.
1963년 처음 문을 연 아동 사회 복지 시설이자 교육기관인 마누아 데 까이유에(Manoir des Caillouets) 기숙학교는 현재 파리 시가 공적 자금을 투하하여 운영하고 있는 엄연한 청소년 교육 기관이다. 어려움에 처해 돌봄이 필요한 14세에서 18세까지의 여학생들이 기숙사에서 기거하며 교육을 받고 있다. 이 기숙사 학교는 도빌의 생 조셉 고등학교(Lycée Saint-Joseph)와 협력하여 기술 교육 및 유아 보육 교육을 진행하는 사회 복지 교육 기관으로 거듭나면서 처음과는 달리 21세까지 연령을 높여 잡아 이민자 가정의 소외된 남녀 학생들이 미래를 설계할 수 있도록 명실상부한 교육 기관으로 거듭났다.
지역 언론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2023년은 이 기숙학교가 60주년을 맞은 뜻깊은 해였다. 기증자이자 설립자의 뜻을 받들어 문을 연 시골 학교는 한창 미래에 대한 꿈을 간직한 소외 계층의 학생들에게 희망을 주는 장소로 탈바꿈한 지 어언 60회가 된 것이다. 고아로 자란 한 미국 여인의 간절함과 애틋함이 배어 있는 이 공간이 세상 어떤 빌라보다도 훌륭하고 멋지고 자랑스러운 역사적 건축물로 남을 것임은 분명해 보인다.
건물을 이리저리 둘러보다 전망 좋은 장소로 되돌아 나와 테라스에 서자 발치 아래 바다가 내려다보인다. 바닷가 쪽으로 내려와 해변 백사장을 걷던 순간에도 순순히 희망에 찬 믿음에 빠져든다.
해가 진다. 노을이 그 어느 때보다도 붉다. 마음이 무언가 차오르는 느낌인 것은 붉은 해 때문인가 아니면 한 여인의 따뜻한 ‘사회적 기부’가 준 감동으로 인해서인가? 나는 오래도록 지는 해를 바라보며 붉은 해에 물들어가는 세상이란 바다를 마냥 떠돌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1] 화니 게농 데 메나흐(Fanny Guénon des Mesnards), 「노르망디의 이브 생 로랑 저택」, 애드(AD) 매거진 2023년 1월 9일 자 기사에서 재인용.
[2] 1983 패션 잡지 <보그(Vogue)>에서 인용한 호르스트 P. 호르스트(Horst P. Horst)의 빈티지 사진(위의 기사 참조) 및 이브 생 로랑 기념관 공식 홈페이지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