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생미셸 가는 길 203화
바닷물이 차갑다. 손바닥 안에 담긴 바다에 찬기운이 스며든다. 차가움 감도는 별다른 세상의 빛으로 빛나는 텅 빈 바다.
아침의 세상 밖으로 걸어 내려와 순 자연의 백사장에 발을 디딜 때까지만 해도 손은 따뜻했다. 아내의 손을 잡을 만큼 온기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새 바닷가를 거닐면서 찬 바람에 손을 놓아버릴 정도로 온기를 잃어버렸다. 바람은 연유를 알 수 없으리만치 세차고 바람 부는 해변에 서면 따뜻한 온기부터 먼저 그리워진다.
정복왕 기욤의 흔적을 찾아 나선 길이 바닷가 해안 마을로 이끌었다. 지금 서 있는 백사장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울가트(Houlgate)에 가면 노르망디 공국을 이끌던 그의 자취를 마주할 수 있겠지. 그곳에 가면 처음 따뜻했던 출발의 온기를 되찾을 수 있겠지 싶다.
프랑스 마을 문장에서 유일하게 발견되는 바이킹의 범선 드라카르(Drakkar). 바닷가 마을 빌레흐 쉬흐 메흐(Villers sur Mer) 문장에 새겨진 도안을 바라본다. 바이킹은 이곳에 정착했고 그들이 건조한 배를 타고 바다와 강을 누비고 다녔다. 문장에 도안된 배 한 척은 지금으로부터 천 년 전의 역사를 압축해서 보여준다. 그 상징이 무얼 의미하는지는 별 개로 하더라도.
신발에 닿는 모래의 감촉, 물살에 쓸리는 모래 알갱이들, 밀려왔다 밀려가는 물살의 되풀이에 소스라쳐 날아오르는 물새 떼만이 시끄럽게 울어대는 텅 빈 바다, 저 바다에 면한 백사장을 왜 이들은 ‘검은 소 떼(Vaches noires)’라 이름했을까? 바다에서 보면 산기슭에 쏟아져 내린 석회암 덩어리들이 마치 풀을 뜯는 소 떼 형상이어서였을까? 산기슭엔 목초지가 펼쳐지고 검은빛을 띤 소 떼가 풀을 뜯고 있는 걸까? 지명은 때로는 지도 속의 상징이 되기도 한다.
되돌려진 발걸음에 집들이 눈부시게 떠오른다. 차가운 빛을 품고 있는 집들, 이 차가움은 온몸의 감각으로 파고든다. 「남과 여」의 감독은 이곳을 제2의 고향으로 삼았다. 전쟁 중에 알제리로 피신한 그가 늘 동경하던 곳은 바다였다. 고향으로 돌아올 수 없었던 그는 니스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다 전쟁 후에 비로소 고향을 찾았다. 그리고 그를 성공한 영화감독으로 만든 이곳 바닷가를 배경으로 삼아 찍은 영화가 「남과 여」다. 바닷가에서의 시간이 정지된 감각적인 영상, 정상적인 시각보다 빨리 돌아가는 시침으로 사랑의 감정을 다시 느끼고자 했던 한 남녀와 한 여자의 이야기는 오직 바다에서 맛보는 온도의 감각만이 읽힌다.
그리니치 자오선이 통과하는 이곳 프랑스 북서쪽 바다에 그어진 자오선은 그리니치 정오의 시간을 오후 1시 앞선 시각으로 돌려놓는다. 가리비 조갯살에 뿌려진 레몬 맛처럼 영국이란 땅의 기억을 되살리기에는 한 시간이 차이가 난다.
서두르자! 가야 할 길이 아직도 아득하다. 빛바랜 그림엽서 속의 풍경은 기억밖으로 종종걸음 친다. 쾌청하지도 유쾌하지도 쓸쓸하지도 않은 바닷가에는 사람 대신 집들 만이 줄지어 서 있다. 무언가를 기다리는 행렬인 것처럼.